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주말> 배우 문성호 - 영상미디어 이신영 기자 (아무튼주말 게재 전 사용금지)

‘결사곡 월드’의 왕자님이자, 임성한 작가의 다크호스. TV조선 주말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에서 서반 역을 연기한 배우 문성호(50)는 요즘 이렇게 불린다. 극 중 그가 연기한 서반은 주인공인 사피영(박주미), 이시은(전수경), 부혜령(이가령)과 함께 라디오국에서 근무하는 직장 동료. 시즌1만 해도 포스터에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존재감이 미미했지만, 시즌2에선 세 여성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급부상, 시즌3에선 단박에 중년 멜로의 주인공이 된다. 불륜과 배신이 난무하는 ‘결사곡’에서 유일무이하게 순애보를 보여주는 캐릭터기도 하다.

베일에 싸여 미스터리한 인물로 묘사됐던 서반처럼 배우 문성호에 대해서도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단 두 작품만이 적혀 있다. 2015년 조연으로 출연한 SBS 드라마 ‘가면’과 2021년 시작한 ‘결사곡’ 시즌1·2·3. 오랜 시간 연극판과 드라마를 기웃거렸지만, 기회가 쉽게 오지 않았다. 그는 “내 길이 아닌가 싶어 다 내려놓았을 무렵 임성한 작가님을 만났다. 경력도 없고 나이도 많은 내게 이런 큰 역을 맡겨주셔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지난 22일 서울 광화문에서 결사곡 시즌3 마지막 촬영을 막 끝낸 문성호를 만났다. 키 184cm에 흐트러짐 없는 슈트핏, 가지런히 빗어 올린 머리. 그를 처음 본 임 작가가 “서반이 걸어들어오더라”고 했다는 말이 실감 났다. 단 하나, 서반과 다른 점이 있었다. 현실 속 문성호는 자주 웃었다. 아주 환하게!

배우 문성호는 “2년간 무감정한 서반으로 사느라 웃음을 잃어버렸다”며 “요즘은 웃는 게 어색하다”고 했다. 자전거로 제주에서 서울까지 국토 종단을 할 만큼 평소 자전거 타는 게 취미. 당분간은 휴식 시간을 가지며 이 취미 생활을 만끽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무심정, 무감정, 무뚝뚝

–요즘 ‘서반’ 때문에 설렌다는 여성들이 많다.

“얼마 전 만둣국 집에 갔더니 주방 아주머니가 일하시다 말고 뛰어 나오시더라. 식당이든 어디든 계속 사람들이 쳐다보니, ‘사람들이 날 아는구나’ 싶어 신기하고, 감사하다.”

–시즌 초반엔 ‘AI 로봇’ 아니냐는 엉뚱한 예측이 나올 만큼, 무감정 연기가 화제였다.

“사람들이 ‘서반이 좀 웃었으면 좋겠다’고 할 때마다 대본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 대사의 지문엔 항상 ‘무심정’ ‘무감정’ ‘무뚝뚝’ 이런 말이 쓰여 있었다. 나중에는 아예 ‘뚝함’이라고 적혀 있더라. 처음엔 연기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무뚝뚝하고 눈도 마주치지 않는데 그렇다고 화난 건 아니야. 짜증도 아니야. 웃는 것 때문에 재촬영도 진짜 많이 했다. ‘식사하셨어요?’ 하고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물어볼 수 있지 않나. 그런데 안 된다며 몇 번을 다시 찍었다. 시청자들이 그런 서반 캐릭터를 이렇게 좋아해 주실 줄이야. 시간이 지나니 임 작가님이 왜 그렇게 ‘뚝함’을 강조하셨는지 알겠더라.”

–시즌3에서 멜로의 주인공이 될 거라 예상했나.

“느낌은 있었다. 나처럼 알려지지 않은 배우는 오디션을 많이 보니까, 대본도 많이 본다. 이제는 대본만 봐도 어떤 인물인지 어느 정도 파악이 된다. 그런데 서반은 분명히 뭔가 있을 것 같더라. 극 중 3명이 바람 피우고 이혼하는 건데, 그다음엔 누구겠나. (김)응수 형님이 대본 파악을 정말 잘하시는데, 시즌1 때부터 그러시더라. ‘서반은 분명히 뭔가 있다. 준비해라.’”

–극 중 누구랑 연결될 거라고 생각했나.

“시즌3 대본 보기 전에는 100% 사피영과 될 거라고 생각했다. 피영이와 공연도 같이 보는 등 붙어 있는 장면이 많았다. 시은이는 전혀 생각 못했다. 그런데 라디오국에서 내가 시은이 문 열어 주는 장면이 있는데, 나도 모르게 시은이를 그윽하게 쳐다봤더라. 나는 모르고 했는데, 나중에 서반 대사 중에 그 장면이 나온다. ‘그때 문 열어줄 때, 내 눈빛 봤어?’ 하고.”

결사곡 시즌3에서 중년 멜로의 주인공으로 거듭난 이시은과 서반. /TV조선

–이시은을 연기한 전수경 배우와의 호흡은 어땠나.

“실제로는 여섯 살 많은 선배인데, 너무 잘 이끌어주셨다. 시즌 1·2를 이미 같이 해왔기 때문에 서로 잘 알기도 하고, 현장에서 연습도 많이 했다. 임 작가님한테 혼날 각오로 즉석에서 애드리브로 몇 장면 만들기도 했다. 서반이 쇼핑백을 손에 든 채로 시은이를 안는 장면이 있다. 아무래도 이걸 들고 안으려니 어색한 거다. 그래서 쇼핑백을 바닥에 떨어뜨린 뒤 시은이를 안았는데, 그 장면이 안 잘리고 방영됐더라.”

–그 장면을 시즌3 명장면으로 꼽는 시청자들이 많았다.

“나는 오히려 한진희 선생님께서 아버지로 처음 등장했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극 중 서반이 20년 만에 아버지와 처음 만나는 설정인데,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한진희 같은 대선배님과 일대일로 붙는 신(scene)이 없었다. 그래서 긴장했는데, 찍고 나서 보니 정말 좋더라. 선생님 아우라가 역시 대단했다.”

–그때 서로 주고받은 대사가 A4 용지로 8장 분량이라던데.

“촬영 전 한진희 선생님 대기실로 찾아가 ‘한 번에 가실(촬영할) 거냐’고 물었다.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시니, 중간에 끊어 가자고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한 번에 가야지’ 하시는 거다. ‘선생님 좀 쉬고 계세요’ 한 뒤 얼른 대기실로 달려갔다. 당연히 끊어서 촬영하실 줄 알고 내가 대사를 덜 외운 상태였다. 하하!”

–임성한 작품은 대사가 많기로 유명하다. 어떻게 연습했나.

“이번에 촬영하면서 나는 대사를 귀로 외운다는 걸 알았다. 매니저가 읽어주는 대사를 귀로 외고, 그걸 카메라로 찍어서 다시 모니터했다. 그렇게 표정을 만들고, 눈빛도 만들었다. 아이들을 보는 눈과 아버지를 보는 눈, 시은이를 보는 눈. 서반은 그게 다 달랐다. 나는 연기 잘하는 사람도, 카메라 앞에 많이 서본 사람도 아니다. 그래서 무식하게 연습하는 것밖에 없었다. 기교가 없는 대신 진정성 있게 하려고 했다.”

–가장 힘들게 촬영한 장면은?

“명장면이라고 꼽힌 시은이를 아파트 앞에서 안는 장면. 한겨울 새벽 경기도 파주의 한 아파트에서 촬영했는데, 너무 추웠다. 온몸에 감각이 없어지고 입이 다 얼어서, 난로를 입에 갖다 대고 촬영했다. 그런데 추워서 힘들게 찍었던 장면들이 다 명장면이 됐더라. 처음 ‘시은아’라고 부르던 장면도, 촬영할 땐 너무 추웠는데 많이들 좋아해 주셨다.”

–그 장면이 서반 멜로의 시작이었다.

“찍을 때부터 너무 중요한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대본만 보는데도 ‘심쿵’하더라. 대본 보고 특히 톤 연습을 많이 했다. 그런데 막상 촬영 때는 너무 추워 입이 얼어붙으니, ‘시은아’라고 불러야 하는데 ‘띠은아’로 나오는 거다(웃음). 몇 번 재촬영 끝에 그 장면이 완성됐다.”

–극 중에서 우람이와 향기의 새 아빠가 됐다. 아직 싱글인 걸로 아는데, 아버지 연기는 어땠나.

“내가 아이도 없고, 조카도 없다 보니 실은 아이들과 하는 연기가 좀 힘들었다. 우람이가 ‘아빠’ 이러면서 오는 데 ‘아빠’란 단어 자체가 너무 어색했다. 우람이에게 대기실에선 ‘형’이라고 부르라고 했더니 ‘형님’이라고 했다가, 요즘엔 ‘삼촌’이라고 부른다.”

–서반을 연기하며 특히 신경 쓴 점이 있나.

“서반의 무게를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서반을 연기할 때 모티프로 삼은 배우가 있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에 나오는 양조위. 체구는 작지만 그만의 무게가 있다. 양조위가 장만옥을 보는 눈빛, 무게. 그걸 따라 하려고 많이 노력했다. 원래도 좋아하는 영화이지만, 시즌3을 준비하며 100번 정도 본 것 같다. 이렇게 공부했으면 서울대 갔을 거다. 하하!”

◇임성한이 딱 10분 보고 낙점한 남자

–배우 생활은 늦게 시작한 건가.

“어릴 때부터 연극한다고 돌아다니긴 했는데, 배우가 하고 싶다고 다 되는 게 아니더라. ‘가면’이란 드라마를 했지만, 대부분 오디션에선 잘 안 됐다. 나이도 있으니 거의 포기를 한 상태였는데 임성한 작가님을 만나게 됐다.”

–오디션을 본 건가.

“한혜숙 선생님과 평소 알고 지내는데, 갑자기 전화로 ‘잠깐 양복 입고 나와봐’ 하시는 거다. 임성한 작가님과 같이 있다며. 오디션이겠다 싶어 달려나갔는데 딱 10분 얘기 나눠보시더니 약속이 있다며 먼저 일어나셨다. 그날 10분 외에는 지금까지 촬영하며 작가님을 뵌 적이 없다.”

–10분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기에.

“지금까지 왜 연기를 안 했느냐고 물으시더라. ‘연기를 못 해서요’라고 솔직히 답했다. ‘연기는 배우면 된다’고 하시기에, ‘가르쳐 주세요’ 했다. 나중에 한혜숙 선생님께 들으니 임 작가님이 ‘서반이 걸어오더라’고 하더란다. 촬영 들어가고 나서는 작가님이 ‘문성호의 웃음만 빼라. 그러면 서반이다’라고 했다는 얘기를 감독님을 통해 전해 들었다.”

–극 중 서반은 임성한의 판타지가 모두 반영된 캐릭터라고들 한다.

“서반은 이제까지 대한민국에 없던 캐릭터였다. 배우라면 너무나 하고 싶은 역할이자, 남자 연기자라면 평생 이런 캐릭터 한번 연기하는 게 꿈일 수 있다. 그런데 연기 경력도 얼마 안 되는 내가 맡게 된 거다. 너무 감사하다.”

–SF전자 장남이라는 서반 캐릭터를 위해 양복부터 시계까지 직접 스타일링했다고 들었다.

“작가님이 서반에 대해 주문한 게 딱 두 가지였다.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점과, 머리를 올백으로 넘기라는 것. 시즌3까지 촬영하면서 남의 옷 입은 적이 없다. 유명한 배우가 아니니 협찬받기 어렵기도 하고, 이렇게 좋은 캐릭터라면 배우가 투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옷은 제냐·디올 등 명품 브랜드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맞춰 입었고, 구두와 소품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극 중 대사로도 나오는 롤렉스 시계도 내 소장품이다. 적극 지원해주신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기사에 써달라. 하하!”

–실제 문성호도 SF 전자 장남인 서반만큼 부유한가.

“훌륭하신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외아들이어서 부유하게 큰 건 맞는다. 그게 내가 연기를 못 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웃음). 나는 연기에 절박하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이 보기엔 아닐 수 있겠다 싶더라. 어릴 땐 그걸 몰랐다.”

–부모님이 좋아하시겠다.

“어머니가 서반이란 역할을 사랑하신다. 초반에는 내가 잘 안 웃으니 속상해하시고, 대사도 별로 없으니 ‘하품 배우냐’고도 하시더라. 하품하면 사라진다고. 하하! 요즘엔 너무 행복해 하신다. 처음으로 효도하는 것 같다. 학창 시절엔 내가 싸움도 하고, 반항도 좀 했다.”

문성호는 "서반과 문성호는 닮은 듯 다르다"며 "장난치며 얘기하면 문성호지만, 혼자 멍하게 있을 땐 서반같은 모습이 나온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반과 문성호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대본을 보면 ‘작가님이 날 아시나?’ 싶을 정도로 서반과 비슷한 점이 많다. 어릴 때 제일 싫은 게 명절이었다. 갈 곳도 없고, 친구들도 없고. 그런 외로움이 서반한테 가끔 나오는데, 그건 나만 알 수 있다. 그 외로움이 문성호한테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서반이 사랑에 있어 순애보라면, 문성호는 나쁜 남자 쪽이다. 하하!”

–임성한 드라마를 흔히 ‘막장’이라고 하는데 배우 입장에선 부담스럽지 않을까.

“임 작가님 작품은 너무나 현실적인 얘기들이다. 내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 시청자는 드라마만 보지만 배우는 대본을 본다. 대사도 읽고, 감정도 알아야 하니 10번을 넘게 보는데 임 작가님 대본은 볼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디테일하게 쓰실까’ 놀란다. 어마어마하게 섬세한, 그 한 끗 차이가 임성한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주 시즌3가 막을 내린다. 서반이 죽을까 많은 시청자들이 걱정한다.

“마지막 2회에 정말 휘몰아친다. 서반의 눈물도 볼 수 있다. 작가님의 큰 그림이 있으니 기대하고 꼭 끝까지 봐달라.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