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산 스웨덴산 무쇠 주물팬이 아직도 부엌 한쪽에서 놀고 있다. 음식 만드는 유튜브에 잘 등장하는 팬인데 달걀 프라이도 이 팬 위에선 맛이 달라진다고 했다. 무쇠의 검정색이 풍기는 명품의 느낌, 고동색 너도밤나무 손잡이도 마음에 들었다.
문제는 너무나 비싼 가격이었다. 다행히 중고 매매 사이트에 자주 나오는 편이어서 싸게 나온 것을 틈틈이 찾다가 어느 날 덥석 사고 말았다. 몇 번 쓰지 않았고 관리할 자신이 없어서 판다는 사연이 딸려 있었다(그 말 뜻을 좀 더 깊이 헤아렸어야 했다).
무쇠로 된 냄비나 팬은 무겁기도 하지만 관리를 잘 해야 한다. 뜨겁게 달군 상태에서 기름칠을 잘 해서 길들여야 한다. 들기름이 좋다고도 하고 콩기름이 낫다고도 하며 돼지 비계가 최고라는 사람도 있다. 들기름으로도 해보고 콩기름도 발라보고 돼지비계로도 기름칠을 해봤으나 무쇠팬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유튜브를 보면 팬을 길들인 뒤 식용유 한 방울 없이 달걀 지단을 습자지처럼 얇게 부치던데 지단은커녕 프라이도 죄다 들러붙어서 코팅 프라이팬만도 못했다.
유튜버들은 한결같이 “무쇠팬은 막 써야 한다”며 녹슨 팬을 철수세미로 박박 닦아 다시 불 위에서 기름칠을 하고 마술처럼 달걀 지단을 부쳐냈다. 무쇠팬에 달걀 지단을 부치고야 말리라는 일념으로 주말마다 팬을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놓고 씨름을 했다. 기름칠 할 때마다 퍼렇게 올라오는 연기 때문에 창문을 활짝 열곤 했는데 창문 열기엔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도 팬은 길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몇 번 써보지도 못하고 관리할 자신이 없게 됐다.
아버지가 노년에 시간을 보내시던 시골집에 자주 놀러 가다가 어느 날 솥뚜껑을 사다 놓았다. 황학동 시장에는 가게마다 솥뚜껑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지름 40㎝나 될까 싶은 솥뚜껑이 8만원이나 했다. 요즘 캠핑용품으로 인기인 그리들은 3만원이면 살 수 있었지만 다 알루미늄이라고 했다. 솥뚜껑 사장님은 “무쇠는 기름을 먹고 알루미늄은 튕겨내서 음식 맛이 다른 것”이라고 했다. 아휴 너무 비싸서, 하고 몇 번 말했더니 2000원을 깎아줬다.
솥뚜껑을 장작불 위에 올려 구운 삼겹살은 완전히 맛이 달랐다. 정육점에서 얻어온 돼지 비계를 쓱쓱 발랐을 뿐인데도 그랬다. 한국 솥뚜껑이나 스웨덴 무쇠팬이나 똑같이 무쇠를 주물에 부어 만든 건데 왜 하나는 첫날 바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다른 놈은 기어코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걸까. 이번 주말엔 다시 창문을 열고 1년 내내 논 무쇠팬에게 기름칠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