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이었다. 나와 아내는 2주간의 한국 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인천공항에서 뉴욕행 비행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가 화장실에 갔다 오겠다며, 앉아 있을 곳이 없으니 잠깐 서서 기다리라고 했다. 여자 화장실과는 거리가 좀 있는 곳에서 나는 아내를 기다렸다. 한 젊은 여자 분이 나에게 탑승권을 보여 달라며 말을 걸었다. 아내에게 그런 것들을 다 맡기곤 해서 내겐 탑승권이 없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는 내가 서 있는 곳이 비즈니스 클래스 승객이 대기하는 곳이라며 비즈니스 탑승권이 없다면 나가달라는 말을 했다. 흰지팡이도 없는 시각장애인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는 요청에 나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공교롭게도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서 장애인의 날(4월 20일)을 보냈다. 오래전 나를 가르쳐주신 서울맹학교의 은사님들과 점심 식사를 했다. 또 이틀 후에는 초등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창들과 함께 식사도 했다. 마치 어린 시절 고향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들은 영웅이었다. 장애인들이 살기에 어려움이 많은 사회에서 누구보다 꿋꿋하게 살아왔으니 말이다.

일러스트=안병현

장애인의 날에 만난 박찬승 선생님은 내게 점자를 가르쳐주신 분이다. 유일하게 점자를 아는 정안(正眼)자 선생님이었다. 그런데 박 선생님은 점자보다 더 소중한 것을 가르쳐주셨다. 내가 6학년 때 선생님은 방과 후에 우리를 잡아놓고, 점자를 더 빨리 읽는 훈련을 시켰다. 왼손 검지로만 점자를 읽는 버릇을 버리고 두 손 다, 더 많은 손가락을 이용해서 점자를 읽으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정안자들이 글을 읽는 속도와 비슷하게 점자를 읽을 수 있어야 그들과 경쟁하며 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점자를 빨리 읽는 것 외에 내가 곧 일반 사회에서 정안자들과 경쟁해야 할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에는 마음의 준비와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을 배웠다.

같은 날 또 다른 선생님도 만났다. 손순화 선생님은 4학년 담임 선생님이었는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이다. 한때 한빛맹학교 교장을 맡으셨던 남편 조재훈 선생님의 아내이기도 하다. 장애인에 관한 편견이 훨씬 더 심하고 노골적이었던 그때, 대학 가기도 어려웠던 그때, 두 분 다 공부로 교사가 됐고, 아들 딸 낳아 떳떳하게 살았다. 장애가 결코 불행을 가져다주는 운명이 아니라는 사실을 몸소 보여준 분들이다. 더구나 조 선생님은 훌륭한 침술로 아픈 이들을 치료하고 글을 쓰셔서 책까지 낸 작가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김태용 선생님은 나의 은인이다. 소질도 없는 내게 거의 6년 동안 피아노를 가르쳐주셨고, 미국 유학이라는 기회까지 준 분이다. 그런데 그날 뵌 분 중에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준 건 김태용 선생님과 함께 나오신 최정희 사모님이다. 나는 사모님을 아홉 살 때였던 1976년 10월 11일, 내가 첫 피아노 레슨을 받는 날 처음 뵈었다. 갓난 딸이 있었고, 위로는 아들도 있는 선생님 댁에서 나는 피아노를 처음 쳤고, 점자 악보를 배웠다. 이들은 부모님 외에 내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자주 지켜본 부부였다. 어쩌면 나의 현재 부부 생활의 지침이 된 분들일 것이다.

‘배필’이란 단어가 21세기에 적절할지는 모르겠다.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해진 선생님을 모시고 식당까지 걸어온 사모님을 보며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내 어머니가 먹을 것을 사들고 가면, 항상 선생님께 먼저 드리던 사모님의 모습. 밥 먹고 가라며 선생님의 제자들을 따스하게 대해주셨던 사모님. 과외를 못 하게 하는 정부 정책 때문에 피아노 레슨을 마지막으로 했던 날, 푸짐하게 차려주셨던 저녁 밥상의 기억에, 40여 년이 넘은 지금 두 분의 다정한 모습이 겹치면서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배필이란 서로의 부족함을 감싸며 위해주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한국은 아직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분리된 생활을 하는 것 같다. 사실 한국 시각장애인들은 부러울 만큼 많은 서비스를 받고 있다. 일상생활을 도와주는 활동 지원 서비스, 직장 일에 도움을 주는 근로 지원 서비스, 안내견이나 복지콜, 바우처 콜택시 등을 포함한 이동 지원 서비스로 삶은 옛날보다 훨씬 더 쉬워졌다. 그런데 직업의 선택은 아직도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일반 학교에 시각장애인 교사들이 생기기 시작했고, 동 주민센터에서 일하는 공무원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영리기업에 고용되는 시각장애인은 아주 드물다. 스크린 리더 같은 기기로 시각장애인도 충분히 사무직을 할 수 있는 세상이 왔음에도, 이 장벽을 넘은 고용주나 장애인들은 아직 드문 모양이다. 안타깝다.

사회 곳곳 숨은 영웅이 많다. 드러나지 않을 뿐. 장애인 제자들을 가르치고 훈련해서 세상으로 내보낸 선생님들, 제한된 직업으로 어렵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친구들, 50년 가까이 존경과 사랑으로 시각장애인 남편과 함께 하고 계신 배우자 등. 어쩌면 내게 다른 공간에 가서 기다리라고 했던 항공사 직원 역시 장애인의 날의 영웅일 수 있겠다. 짧은 거리도 혼자 이동할 수 없는 장애인으로 보지는 않았으니까. 서로를 완전한 인격체로 여기고 존중해주는 미래를 꿈꾸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