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물질하러 나간 해녀들이 제주 방언으로 대화하는 장면. 화면을 가로질러 자막이 크게 떠 있다. /넷플릭스 화면

“혼저혼저(빨리빨리) 오라게(와야지)!”

“무사(왜) 맨날 늦엄시니(늦니)?”

외국어도 아닌데 화면에 자막이 깔린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1년 차 해녀 영옥(한지민)이 물질에 늦게 나타나자, 나이 지긋한 베테랑 해녀들이 호통치는 장면이다. 영옥이 대선배 해녀들을 ‘삼춘’이라고 부르는 장면에선 단어 설명까지 자막에 뜬다. ‘삼춘(삼촌): 남녀 구별 없이 어르신을 친근하게 부르는 호칭’.

애플TV+ 8부작 드라마 ‘파친코’에도 차진 제주 방언이 나온다. 제주 출신 고한수(이민호)가 아버지(정웅인)와 대화하는 장면. 주판알을 튕기던 아버지가 일어서며 말한다. “글라 배고프다! 오늘은 배 뽕끄랑허게 먹어보게!(가자 배고프다! 오늘은 배 터지도록 먹어보자!)”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억척스러운 생선가게 사장 은희(이정은)가 값을 계속 깎으려는 손님을 향해 버럭 하는 장면. /넷플릭스 화면

◇제주 방언, OTT 타고 전 세계로

제주 방언이 드라마를 장악했다. 노희경 작가가 4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자, 이병헌·신민아·차승원·이정은·한지민·김우빈·김혜자·고두심 등 어벤저스급 배우들이 총출동해 화제를 모은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또 다른 주인공은 ‘언어’다. 제주 바다를 배경으로 다양한 인물의 사연이 옴니버스로 펼쳐지는 가운데, 등장인물들이 제주 방언을 쏟아낸다. 고추·감자·깨 농사를 지어 오일장에 내다 파는 할망 옥동(김혜자)은 좌판 앞에서 “왕 봥 갑서(와서 보고 가세요)”라고 권하고, 억척스러운 생선 가게 사장 은희(이정은)는 값을 계속 깎으려는 손님을 향해 “나 안 팔아마씸(저 안 팔아요). 몬딱(전부) 살 거 아니면예 삼춘이 바다 나가 직접 낚시해 잡아 드십서게!”라고 외친다.

정덕현 문화 평론가는 “각자의 삶에 지친 중년들이 서로 투닥거리다가 위로하면서 버텨내는 이야기가 거칠고 투박하지만 사람 냄새 진하게 풍기는 제주 방언과 어우러져 더 공감대를 일으키는 것 같다”며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어 제주어를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에서 제주 출신 고한수(이민호·오른쪽)가 아버지(정웅인)와 다투는 장면이다. 한국어 자막을 선택하면 “경 부탁허는디 게민 어떵허나?”(그렇게 부탁하는데 그럼 어떡하냐?)” “안된댄 해사주마씨(안된다고 해야죠)"라는 자막이 뜬다. /애플TV+

‘파친코’ 속 제주 방언도 화제다. 지난 22일 공개된 7화는 제주 출신 고한수의 과거 이야기가 펼쳐졌다. 7화 초반부, 1923년 일본 요코하마에 정착한 한수는 일본인들의 차별을 겪으면서도 아버지와 단둘이 희망을 꿈꾸며 살아간다. 부자의 대화는 생생한 제주 방언으로 채워졌다. “사람은 혼가지만 졸바로 허민 된댄 허난(사람은 한가지만 제대로 하면 된다)” “게민 난 뭘 잘허민 되는디 마씨?(그럼 난 뭘 잘하면 되는데요?)” “그게 무신 느 모심냥 정해지는 줄 알암시냐(그게 뭐 네 마음처럼 정해지는 줄 아느냐?)”

‘파친코’ 제작진은 제주 방언 대사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대본 작업부터 공을 들였다. 제주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는 변종수씨가 대본 작업에 참여했고, 캐나다 촬영 현장까지 동행해 배우들의 제주말 연기를 지도했다. 변씨는 “한수는 한국어는 물론 일본어, 영어, 제주 방언까지 섭렵한 인물이라 이민호씨의 부담이 컸다. 이민호씨가 처음에는 제주 방언이 낯설고 억양도 쉽지 않아 두려워하다가 촬영하면서 조금씩 자신감이 붙었다”며 “두 배우 다 무난하게 방언 연기를 잘했다”고 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1년 차 해녀 영옥(한지민)이 늦게 나타나자, 나이 지긋한 베테랑 해녀들이 호통치는 장면이다. /넷플릭스 화면

◇“우리말인데 자막 없으면 이해 못 해”

소셜미디어에선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두 작품 다 분명 우리말인데 자막 없으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미국 드라마 보듯 흥미롭다”는 ‘육지인’ 반응부터 “제주 사람 특유의 무뚝뚝한 말투, 억척스러운 모습까지 잘 살렸다”는 제주 토박이들의 호평도 올라왔다. 제주 애월 출신인 변명수(62)씨는 “드라마 주인공들이 고향 말로 연기하는 걸 보니 반갑고 뿌듯했다”면서도 “억지로 만든 것 같은 문장이나 어색한 표현 등이 걸렸다”고 했다. 예를 들어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젊은 선장 정준(김우빈)이 “내가 영옥 누나 사귀면 아시(동생) 넌 어떨 거 같아?”라고 말하는 장면. 문장 전체가 어미까지 표준어인데 특정 단어 하나만 방언을 쓰는 건 어색하다는 것이다.

배우들도 낯선 제주 방언을 자연스럽게 소화하기 위해 분투했다는 후문이다. 이정은은 제작 발표회에서 “촬영 시작 전 대본을 미리 받아서 제주도를 유람하며 시장에서 사투리를 익혔다”고 했다. 상대 역 차승원은 “이정은씨는 촬영을 안 하는 일상생활에서도 제주도 방언을 썼다. 그 인물과 동일시되려고 무던하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대단한 배우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파친코’ 7화의 고한수 과거 이야기는 이민진 작가의 원작 소설에는 없는 내용이다. 변종수씨는 “제작진이 사라져 가는 제주어 보존 의지를 담아서 제주 방언을 일부러 넣은 것”이라며 “각본 및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한 수 휴(Soo Hugh)가 촬영 현장에서 내게 제주어에 대한 애착을 여러 번 말했을 정도다. 한국 드라마도 아니고 미국 드라마에서 방언까지 고증해서 보여줬다는 게 고맙고 대단한 일”이라고 했다.

애플TV+ 드라마 '파친코'에서 제주 출신 고한수(이민호)의 아버지로 등장하는 정웅인. /애플TV+

◇소멸 위기… “제주어를 지켜라”

제주 방언은 다른 지역 사람들이 들었을 때 의사소통이 쉽지 않을 정도로 고유한 특성을 가졌다. 강영봉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섬이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인해 고대, 중세 국어의 원형이 남아있고, 독자적으로 풍부하게 발달하면서 갖게 된 특징”이라고 했다. 하지만 표준 한국어 교육이 이뤄지면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제주 방언 사용은 급격히 줄고 있다. 유네스코는 2010년 12월 제주어를 소멸 위기 5단계 중 4단계인 ‘아주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언어’로 분류했다.

제주에선 사라져가는 방언을 지키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진행 중이다. 제주도는 올해 제4차 제주어 발전 기본 계획(2023~2027년)을 수립하고 소멸 위기의 제주어 사용을 확산하기 위한 각종 사업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내년엔 국립국어원과 제주어 디지털 전시관 구축을 추진한다.

외국어 학원처럼 제주어를 배울 수 있는 강좌도 많다. 제주도민이나 외지에서 이주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수업을 하고, 현장을 답사하며 방언을 익히는 프로그램도 있다. 사단법인 제주어연구소는 제주 음식, 의복, 가옥, 농사일, 굿, 문학 등을 통해 제주어를 배우는 강좌를 6년째 열고 있다. 김보향 제주어연구소 이사는 “제주어에는 제주인의 삶과 문화가 고스란히 녹아 있고, 언어가 사라지는 건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라며 “드라마의 인기가 제주어와 제주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