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네가 합격이다!”
배우 오디션이 열린 곳은 연예기획사가 아닌 축사(畜舍). 50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주인공은 큰 눈망울이 매력인 황소다. 대형마트 광고에서 사람 목소리를 입혀 인터뷰하는 장면을 찍게 됐다. 명품 ‘배우(俳牛)’를 결정짓는 건 ‘연기력’과 ‘스트레스 관리’. 동물연기학교 ‘스타독엔터테인먼트’의 조현훈 대표는 한 달 동안 매일 축사를 방문했다. 처음에는 울타리 밖에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눈을 피하지 않을 때쯤 자신의 손에 소금을 묻혀 핥게 했다. 그리고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낯선 사람에게 익숙해지도록 함께 지내기도 했다. “연기력의 90%는 사람과의 친밀감에서 나오죠. 사람 배우보다 20배는 까탈스러워요.”
지난 1일 KBS 드라마 ‘태종 이방원’에 등장한 말이 촬영 일주일 뒤 목숨을 잃었다. 낙마 장면을 위해 말을 강제로 넘어뜨렸고 머리가 땅에 박힌 말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동물권행동 카라가 영화, 드라마 제작진에게 ‘촬영 중 사고로 동물이 죽거나 다친 경우가 있는가’ 물었더니 13%가 ‘그렇다’고 답했다. ‘마취제를 놓은 뒤 후유증이 생겼다’ ‘움직임 통제를 위해 묶어두었는데 다리가 부러졌다’는 답변도 있었다.
동물연기학교는 이런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동물이 곧바로 촬영 환경에 내던져지는 게 아니라, 낯선 환경에 놀라지 않고 연기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개와 고양이뿐 아니라 소, 닭, 멧돼지, 비둘기, 라쿤 등이 거쳐갔다는 경기도 이천의 ‘스타독엔터테인먼트’ 동물연기학교에 <아무튼, 주말>이 다녀왔다.
◇인상파 멧돼지, 명랑파 토끼
지난해 TV조선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2′에 출연한 멧돼지도 연기 수업을 받았다. 극중 문호(김응수)의 꿈에 나온 멧돼지는 성난 채로 내달리며 아내 예정(이종남) 얼굴과 오버랩 됐다. 데뷔작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멧돼지는 새끼 때부터 A 동물연기학교에서 자랐다. 경계심 없이 먹이를 잘 먹는 성격이라 자연스레 개인기와 연기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멧돼지를 가르친 연기학교 관계자는 “먼 거리를 이동하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제작진이 이곳에 와서 촬영했다”며 “새끼 때부터 2년 동안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도록 가르치고, 적절한 속도로 달리는 연습을 했다”고 말했다.
동물 배우를 캐스팅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다. 오디션 공고를 통해서 뽑는 방법과 연기학교에서 지도를 집중적으로 받는 방법이 있다. 엑스트라급으로 출연하는 경우에는 동물 엔터테인먼트사에서 오디션 공고를 낸다. 사람을 경계하는지, 어떤 개인기가 있는지 등을 간단히 테스트하기 위해서다. 2~3배수로 뽑힌 동물은 제작 환경에 순차적으로 투입된다. 주인공과의 접점이 많은 주연급 동물 배우는 최장 2년 동안 엔터테인먼트사에 머무르며 연기 연습을 한다. 스타독엔터테인먼트 임덕은 조감독은 “아무리 연습 때 잘해도 촬영 현장에 검은 옷을 입은 남성 스태프들을 보고 겁을 먹어 연기 못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런 부분에 익숙해지도록 시간을 두고 연습시킨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동물연기학교 스타독엔터테인먼트를 거친 동물은 300마리 정도. 그중 조현훈 대표가 가장 애를 먹은 수강생은 토끼였다. 사람에 대한 경계심은 없었지만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 탓이었다. 가방 모델과 함께 화보 촬영을 하는 날, 조현훈 대표는 토끼를 최대한 뛰어놀게 한 다음 간식으로 토끼를 유인했다. 그는 “연기보다 중요한 건 연출”이라며 “가끔 제작사는 동물에게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요구하기도 하는데, 어디까지 가능하고 불가능한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모든 동물은 종(種)을 불문하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겉으로 드러난다. 동물의 스트레스를 인지하면 즉시 연기 연습과 촬영을 중단하는 것도 연기학교의 역할이다. 가장 먼저 드러나는 행동은 간식을 먹지 않는다는 것. 강아지의 경우 귀를 뒤로 젖히거나 하품을 하고, 꼬리를 뒤로 숨기는 행동을 한다. 임덕은 조감독은 “동물이 말은 못해도 연기 지도를 하다 보면 어떤 상태인지 금방 알 수 있다”며 “비언어적인 표현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면 즉시 모든 지도를 중단한다”고 했다.
◇동물 캐스팅 연락이 ‘소품실’에서 왔다
“못해도 그대로 가!” 작년 말 반려견 용품을 파는 광고 촬영 현장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모델과 강아지가 자연스럽게 노는 장면을 촬영해야 하는데, 강아지는 낯선 세트장 한쪽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광고주가 직접 데려온 강아지였다. 다른 강아지로 바꾸자는 제안이 나왔지만 촬영은 강행됐다. 하루 촬영에 드는 비용이 자그마치 10억원. 반려견 주인도 수십 명의 스태프와 고성을 지르는 광고주 탓에 주눅이 들어 강아지를 보호하지 못했다. 결국 배우와 강아지를 따로 찍고 합성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드라마 현장에서 강아지를 정서적으로 학대한 일도 있다. 조 대표는 3년 전 한 드라마 제작사로부터 강아지 캐스팅 요청을 받았다. 30마리를 직접 오디션 보며 최종적으로 3마리를 추렸다. 하지만 조 대표가 추천한 강아지 대신, 불합격시켰던 강아지가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유난히 사람을 무서워하던 개였다. 조 대표는 “학대 트라우마가 있는 강아지라 남자 배우를 무서워한다”고 제작진에 항의했지만 ‘그 강아지가 극본에 딱 맞는 외형이라 어쩔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동물에게 가장 어려운 연기는 ‘죽는 연기’다. 대부분의 동물은 잠들지 않는 한 스스로 눈을 감을 수 없다. 이전에는 죽는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 동물에게 마취제를 놓는 경우도 많았다. 금붕어와 같은 어류가 팔딱대며 죽어가는 모습도 개의치 않고 촬영했다. 임덕은 조감독은 “죽는 연기는 사람도 어렵다. 동물이 죽는 장면을 촬영할 때는 동물 모형을 제작하거나, 카메라 앵글에 동물의 눈을 비추지 않는 등의 연출이 필요하다”고 했다.
동물 배우 섭외를 캐스팅 담당자가 아닌 소품 담당자가 해왔다는 것도 문제다. A 동물연기학교 관계자는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영화 소품팀에서 전화로 동물의 품종, 촬영 날짜만 던져 주고 촬영 가능 여부를 물었다”며 “동물을 생명체가 아닌 소품으로 다뤄 왔던 것”이라고 했다. 지난 1일 발생한 낙마 촬영 사건도 같은 이유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말은 다리를 다치면 뼈 구조상 완치하기 힘들고 설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기 때문에 안락사를 시켜야 한다”며 “무리하게 말을 넘어뜨리는 장면을 촬영하면서 다칠 줄 몰랐다는 게 말이 되냐”고 했다.
그럼에도 컴퓨터 그래픽(CG)이 아닌 실제 동물을 이용하는 이유는 뭘까. 비용의 문제도 있지만 작품의 완성도 때문이라는 의견이다. 조 대표는 “기술상 한계 때문에 CG나 모션캡처로 동물의 ‘리얼리티’를 완벽히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했다.
◇이정재, 원빈 매력 다르듯 동물 배우 연기도 제각각
미디어에 출연하는 동물을 보호하기 위해 농림축산식품부는 지난 25일 현장에서 지켜야 할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2020년 동물권행동 카라는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을 제작했다. 157명의 미디어 종사자를 대상으로 설문도 진행했는데, 현장에 동물 전문 스태프가 배치됐다고 답한 비율은 34%에 그쳤다. ‘고의로 동물에 해를 가했던 경험이 있다’도 8%나 됐다. 그중엔 ‘고양이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장면을 위해 몇 번이나 고양이를 던졌다’ ‘갯벌에서 말이 움직이지 않자 매질을 가했다’는 응답도 있었다.
조현훈 대표는 엔터테인먼트에서 상주하며 배우 수업을 받는 강아지 ‘모카’ ‘달마’ ‘보리’와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런웨이 연습을 한다. 그는 레드카펫 위에서 강아지를 이끌며 말했다. “사람은 혹독한 연습으로 명연기를 펼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동물은 사랑받고 잘 먹어야 연기로 보답합니다. 촬영하는 날은 동물에게 칭찬과 간식이 마구 쏟아지는 날이에요. 배우 이정재와 원빈이 서로 다른 매력을 지녔듯이, 동물 배우에게도 각자의 캐릭터와 연기 톤이 있죠. 배우들이 더 개성을 찾고 활약하도록 연구하는 게 저희 몫이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