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두아르 마네의 1881년 작 ‘봄’. / 폴 게티 미술관

“머리 세어 돌아와 소나무 잔뜩 심고, 드높이 자라 서릿바람에 휘날리는 모습 보고자 했지. 조물주 영역 밖으로 세월을 던져두니, 봄은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 가운데 있었네. 버드나무 늘어져 낮은 집은 어둑하고, 붉은 앵두는 익을 대로 익어 계단 위로 떨어지는데, 언제나 물러나서 서원직과 더불어 양양의 방덕공을 방문할 수 있을까(白首歸來種萬松, 待看千尺舞霜風, 年抛造物陶甄外, 春在先生杖屨中, 楊柳長齊低戶暗, 櫻桃爛熟滴階紅, 何時却與徐元直, 共訪襄陽龐德公).”

-소식(蘇軾) ‘기제조경순장춘오(寄題刁景純藏春塢)’

어김없이 올해도 봄은 왔고, 변함없이 진은영의 시를 읽는다. “봄, 놀라서 뒷걸음치다/ 맨발로 푸른 뱀의 머리를 밟다.” 푸른 계절의 머리를 밟고 서서, 고개 드는 봄꽃을 넋 놓고 바라보노라면, 옆에서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꼭 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에 불과하거든!” 누가 아니랬나. 짧은 생이 아쉬워 번식을 하고, 번식을 위해 애써 피었다 탄식하듯 지는 저 식물의 생식기들. 그 생식기의 깊은 그늘 아래, 봄의 속도를 묵상한다. 봄은 달콤한 것이라 빨리 지나간다. 계절 중 주말에 해당한다. 눈 한번 깜박이면 월요일이다.

이토록 시절이 빠르게 지나가면, 필멸자인 인간은 서두르게 마련이다. 이 꽃을 만지고 싶다. 저 꽃을 누리고 싶다. 이 꽃이 지기 전에 저 꽃의 무덤을 짓고 싶다. 세상 모든 꽃의 패총을 쌓고 싶다. 화려한 꽃의 업적을 기념하고 싶다. 그러나 숙취에서 간신히 깨어난 시인 김수영은 ‘봄밤’에서 우리를 지긋이 타이른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생이 이토록 빨리 지나가다니. 이럴 때 두려운 것은, 화산의 폭발이나 혜성의 충돌이나 뇌우의 기습이나 돌연한 정전이 아니다. 실로 두려운 것은, 그냥 하루가 가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시간이 흐르고, 서슴없이 날이 밝고, 그냥 바람이 부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김수영은 말한다. 예상치 못한 실연이나 죽음에 당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고 말한다.

봄이 가는 것이 아쉬운가. 세월이 가는 것이 그리 아쉬운가. 아쉬운 것은, 저 아름다운 것이 지나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내되 모든 것을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둘러 출세와 업적의 탑을 쌓는다. 그러나 아무리 크게 출세한 사람도 결국에는 물러나야 한다. 관직이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 보이던 북송(北宋) 시절, 관리를 역임했던 조경순(刁景純)도 결국 자리에서 물러나 장춘오(藏春塢)라는 이름의 집을 짓고 은거한다.

바로 그 장춘오를 생각하며, 문인 소식(蘇軾)은 ‘기제조경순장춘오(寄題刁景純藏春塢)’라는 시를 짓는다. 은퇴한 조경순은 자라날 후학을 기약하며 “소나무를 잔뜩 심는다”. 그 후학들이 자라나 어려운 시절에도 꿋꿋하기를 바라면서. “드높이 자라 서릿바람에 휘날리는 모습 보고자 했지”. 자신이 한때 누렸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화려한 봄을 장차 피어날 후학들을 통해 다시 보고자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조물주의 조화 밖으로 세월을 던져두니, 봄은 선생의 지팡이와 신발 가운데 있었네”. 조경순이 봄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경직된 마음을 버리고 유유하게 산책을 즐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조경순의 봄은 사라지지 않고 늘 “지팡이와 신발 가운데” 머무를 수 있었다.

조선 지식인 기대승(奇大升)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봄은 조화의 자취다. 조화는 마음이 없다. 모든 것을 만물에 맡기고 사사로이 개입하지 않는다. 봄조차 간직할 수 없는데, 하물며 드높고 풍요로운 업적, 명예, 부귀, 재물, 곡식, 비단처럼, 쉽게 없어지는데도 사람들이 다투는 대상이야 어떻겠는가(夫春, 造化迹也. 造化無心. 付與萬物而不爲私焉, 然猶不可得而藏也, 況乎功名富貴之隆, 珠金穀帛之饒, 物之所易壞, 而人之所可爭者乎. –'장춘정기(藏春亭記') 기대승이 보기에, 세속적인 부귀영화는 물론 봄조차도 인간은 간직할 수 없다. 그런가. 인간이 간직할 것은 정녕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에게는 한시도 사라지지 않은 선한 마음이 있다고 기대승은 믿는다. 인간에게는 약자를 보고 측은해하는 마음(惻隱之心), 잘못한 것을 두고 부끄러워하는 마음(羞惡之心), 욕심내지 않고 양보하는 마음(辭讓之心),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판별하는 마음(是非之心)이 있다고 믿는다. 그 마음을 버려두고, 세상의 허영을 좇는 것은 영원한 것을 버려두고 사라질 것을 좇는 일과 다름없다. 떠나는 봄이 아쉬운가. 자신의 선한 마음을 “돌이켜 본다면, 간직할 수 없는 봄이 애당초 내게 없었던 적이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而反求之, 則春之不可藏者, 固未始不在於我矣).”

그래서 올해도 떠나는 봄 아쉬워하기를 그치고, 메리 올리버(Mary Oliver)의 시를 읽는다. “이른 봄/ 밤새 떠나지 않는/ 헐떡이면서도 얄팍한 불안 속에서” “나무들의 침묵에 대고 발톱을 날카롭게 가는 곰”을 생각한다. 메리 올리버는 말한다. 그 검은 곰을 생각하다 보면, 남는 질문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There is only one question: how to love this world).”

이 광활한 우주는 마음이 없다. 조물주는 모든 것을 만물에 맡길 뿐, 사사로이 간섭하지 않는다. 이 무심한 세상에서 반성하는 마음을 가진 희귀한 존재로서 인간은 불가피하게 묻는다. 나무의 침묵에 대고 발톱을 날카롭게 가다듬은 뒤, 어려운 일을 묵묵히 하러 갈 칠흑처럼 검은 곰을 생각하며 묻는다.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할 것인가. 세상에는 악이 버섯처럼 창궐하고, 마음에는 번민이 해일처럼 넘치고, 모든 것은 늦봄처럼 사라지는데,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