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중에 대선 후보가 있어도 나서지 말라고 했어요. 젝스키스 은지원(박근혜 전 대통령 5촌 조카)이 공격받는 거 보셨잖아요. 연예인이 정치권과 엮여서 뭐가 좋겠어요?”
3월 9일 대선을 한 달여 앞두고, 정치권에서 도와달라는 연락이 없느냐는 질문에 한 기획사 관계자는 “연락 올까 두렵다”며 손사래를 쳤다. 이곳만이 아니다. K팝, K드라마 열풍으로 문화계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높지만 대선판에 연예인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는다.
물리적인 숫자가 없다는 건 아니다. 지난 7일엔 문성근, 정지영 등 영화인 253명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 지지 선언을 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 측에도 배우 독고영재 등이 지지 선언을 했고, 15일 대전 선거 유세에는 가수 김흥국이 함께했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이미 정치적 목소리를 내오던 사람들. 숫자도 과거에 비해 턱없이 적다. 그 많던 ‘셀럽(유명인)’은 어디로 간 걸까.
역대 최악급 비호감 선거
연예인들도 얻을 것이 있어야 지지 선언을 한다. 폴리테이너(연예인 출신 정치인)가 되고자 하는 야망이 있지 않은 한, 그들이 원하는 건 좋은 이미지다. 신동엽, 김민종, 김건모 등이 지지 선언을 한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후보는 ‘경제를 잘 아는 유능한 대통령 후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배우 이서진, 방송인 송해, 가수 설운도 등이 지지 선언을 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후보는 ‘첫 여성 대통령 탄생’을 지지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민주당 후보도 ‘사람을 중시하는 따뜻한 대통령’과 함께한다는 명분으로 가수 박기영, ‘미생’ 만화가 윤태호, 바둑 선수 이세돌 등이 지지했다. 이번 선거는 다르다. 대선 후보 지지 선언을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이번 대선은 네거티브가 너무 많고 역대 최악급 비호감 선거라 연예인들의 득(得)보다 실(失)이 더 많은 상황”이라고 했다.
이번 선거가 박빙이란 점도 셀럽들의 참여를 망설이게 한다. 과거 연예인들의 지지 선언이 몰렸던 후보들은 지지율이 월등히 높았다. 배우 유인촌이 지지 선언을 하고, 훗날 그를 문화부 장관까지 지내게 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의 후보 시절 지지율은 무려 60%에 달했다.
대통령보다 센 문화 권력
정치권도 셀럽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기가 쉽지 않다. 문화 권력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의 S급 연예인은 부른다고 오지도 않을 뿐더러, 무리해서 불렀다가는 오히려 팬들의 거센 비난을 받는다. 한 연예계 관계자는 “대통령도 영화 ‘기생충’ 제작진을 청와대에 부르고, BTS와 같이 미국 출장 갔다고 욕먹는 상황에서, 대선 후보가 누구를 부를 수 있겠느냐. S급 연예인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라고 했다.
‘셀럽 무용론’도 나온다. 지금은 유튜버 등 특정 계층에게 깊은 지지를 받는 인플루언서가 많아지고, ‘국민 가수’ ‘국민 배우’처럼 전 연령에서 지지를 받는 셀럽이 줄어드는 추세. 이미 미국에서는 2016년 대선 때 셀럽 무용론을 경험했다. 민주당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은 스칼릿 조핸슨, 제니퍼 로페즈, 에마 스톤, 크리스 에번스 등 수많은 셀럽의 지지를 확보했지만, 공화당 후보였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패했다.
블랙리스트 학습 효과?
연예인이 정치색을 드러내 그 결과가 좋았던 적이 없다는 학습 효과도 이번 대선에서 셀럽이 사라진 이유다. 2018년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속되자 그를 지지했던 연예인들에게까지 “사과하라”는 불똥이 튀었다. 2016년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졌을 땐 ‘문화계 블랙리스트’ 파문이 몰아쳤고, 문재인 정부에서는 지지 연예인 상당수가 공공 기관 임원으로 임명되면서 ‘화이트리스트’ 논란을 빚었다. 한때는 진보 정치인을 지지하는 행위로 ‘개념 연예인’ 훈장을 달았지만, 586 정치인의 도덕성이 지탄받으면서 다들 발을 빼는 분위기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 등 각종 소셜미디어의 발달도 영향을 끼쳤다. 한 진영에 지지 선언을 했을 때, 상대 진영에서 공격받는 속도가 너무 빠르고 직접적이다. 실제로 이재명 후보를 공개 지지한 배우 김의성에게 인신공격성 인스타그램 DM(쪽지)이 쏟아졌다. 이문원 대중문화 평론가는 “사회적 분위기가 극단화하고 갈등이 첨예해지다 보니 단지 사회적 이슈에 자기 의견을 표명해도 반대 측 공격을 받으니 연예인들이 몸을 사리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