하이볼이라는 말에는 흥분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 하이볼. 하이볼. 하이볼. 그렇지 않습니까? 클로티드 크림과 스콘이 나오는 하이티가 떠올라서? 아니면 하이 C를 가뿐하게 소화하는 파바로티 생각에? 하이볼을 생각하면 기분이 ‘하이’해진다. 좀 취한다고 해야 할까.

마시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상한 일이다. 하이볼은 취하자고 마시는 술도 아니라서. 이것저것을 섞지만 폭탄주처럼 열을 맞춰 좌르륵 붓고 오늘밤 우리는 함께 죽어야 한다는 동지 의식을 다지며 마시는 술과는 거리가 멀다. 영국에서 골프를 하다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던데, 하이볼은 골프보다는 좀 더 느슨한 운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골프보다는 게이트볼이다. 게이트볼을 하시는 분들이 누리는 오후 두 시의 잔디 구장과 닮았다고 해야 할까. 술이라기보다는 개성 있는 음료수 같다. 도수 있는 탄산수? 레몬이나 라임 맛이 더해진 탄탄한 탄산수? 하이볼은 내게 그 정도의 느낌이다.

명랑하고 건강한 기운이 가득한 하이볼 한 잔. /위키피디아

경쾌한 것이다. 조잘조잘 대는 참새를 보는 그런 경쾌함. 탄산수의 탄산 때문일까? 하이볼이라는 이름 때문일까? 둘 다겠지. 하이볼이라는 산뜻한 이름을 가졌어도 맛이 그러지 못했다면 하이볼은 하이볼이 아니었겠지. 장미라고 불리지 않아도 장미는 장미였을 거라는 말을 좋아하지만 하이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이볼이 하이볼이라고 불리지 않았다면 하이볼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이볼’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순간 하이볼의 운명은 결정된 것으로 봐야 한다. 아주 화려하거나 특별하지는 않겠지만 명랑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게 될 거라는. 신비하거나 그윽하지는 않아도 다복하고 운도 좋을 거라는. 그런 운명 말이다. 또 평범하지만 평범한 것만은 아니어서 끌리고, 만나면 밝은 기운에 나도 화사해지는 그런 특별한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위스키에 탄산수를 붓고 얼음도 잔뜩 넣어 마시는 게 하이볼이다. 넓은 범위에서의 하이볼은 위스키 말고도 진이나 보드카에 탄산수를, 또 진저에일이나 토닉워터를 타는 것까지도 말하는 것 같지만 나는 ‘위스키에 탄산수를 넣는 게 하이볼’이라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하이볼에 한에서라면 근본주의자인 것이다. 탄산수 말고 토닉워터나 진저에일을 타는 것도 허용. 레몬이나 라임, 오렌지, 스다치 같은 시트러스 열매의 즙을 짜는 것도 허용. 이게 오리지널 하이볼이다.

애매한 것은 이런 것이다. 비터스를 넣는 것까지 허용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크 트웨인의 사례가 떠올랐다. 버번위스키 마니아였던 그는 영국에 가서 하이볼에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런던의 호텔에서 미국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스카치위스키 한 병, 레몬 한 개, 부순 설탕 몇 줌, 앙고스투라 비터스 한 병을 준비해 달라고. 집에 돌아가서 샤워를 하고 이것들로 만든 술을 마시고 싶다고.

‘하이볼 입덕기’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이야기에서 나는 앙고스투라 비터스의 존재가 살짝 걸린다. 앙고스투라 비터스나 페이쇼드 같은 어딘지 특별해 보이는 비터스가 나오면 이건 하이볼이 아니지 싶어서. 칵테일의 영역인 것이다. 진토닉처럼 단순한 술도 칵테일이지만, 칵테일은 복잡하다. 뭐니 뭐니 해도 하이볼의 특징은 간편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집에 있는 위스키에 탄산수만 더하면 된다. 레몬이나 라임은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뭐. 이렇게까지 쓰고 보니 하이볼 국제심판이라도 된 것 같지만, 진리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저 조용한 애정.

다시 마크 트웨인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의 하이볼 이야기를 듣고 간절함이랄지 다급함이랄지가 느껴져서 웃음이 났다는 말을 하고 싶다. 본인이 미국에 가서 직접 준비해도 되지만 그러면 때는 늦으리라는 술꾼의 갈급한 마음이 전해졌던 것이다. 영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미국에서도 샤워하고 나서 하이볼을 마시겠다는 연속에의 의지가 귀엽다. 하이볼 있는 삶을 이어나가겠다며 ‘잠시라도 끊을 수 없다’는 그 의지. 하이볼 여백 상태는 한 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그 의지가 말이다.

여기서 잠깐. 그가 남긴 무수한 뼈 있는 유머들은 하이볼을 만나고 나서 더 강화되었을까? 진지하게 의심해본다. 그냥 억측만은 아니다. 왜 술을 마시면 그런 거 있지 않나. 내가 상당히 재미있는 말을 하는 사람인 것 같고, 매력도 좀 있는 것 같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웃는 건 나의 유머와 매력에 빠져서 그런 것 같고, 그래서 자기애가 커지는 바로 그 충만한 느낌 말이다. 이런 게 반복되면 강화되고, 습관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성격이 되기도 한다. 원래도 자질이 충분했던 그이지만 하이볼을 마시고 했던 말들의 반응이 더 좋았던 건 아닐까? 그래서 마크 트웨인은 하이볼과 떨어질 수 없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정확히 말하자면, 마크 트웨인이 아내에게 청한 건 하이볼이 아니고 ‘스카치 앤 소다’다. 이제는 버번이나 라이 위스키를 쓰기도 하지만 하이볼이 만들어진 건 영국이었으니까 스카치로 하이볼을 만들기 시작했다. 조니 워커, 탈리스커, 글렌리벳, 글렌모렌지, 하일랜드 파크, 라프로익, 라가불린, 아드벡… 이런 게 다 스카치위스키다. 다 스카치지만 조니 워커 하이볼과 라가불린 하이볼의 맛은 완전히 다르다.

산토리에서 나온 가쿠빈으로 하이볼에 입문, 조니 워커와 글렌 리벳 하이볼을 좋아하던 나는 라가불린으로도 하이볼을 만든다는 걸 알고 좀 놀란 적이 있다. 스모키한 맛보다는 달달한 맛의 위스키가 더 하이볼에 어울린다고 생각했기에. 또 라가불린은 하이볼을 만들기에는 넘치는 것 같아서. 마셔보니 아니었다. 라가불린으로 만든 하이볼은 조니워커 레드나 글렌피딕 12년산으로 만든 하이볼에는 없는 다른 게 있었다. 라가불린 맛. 라가불린 하이볼에서는 라가불린 맛이 났던 것이다.

이런 걸 모르던 시절, ‘스카치 앤 소다’라는 말이 좋아서 모자를 산 적이 있다. 런던의 소호에서였다. 간판의 이름을 보고 홀린 듯 들어가서 핫핑크 색 털모자를 사서 나왔었다. ‘어머 귀여워!’라며 스카치 앤 소다 안을 어슬렁거리던 나는 몇 년 후에 스카치 앤 소다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스카치 앤 소다’는 네덜란드 브랜드인데, 이 이름을 지은 창업주는 어떤 스카치로 스카치 앤 소다를 즐기시는지 궁금하다. 스카치는 모든 술을 통틀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라는, 그저 그런 뻔한 말만은 안 하면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