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안병현

햇병아리 조교수 시절이었다. 모시고 있는 스승님과 비행기 뒤꽁무니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독일에서 열리는 학회 참석차 나선 길이었다. 유럽은 초행인 데다 열두 시간 이상의 여정이라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옆에는 쳐다보기도 어려운 사부님께서 버티고 계시니 그야말로 좌불안석이었다.

이륙 후 좌석벨트 등이 꺼지자마자 승객들이 우르르 뒤쪽으로 몰려와 담배를 피워대기 시작했다. 비행기 뒤쪽에서는 흡연을 할 수 있는 때였다. 좁은 좌석에 끼어 앉아 그렇지 않아도 좀이 쑤시는데 매캐한 담배 연기까지 여행 내내 콧구멍으로 무상출입하니 인내가 쉽지 않았다.

사실인즉, 김포국제공항에서 일찌감치 체크인할 때 앞쪽의 금연석을 선택할 수 있었다. 좌석 예약제 없이 공항에 오는 순서대로 원하는 좌석을 배정받는 시절이었다. 여행객들은 대체로 앞쪽을 선호했다. 담배 연기 없고, 타고 내리기 편리할 뿐더러 흔들림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 선생님께서 앉아서 담배를 즐기며 가시겠다고 발권 직원에게 뒤쪽의 흡연석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감히 따로 앉겠다는 말씀을 드릴 처지가 아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흡연석에 앉았는데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너구리 굴 속에 있으려니 막말로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싫은 내색을 억지로 감추고 끙끙 앓았다. 힐끗 눈치를 보니 선생님 역시 후회막급이신 듯했다. 초주검으로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다. 담배 연기가 구석구석에 배어들어 움직일 때마다 찌든 냄새가 코로 훅훅 들어왔다.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목적지에 밤늦게 도착했다. 좁은 호텔 방에서 속옷 바람으로 쭈그리고 앉아 학회 프로그램을 펴놓고 눈길 가는 연제를 골라 표시했다. 다음 날 아침 간단한 개회식이 끝나면 여러 방에서 동시에 학술 발표가 진행된다. 따라서 관심이 있는 연제들을 시간에 맞춰서 미리 정해 놔야 했다.

긴장 때문인지 시차 때문인지 일찍 잠에서 깼다. 아침 식사 후 선생님께서 외마디 말씀과 함께 학회장을 향해 빠른 발걸음을 옮기셨다. “따라오게나!” 얄궂게 어젯밤 찜했던 곳의 반대 방향이다. 잠시 마음의 갈등이 일었지만 이미 몸은 선생님의 그림자를 따라가고 있었다. 미동도 없이 앉아 계신 옆자리에서 오전 내내 꾸벅꾸벅 졸았다.

점심은 뷔페로 준비돼 있었다. 접시를 들고 졸졸 선생님의 뒤를 쫓았는데 안면 있는 외국 교수를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셨다. 헤어지면서는 데리고 있는 젊은 친구라는 말씀과 함께 인사를 시켜 주셨다. 오전 내내 듣고 싶은 강의를 다 놓쳐서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교과서에 이름이 등장하는 대가(大家)들을 만나 악수까지 하니 기분이 많이 풀렸다.

오후 일정이 끝나고 저녁 식사를 했다. 여유롭게 시내 산책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선생님의 뜻에 따라 어두컴컴한 호텔 바(bar)의 구석에 몸을 맡겼다. 안주도 없이 시커먼 맥주 한 잔씩 앞에 놓고 선생님께서 복기를 시작하셨다. 누구 강의는 기발한 발상이 좋았고, 어떤 연제는 알맹이 하나 없는 맹탕이고, 아무개 교수는 준비를 많이 했고, 모 선생은 똑같은 내용을 몇 년째 쇠 뼈다귀 우려먹듯 한다는 등의 뒷담화가 밤늦도록 이어졌다. 중간중간에 방귀깨나 뀌는 석학들에 얽힌 일화도 들었다. 일본의 어느 일류 대학 주임교수는 한껏 콧대를 세우며 어깨에 잔뜩 힘을 주는데 과거에는 모시던 사부의 ‘가방모찌(鞄持)’였다는 말씀이 재미있어 기억에 남았다. 닷새간의 학회가 별 탈 없이 마무리됐다. 귀국 비행기에서 선생님과 함께 앞쪽 자리를 이용한 것은 불문가지였다.

‘가방모찌’는 일본말이다. 품격 있는 단어는 아닌데, 굳이 번역하자면 수행원이라고 할까. 원래 ‘오야붕’(두목)의 가방을 들고 경호하는 ‘꼬붕’(부하)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학문의 세계에서 두목, 부하라는 고상치 않은 의미 대신 특정 학파의 태두에게 사사하는 학문의 후계자라는 긍정적 의미로 농(弄) 삼아 쓰이곤 한다.

독일 학회 이후로 본의 아니게 멘토인 스승님의 ‘가방모찌’라는 별명이 붙었다. 국제학회에서 불초 ‘가방모찌’에게 먼저 아는 기색을 하며 다가오는 유명 외국 교수까지 생겼다. 공연히 우쭐하고 마음이 흐뭇했다.

세월이 좋아져 옆집 드나들듯 국제학회에 참석하는 세상이다. 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동거지도 예전과 달리 눈에 띄게 세련됐다. 이제는 아무리 직속 제자라도 스승 뒤를 무작정 쫓아다니는 촌스러운 풍경을 찾아볼 수 없다. 짧은 경험에 담력까지 부족해서 외국에 나가면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뻘쭘하던 과거와는 딴판이다. 넘치는 자신감에 개성 만점의 실력 있고 자유분방한 젊은 후배들은 모든 것을 알아서 척척 해결한다. 선생님이니까 무엇이든 복종해야 한다는 사고는 케케묵은 구습일 뿐이다.

예전같이 윗분을 깍듯이 대접하지 않는다고 투덜거리는 동년배의 고집불통 꼰대들이 아직도 없진 않다. 하지만 이제 제자들에게 섭섭하다는 감정보다 영어에 능통하고 지식도 풍부한 그들의 활달한 모습을 보며 마음 뿌듯하다. 밥 잘 먹고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듬직한 자식을 대견해하는 아버지의 심정이라고 할까.

요즘에는 국제학회에서 후학들에게 가르쳐주기보다 물어야 할 것이 더 많다. 오감이 무뎌져서 일 처리가 매끄럽지 못하고, 최신 정보에 둔감해 여러 가지 신식 기계와 새로운 제도에 서툴기 때문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 하지 않았나. 이제부터는 제자의 ‘가방모찌’로 살아갈까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