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모습이 수많은 영혼을 울렸다. 에버랜드 ‘소울리스(Soulless·영혼 없는)좌’ 이야기다. 놀이기구 아마존 익스프레스 앞에서 안내 사항을 속사포 랩으로 전하는 김한나(23)씨. 큰 힘 들이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발음이나 박자, 음정까지 흠 잡을 데가 없다. 과한 열정 걷어내되, 해야 할 일은 놓치지 않는 모습이 포인트. 김씨의 모습을 담은 영상은 현재 유튜브 조회 수 1700만을 기록했다.

소울리스좌가 놀이공원에만 있는 건 아니다. 편의점, 화장품 가게, 카페처럼 20~30대 서비스직 아르바이트 직원들도 소울리스좌 대열에 동참한다. 자동 재생하는 녹음기처럼 이들 목소리엔 영혼이 부족하다. 소울리스라는 말에 부정적 의미만 있는 건 아니다. 서툰 열의를 보이는 대신 효율 있게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가리키기도 한다. 우리의 청춘들은 어쩌다 ‘소울리스’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을까. 손님 대면을 주 업무로 하며 감정 노동을 해야 하는 서비스직 아르바이트 청년들을 만나 그 이유를 들어봤다.

서울 마포구 카페 오바도즈에서 근무하는 부모(25)씨.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최저임금일수록 영혼 가출 빈도 높다?”

지난달 중순, 경기도 평택의 한 편의점에서 야간 근무 중이던 송치훈(23)씨는 알바 경력 3년 만에 최대 위기를 겪었다. 60대 남성 2명이 편의점 앞 노상 테이블에 자리를 깔고, 송씨에게 “소주 좀 내오라”고 한 것. 송씨는 ‘서빙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더 시끄러워질까 봐 요구를 들어줬다. 그런데 이미 만취한 이들은 송씨에게 안경을 벗어보라 하고, 팔을 세게 잡아당겼다. 결국 참지 못한 송씨는 영업 방해로 이들을 경찰에 신고했다.

송씨는 “밖에서 피우던 담배를 편의점 안에서마저 피우는 손님,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내다 병을 깨는 일은 차라리 예삿일”이라며 “처음엔 열의가 넘쳐서 바닥도 더러운 얼룩이 내 눈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닦는 등 시키지 않는 일도 했다. 하지만 나를 지치게 하는 ‘밉상’이 나타나면, ‘이렇게까지 돈을 벌어야 할까’ 고민스럽고 영혼이 가출하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충북 청주 지역 편의점에서 근무하는 김모(23)씨는 ‘내 근무 태도는 손님의 불친절한 행동과 상관없구나’ 하고 느낄 때 소울리스로 변한다고 했다. 김씨는 ”택배, 막일 등 다른 일도 많이 해봤지만, 유난히 편의점에서는 아르바이트를 하대하는 손님이 많다”며 “최저임금을 받는다고 손님한테까지 최저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손님 일부는 이유 없이 반말하거나 가능하지 않은 서비스를 요구하며 트집을 잡는다”고 했다.

카페에서도 아르바이트 직원들을 소울리스로 변하게 하는 일이 많다. 서울 마포구의 카페 오바도즈에서 일하는 부모(25)씨는 “커피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게 꿈이라 일을 시작했다. 다른 곳에서는 계산할 때 카드를 집어던지거나, 음료를 자리까지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진동 벨을 테이블에 던지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일을 겪는다면 소울리스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롯데월드 어트랙션 아트란티스에서 일하는 유준서(26)씨.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뛰는 ‘왕 손님’ 위에 나는 ‘소울리스 알바’

‘소울리스’라는 표현은 소울(외래어표기법으로는 ‘솔’)과 친절이 충만한 상태가 ‘정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일본에 오모테나시(おもてなし·극진한 접대)가 있다면, 한국엔 ‘손님은 왕이다’ 문화가 있다. 손님을 상대로 친절을 베푸는 습관이 과도하다 보니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포장이세요?”라는 우스꽝스러운 표현도 생겨난다. 아메리카노와 포장 상품은 존대 대상이 아니므로 높여서 표현할 수 없다. ‘죄송하지만’ ‘실례지만’ ‘괜찮으시다면’과 같이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쿠션어(완곡어법)’도 서비스직 아르바이트 직원들이 흔히 쓰는 말투다.

서비스직 직원에게 바라는 친절 기대치가 높다 보니, 오히려 ‘소울리스’가 탄생하는 역결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 교수는 “정해진 임금을 받고 주어진 역할을 하는 사람일 뿐인데, 우리 사회에는 이들에게 과도한 호의를 기대하거나, 부조리까지도 감수하길 바라는 분위기가 있다. 그것에 반감을 가진 청년들이 자기 성찰 결과로 ‘소울리스’ 태도를 보이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별별 손님을 응대하며 상처 받는 서비스직 청년에게 ‘소울리스’는 처방전이 되기도 한다. 커뮤니티 사이트 ‘리멤버’에는 ‘직장인이라면, ‘소울리스좌’처럼 일하라’는 글이 올라왔다. 소울리스가 현명한 방법인 세 가지 이유를 소개한 내용이다. 글에서 소울리스는 ‘적은 에너지로 최대 효율을 뽑아내고’ ‘하이 텐션 대신 자신만의 캐릭터를 유지하며’ ‘일과 자기 자신을 분리해 쓸데없는 소울을 낭비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했다. 일은 일일 뿐이라는 관조의 극치가 소울리스라는 것이다.

서울 송파구의 한 편의점에서 일하는 신모(37)씨. / 이건송 영상미디어 기자

◇“난 기계 아니고 사람” 느끼게 하는 한마디

유준서(26)씨는 2017년 12월부터 롯데월드의 캐스트로 일해 온 최고참 직원이다. 학업과 군 복무로 공백기는 있었지만,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유씨는 “놀이기구에 탄 사람들의 함성이 들리거나, 마이크를 차고 율동을 준비할 때면 아직 가슴이 벅차 오른다”고 했다. 하지만 그도 운영 지침에서 벗어나는 요구를 하는 손님을 만날 때는 달랐다. 유씨는 “아이 키가 작아 기구를 탈 수 없는데,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고성을 지르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땐 열정보단 오히려 차분하게 소울리스처럼 대응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말했다.

유씨는 지금까지 겪은 손님들을 세 부류로 나눴다. 불편한 점이 생겼을 때 ‘방법이 없을까요?’ 하며 친절히 물어보는 ‘탐구형’. 다짜고짜 해결해 달라며 찾아오는 ‘대뜸형’. 부탁이 아닌 지시 어투로 요구 사항을 말하는 ‘당연형’이다. 유씨는 “직원도 사람인지라, 무례한 손님보다 탐구형 손님에게 소울맥스(soul-max·영혼 충만)좌가 될 수밖에 없다. 주로 20대 여성 손님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많은데, 서비스직의 고충을 잘 아는 연령대라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롯데월드에서 근무하는 김모(26)씨는 긴 말보다 ‘감사합니다’ 한마디가 마음을 녹인다고 했다. 롯데월드 입장권 무인 판매기 앞에서 근무하는 김씨는 어려움을 겪는 중년 손님이 있으면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먼저 다가가서 알려준다. “부모님이 생각나서 적극적으로 먼저 도와드리는 편이에요. 그런데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듣는 일은 생각보다 드물어요.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게 느껴질 때는 온종일 보람차더라고요.”

대형 잡화 판매점 올리브영에서 2년째 일하는 이윤식(27)씨도 이번 달 초 ‘감사’의 힘을 실감했다. 이씨가 아이브로우 제품을 문의하는 30대 손님에게 상품을 추천했는데 그 손님이 ‘친절히 알려줘서 고맙다’며 웃어 보였다. “저희가 영혼 없는 사람으로 변하는 이유는 직원과 손님 서로가 서로에게 상냥하게 말 한마디 할 수 있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에요. 스스로 시키는 일만 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다가도, 고맙다는 표현 한마디에 제 자신을, 영혼을 되찾는 듯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