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카프리 맥주를 마셨다. 맥주 맛을 몰랐던 시절이다. 지금은 그럼 맥주 맛을 아느냐? 역시, 잘 모르겠다. 맥주를 안다고 하기에는 이런저런 점이 걸린다. 일단 그리 잘 마시는 편이 아니다. 500mL 한 캔을 혼자 마시기에도 몹시 부담스럽다. 그래서 작은 캔을 사려고 한다.
맥주를 찬양하는 말을 많이도 들어왔다. 거품의 아름다움이라든가 첫 모금의 이를 데 없는 짜릿함과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는 통쾌함에 대하여. 반대하는 건 아니다. 나도 맥주의 거품을 처음 봤을 때 세상에 저런 게 있나 싶어 현혹되었고, 첫 모금을 마시고 나도 모르게 ‘하’ 하게 되지만 벌컥벌컥 마시지 못한다. 나는 야금야금 마시는 사람인데 아무래도 맥주의 세계에서 ‘야금야금’은 용납되지 않는 느낌이랄까.
맥주를 맥주일 수 있게 하는 것은 거품이라고 생각하는데, 거품의 특징은 빠르게 태어났다 빠르게 사라진다는 것이다. 맥주는 거품이 사라지기 전에 마셔야 하고. 그러니 술을 단번에 마시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은 맥주의 맛을 알기에 결격이다. 거품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면서 무슨 맥주의 맛을 논하겠는가. 나는 술 앞에서 매우 겸손해지는 타입이다.
거품이 사라지고 온도가 올라가 미지근해진 맥주를 맥주라고 할 수 있나? 전문 용어로는 ‘식은 맥주’라고 표현하는 (주로) 황금색의 물질을 말이다. 그래서 남들이 500mL를 주문할 때 나는 330mL를 주문하곤 했다. 330mL조차 내 형편에는 버겁지만.
그럼 카프리 맥주를 왜 마셨냐? 유난히 맛있어서 그랬다고는 말 못 하겠다. 나는 마음을 먹으면 거짓말은 좀 하는 편인데 ‘좋은 게 좋은 거지’ 식의 선의의 거짓말은 못 하겠다. 프리미엄 맥주라고 맥주병 여기저기에 쓰여 있는데 뭐가 프리미엄이라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맥주 맛을 감별하는 사람은 아니라서 카프리의 프리미엄적인 특별함을 감별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저 예뻤다. 맛도 잘 모르는 거 이왕이면 예쁜 걸 마시고 싶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카프리의 예쁨’은 병이 작고, 또 투명하다는 데 있었다. 주로 갈색 병에 든 큼지막한 맥주들 사이에 있으면 카프리의 날렵함이 돋보였다. 이름이 카프리라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지. 카스나 하이트와 카프리는 다른 것이다. 지상계의 물빛이 아니라는 카프리 바다의 색에 대해 귀가 아프게 들어왔기도 한 데다 날카로운 ‘ㅋ’와 ‘ㅍ’ 뒤에 ‘ㄹ’이 따라붙어 내는 ‘카프리’라는 소리는 얼마나 산뜻한지. 아마 여기에서 왔을, 발목이 드러나게 입는 카프리 팬츠도 좋아한다.
카프리에 유리병만 있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이런 ‘곤조’는 너무 멋지지 않나? 맥주는 ‘캔맥’보다는 역시 ‘병맥’인 것이다. 맥주의 병목을 잡고 콸콸콸 따르는 그 순간을 끔찍이도 좋아했다. 잘 따라서는 아니고 콸콸콸 하는 그 소리 때문이다. 그래서 생맥주가 맛있다는 집에 가서도 나는 늘 병맥주나 생맥주냐를 고민하게 된다. 병맥주 중에서도 작은 맥주가 좋다. 330mL인 카프리는 내 손에도 버겁지 않다. 맥주를 잘 못 마신다고 해도 취향은 있는 것이다.
지금은 캔도 나온 것 같은데 예전에는 병만 있었다. “카프리는 병으로만 드셔 주세요.”라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 동네 슈퍼의 주류 냉장고에서 카프리를 건져 올리곤 했다. 또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카프리를 6개 사면 커피를 테이크 아웃할 때 주는 것 같은 종이 캐리어에 담아주는데 이게 좋았다. 6개의 카프리를 요일별로 하나씩 마셨다. 월화수목금토, 이렇게. 일요일은 하루 쉬고. 요일 팬티라는 건 참 우습다고 생각하면서 요일 맥주를 마셨다. 카프리를 따르면 적막에 잠겨 있던 내 방은 그제야 콸콸콸이라는 소리 덕에 생기가 돌았다.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오랜만에 카프리를 떠올린 것은 카프리가 나오는 영화를 봤기 때문이다. 나폴리에 사는 소년이 위험한 남자와 오토바이를 타고 밤거리를 누비다가 카프리에 가는 장면이 있었다. 당연히 배를 타고 간다. 위험한 남자가 카프리에 춤을 추러 가자고 해서 왔는데, 밤의 카프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쇠락한 건지 아니면 쉬는 날이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래서 둘은 춤도 못 추고 뭘 하느냐면 물이 가득한 동굴 같은 데서 수영을 한다.
극장에서 영화를 보다가 ‘아, 이런 거 너무 좋잖아’라고 생각했다. ‘카프리에는 낭만만 있는 건 아니거든?’이라고 말해주는 장면이어서. 영화는 파올로 소렌티노의 <신의 손>으로 지금도 극장에 걸려 있다. 넷플릭스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영화만은 극장에서 보고 싶어서 극장에 갔고, 나는 온갖 귀찮음을 무릅쓰고 극장에 간 나를 칭찬하고 싶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카프리가 매우 마시고 싶었다, 라고 쓰면 너무 뻔하겠지? 그러지는 않았다. 다만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내게는 카프리 하면 자동 연상되는 사람이 있다. 그분의 성도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전화번호도 모른다. 아는 거라고는 그분이 하시는 술집뿐이다. (전화번호가 없는 술집이다) 그분은 내가 종종 가던 술집의 사장님으로 정말 모든 음식을 맛있게 하시는데, 그중 가장 맛있는 것은 기본으로 제공되는 5종의 나물무침이다. 나는 전에 낸 산문집에서 이 집에 대해 쓴 적이 있다.
“나는 일단 콩나물에 탄복했다. 간이 싱겁지도 짜지도 않고 딱 좋았으며, 아삭거림이 넘쳤다… 시금치는 뿌리의 분홍빛이 선명한 질 좋은 포항초였으며, 오이는 밭에서 갓 딴 것을 무친 듯 채즙이 넘쳤고, 가지 역시 베어 물 때마다 그 탄성에 노곤해질 정도였다. 작은 무만 골라 담근 데다 양념이 무청에 완강하게 흡착되어 있는 알타리 김치까지.” 이 집의 사장님이 카프리를 드신다.
재미있는 것은, 이 집에서는 카프리를 팔지 않는다. 손님들이 함께 술을 마시자고 하면 사장님은 편의점에 카프리를 사러 간다. 같이 마시자고 한 것은 손님이므로 카프리 값은 술값에 포함된다. 이 집의 시스템이다. 옆에서 보며 이게 뭔가 싶었다. 처음에는 기이했는데, 결국은 나도 그곳의 분위기에 녹아들었고 사장님께 함께 마시자고 청하게 되었다. 나는 사장님이 카프리를 드시는 옆모습을 좋아한다. 마스카라를 정성껏 칠한 사장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 카프리 따라 드리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