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범이었다. 실수라고 했고, 잘못했다고 반성도 했다.”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심판’의 한 장면. 과거 판결이 부당했다고 따지는 심은석 판사(김혜수)에게 부장판사 나근희(이정은)는 “다른 판사 누구라도 그렇게 판결했을 것”이라며 “내 처분엔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 항변한다. 피의자의 ‘반성’이 판결을 결정하는 잣대 중 하나였다는 것.
드라마 속 판결만이 아니다. 지난해 12월 대낮 도심 대형 마트에서 처음 본 10대 여학생을 화장실로 끌고 가 성폭행한 20대가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재판부는 죄가 매우 무겁다면서도 ‘피고인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반성문을 75차례 썼다고 전해졌다. ‘16개월 여아 정인이 학대 사망’ 사건의 피의자인 양모(養母) 장모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지만 2심에서 징역 35년으로 감형됐다. 2심 재판부가 밝힌 감형 이유 중 하나가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자책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것. 장씨는 재판부에 반성문을 32차례 제출했다고 한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은 재판 과정에서 43차례 반성문을 제출했고 결국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반성문 냈다고 감형이라니?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대법원 양형 기준에 법관이 형을 감경할 수 있는 요인으로 ‘진지한 반성’이라는 문구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실제 판결문에는 “다만 피고인이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라는 표현이 단골로 등장한다. 특히 성범죄 사건에 ‘반성 감형’이 많다. 대법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6~2019년 신고된 성범죄 사건 중 양형 기준 적용으로 집행유예가 나온 사례의 63.8%가 ‘진지한 반성’을 적용했다. 성매매 알선 등 혐의로 재판받고 있는 빅뱅 출신 가수 승리도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혐의를 인정하고 반성한다는 이유로 2심에서 형량이 절반으로 줄었다.
문제는 ‘진지한 반성’이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이라는 것. 서혜진 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반성이라는 내면적 감정의 작용을 판사가 판단할 근거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반성문을 냈느냐 안 냈느냐, 몇 차례 냈느냐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며 “반성문 제출이 재판 과정에서 하나의 절차이자 요식행위가 돼버렸다”고 비판했다.
‘무늬만 반성’ 꼼수가 매번 통하는 건 아니다. 지난 1월 미성년자 성매매를 미끼로 남성들을 숙박업소로 불러들인 뒤 협박하고 금품을 빼앗으려 한 10대들에게 법원이 징역형을 선고했다. 이들은 100여 차례 반성문을 제출하고 법정에서 눈물 흘리며 선처를 구했지만, 돌아가는 호송차 안에서 교도관에게 욕설을 퍼붓고 “판사 앞에서 불쌍한 척하면 봐주던데”라며 낄낄거렸다. 재판부는 선고 공판에서 “초범이고 소년범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은데 천만의 말씀”이라며 주범에게 징역 장기 4년에 단기 3년, 또다른 주범에게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누구를 향한 반성인가
법정 반성문 대필(代筆) 시장도 성행하고 있다. 사건 내용의 골자만 적어 보내면 대필 작가가 ‘수려한 문장’으로 반성문을 작성해주는 방식. ‘음주운전’ ‘성폭행’ ‘지하철 성추행’ 등 시나리오도 다양하다. 가격은 대략 건당 5만원. 업체들은 “반성문은 판사님께 자신이 반성하는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일 수 있는 핵심 자료”라며 “법률 전문가 버전, 문예창작과 출신 버전이 있다”고 홍보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법정 반성문의 진짜 문제는 반성의 대상이 피해자가 아니라 법원을 향해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N번방 사건의 주범인 조주빈은 지난 2020년 5월부터 10월까지 반성문 112장을 재판부에 제출했지만, 피해자에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없었다. 박미랑 한남대 경찰학과 교수는 “피고인들은 수십 차례 반성문을 쓰면서도 정작 피해자에게는 사과 한마디 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도 ‘진지한 반성’을 했다고 감형받는 걸 피해자가 어떻게 용납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대필업체에서 내놓는 반성문은 대개 ‘존경하는 판사님께’로 시작해서 ‘먼저 판사님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습니다’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박미랑 교수는 “반성은 피해자에게 해야 하는데 반성의 대상이 엉뚱하게 변질돼 있다”며 “반성으로 인해 피해자의 용서를 받지도 않은 상황에서 법관이 형량을 감해주거나 집행유예의 판단 기준으로 고려하는 것은 그야말로 피해자에 대한 사법부의 월권 행사”라고 했다.
국회에선 ‘반성문 감형 꼼수 근절법’이 발의됐다. 법관이 양형을 참작할 때까지 피해자 의견 진술을 듣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법안이다. 서혜진 변호사는 “더 이상 미루지 말고 대법원 양형 기준에서 ‘진지한 반성’이라는 문구를 빼야 한다”며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됐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