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수 대신 보리차를 끓여 마시기로 했다. 차갑게 식힌 보리차의 구수한 향이 수돗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수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어쩌면 입맛이 어른스러워지거나 단순히 나이 든다는 징조인지도 모른다. 중국음식점에 가도 맹물보다 차를 주는 집이 반가운 것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보리차와 옥수수차를 반씩 섞어 티백에 넣고 우려내면 그윽한 곡물 향이 집안에 퍼진다. 하룻밤 식혔다가 냉장고에 넣어두고 마시면 무색무취한 생수를 마실 때와는 달리 뭔가 다른 것을 마신다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생수라는 것이 없던 시절의 향수가 그리운 것일 수도 있다.
마트에 갔다가 헛개나무를 한 봉지 사왔다. 헛개나무를 차로 달여 마시면 숙취 해소에도 좋고 뼈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예전엔 그런 말들을 믿거나 말거나 민간요법이라며 흘려들었지만 어쩐지 그런 기능의 건강보조식품보다 차를 마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술을 좀 줄이라며 헛개나무를 사다 주신 적이 있다. 그때는 헛개나무차에서 나무 비린내가 나는 것 같아 마시기 싫었는데, 내 스스로 사다가 끓여 마셔보니 전혀 비리지 않고 둥굴레차처럼 구수했다. 다만 헛개나무차 같은 약차(藥茶)는 물처럼 마시면 안 되고 하루 2~3잔만 마시는 게 좋다고 한다.
저녁에 입이 심심하면 도라지차를 끓여 마신다. 지리산에서 캔 자연산 도라지를 말렸다는데, 아주 조금만 넣고 우려내도 진하고 향긋하다. 도라지차는 기관지와 성대에 좋아 가수들이 즐겨 마시는 차이기도 하다.
차를 끓여 마시면 시간이 천천히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차를 준비하고 물을 끓이고 차가 우러나는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 소주잔보다 조금 큰 찻잔에 조금씩 따라 마시면 시간이 찻잔 단위로 흘러가는 것 같다.
멸치 육수를 내는 것도 비슷한 과정이다. 큰 냄비에 멸치와 밴댕이를 섞어 넣고 다시마와 무, 파뿌리를 함께 끓인다. 느긋한 주말 저녁에 한 솥 끓여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국이나 찌개 끓일 때 아주 요긴하다. 콩나물을 넣으면 콩나물국, 시금치를 넣으면 시금치국이다.
요즘엔 육수 재료들을 말려 가루로 빻은 뒤 알약처럼 만든 제품이 있어서 그냥 물에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된다는데, 제법 진한 육수를 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심야 라디오 재즈 프로그램을 들으며 멸치와 파뿌리를 손질하고 약불에 육수를 뭉근하게 우려내는 즐거움이 아직은 더 좋다. 그것이 생수 대신 차를 마시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