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는 대상에 뜻을 깃들여도 되지만, 뜻을 대상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 뜻을 대상에 깃들이면 아무리 하찮은 대상이라도 즐거움이 될 수 있고, 아무리 대단한 대상이라도 병통이 될 수 없다. 대상에 뜻을 머물게 하면, 아무리 하찮은 대상이라도 병통이 될 수 있고, 아무리 대단한 대상이라도 즐거움이 될 수 없다(君子可以寓意於物, 而不可以留意於物, 寓意於物, 雖微物足以爲樂, 雖尤物不足以爲病, 留意於物, 雖微物足以爲病, 雖尤物不足以爲樂).” -소식(蘇軾)의 ‘보회당기(寶繪堂記)’ 중에서
무엇을 제대로 좋아하는 일은 어렵다. 너무 좋아하다 보면 집착이 생긴다. 집착이 생기면 결국 문제가 생긴다. 집착한 나머지 좋아하는 대상에게 무리한 요구나 기대를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좋아하는 대상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라도 하면, 크게 상심하기도 한다. 연애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상대를 너무 좋아하다 보면, 상대를 다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생기기 쉽다. 그러다가 그 상대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게 되면, 마음은 화려하지만 위태로운 삼단 케이크처럼 무너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가. 치열했던 연애가 파국으로 끝나면, 사람들은 아예 연애 자체로부터 거리를 두곤 한다. 실연의 고통을 겪느니, 아예 연애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느끼는 것이다. 연애를 하지 않으면, 실연할 리도 없으리니, 괴로워할 일도 없을 것이다. 좋아하지 않으면, 집착할 일도 없으리니, 상심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인생을 풍요롭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상심할 일도 없지만, 기쁠 일도 없는 인생. 그것은 고적(孤寂)한 인생이다.
무엇을 좋아해도 문제고, 좋아하지 않아도 문제라면,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이돌 열성 팬들은 뒷일을 걱정하지 말고 마냥 좋아하라고 할 것이다. 속세를 떠난 사람은 그런 열성은 다 헛된 집착에 불과하다고 할 것이다. 집착과 초연(超然) 중에서 무엇을 택해야 하나. 이 어려운 문제에 대해, 중국 송나라의 저명한 문인 소식(蘇軾)은 대상을 일단 좋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인정한다. 세속의 쾌락을 흔쾌히 긍정한 사람답게, 소식은 동파육이라는 맛있는 음식의 레시피를 개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소식에 따르면, 인간은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포옹해야 한다. ‘덕질’을 해야 한다.
세속의 쾌락은 쾌락의 대상이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미식을 하려 해도 음식이 필요하고, 연애를 하려 해도 상대가 필요하고, ‘덕질’을 하려 해도 아이돌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세상이라는 대상을 피해서는 안 된다.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에 가기를 마다하지 않고, 아이돌 콘서트에 출석하기를 귀찮아 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락하기를 망설이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매력적인 대상을 접하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나나. 무슨 일이 일어나긴. 마음에 파도가 일어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듯이, 멀쩡하던 사람도 대상을 접촉하고 나면 욕망의 파도가 인다. 그래서 백화점 식품칸에서는 시식용 음식을 제공하고, 출판사에서는 신간 구절들을 공개하고, 극장에서는 개봉작 예고편을 상영하고, 클럽의 춤꾼은 자신의 뽀얀 살결을 살짝 드러낸다. 상대의 감각과 욕망을 일깨우려는 것이다. 마치 바이러스가 신체에 침투하듯이, 그 대상들은 마음을 침범한다.
대상의 매력에 침범당한 마음은 그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에 휩싸인다. 쇼핑할 생각이 없었다가도, 멋진 핸드백을 보면 사고 싶은 욕심이 불끈 생겨나는 것이다. 욕망은 욕망을 부르는 법. 핸드백만 살 수 있나. 헐벗고 핸드백을 들 수는 없으니, 핸드백에 어울리는 옷이 필요하고, 옷에는 그에 맞는 구두가 필요하다. 그뿐인가. 벨트도 필요하고 모자도 필요하다. 불타오르기 시작한 욕망은 끝이 없다.
그래서 소식은 “대상에 뜻을 깃들여도 되지만, 뜻을 대상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대상을 좋아하되, 그 대상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면 디저트에 뜻을 깃들여도 된다. 디저트를 주문해도 된다. 그러나 자기 뜻을 디저트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 맛있다고 해서 디저트에 얼굴을 처박고 정신줄을 놓아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디저트를 보고 미쳐버리지 않으려면, 디저트를 좋아하되 그에 함몰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마음의 중심만 있다면, “아무리 하찮은 대상이라도 즐거움이 될 수 있고, 아무리 대단한 대상이라도 병통이 될 수 없다.”
마음의 중심이 없으면, 디저트를 먹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이미 이성을 잃고 디저트를 먹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이미 먹고 있다!” 마음에 중심이 없기 때문에, 디저트를 보는 순간 달려들어, 먹고 또 먹어서 위장이 불쾌할 지경이 되어서야 정신이 돌아온다. 내가 미쳤구나…. 이런 상태라면, “아무리 하찮은 대상이라도 병통이 될 수 있고, 아무리 대단한 대상이라도 즐거움이 될 수 없다.” 이제 다이어트는 실패할 것이고, 췌장은 망가질 것이다.
인생을 즐기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환멸을 피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좋아하는 대상에 파묻히지 말아야 한다. 대상을 좋아하되 파묻히지 않으려면, 마음의 중심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마음의 중심은 경직되어서는 안 된다. 경직되지 않아야, 기꺼이 좋아하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또 그 대상에게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
자, 그런 유연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가. 그럼 디저트의 자태를 먼저 눈으로 음미한 뒤, 한 스푼 떠서 잠시 허공에서 멈추어 본다. 그 다음, 간결한 선을 그리며 스푼을 입으로 가져간다. 자기 존재 속에 안착한 달콤한 대상을 음미하기 시작한다. 이제 디저트는 혀의 미각 돌기를 지나서 역류성 식도염을 앓고 있는 식도를 지나 위장으로 행진한 뒤, 대장을 거쳐 마침내 누런 똥이 될 것이다. 그 맛있고 아름다운 디저트가 똥이 되었으니 허망하다고? 그럴 리가. 당신은 달콤한 대상이 똥으로 변하는 그 멋진 과정을 한껏 즐긴 것이다. 진짜 허망한 것은, 맛있다고 소문난 디저트가 정작 맛이 없을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