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출신 첫 여성 시각장애 의원인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안내견 조이와 함께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앉았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2002년 서울 숙명여대 음악대학 강의실. 바로크 음악에 대해 강의하던 교수가 “작곡가 헨델은 노년에 장님이 됐다”고 무심코 설명했다. 갑자기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들었다. “교수님! 장님이라는 표현을 쓰시면 안 되죠. 2000년대에 대학 강단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님이 그런 언어를 사용하시면 곤란합니다.”

이 당찬 학생은 18년 뒤 국회 입성을 앞두고 단상에 올라 또박또박 말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 아직 만연한 장애인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개선하는 것입니다. ‘신체장애인보다 더 한심한 사람들’ ‘정치권에는 저게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장애인이 많이 있다’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 이렇게 발언한 한 정치인을 기억하시는지요? 아직도 장애라 하면 ‘다름’이 아니라 ‘비정상’으로 여기는 편견이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 뿌리 깊게 박혀있습니다. 심지어 국민의 대표로 뽑힌 국회의원까지도 말입니다.”

시각장애 피아니스트이자 첫 여성 시각장애 국회의원인 김예지(42) 국민의힘 의원 얘기다. 김 의원은 지난 2020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이 21대 총선을 앞두고 출범시킨 비례 전문 정당 미래한국당의 ‘영입 인재 1호’로, 비례대표 순번 11번을 받고 출마했다. 당시 그는 수차례 장애인 비하 발언으로 논란이 된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를 향해 “선천적 장애인이 결코 의지가 약하지 않다는 것을 제가 보여드리겠다”고 일갈했다.

김예지 의원이 안내견 조이와 함께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 섰다. 그는 최근 국민의힘 내홍과 관련해 "복잡한 이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조율하고 최적의 하모니를 만들어가는 게 바로 정치"라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김 의원이 당선되면서 그의 안내견(犬) ‘조이’는 헌정 사상 처음으로 국회 본회의장에 입성한 개가 됐다. 지난 2004년 시각장애인으로 처음 당선된 한나라당 정화원 의원은 안내견 출입 불허 조치로 보좌진 도움을 받아 본회의장에 들어간 전례가 있다. 이 때문에 안내견 출입 문제가 잠시 논란이 됐지만, 어떤 시설도 안내견의 출입을 제한할 수 없다는 장애인복지법 제40조에 따라 조이는 현재 국회 어느 곳에서나 자유롭게 김 의원과 동행하고 있다.

지난 연말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김 의원을 만났다. 6층 의원실에 들어서자 조이가 먼저 나와 꼬리를 흔들며 기자를 맞았다. 듬직한 래브라도 레트리버종(여섯 살)이다. “얘가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데 금세 자기 자리에서 잘 거예요.” 인터뷰가 시작되자 김 의원 말대로 조이는 방석 위에 철퍼덕 엎드리더니 이내 잠이 들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자기 자리에서 곤히 잠든 조이 모습. 김 의원이 책상에 앉아 업무를 보거나 소파에 앉아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 조이에겐 꿀같은 휴식 시간이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숨가쁘게 달려온 의정활동 1년 7개월

-출마 입장문부터 여당 대표를 비판해 화제가 됐다. 차별 언어를 들으면 못 참는 성격인가.

“대학 때 강의 중 손 들고 지적했을 땐 교수님뿐 아니라 학생들도 당황했다. 그런데 교수님이 그 뒤로는 각별히 조심하셨다. 장님이라는 표현이 욕은 아니지만 지식의 상아탑이라는 대학에서, 그것도 학생들을 지도하는 교육자로서는 적당하지 않은 단어라고 생각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장님’은 ‘시각장애인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실수할 때마다 누군가는 말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르고 하신 거니까. 그분들은 공공연하게 써왔던 말들이고, 미처 차별 언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거다. 혐오나 차별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는 계기를 만들 필요가 있다.”

-지난 1년 7개월간 겪은 국회는 어땠나.

“스펙터클했다. 처음엔 국회라는 데가 어떤 곳이고, 어떻게 업무가 진행되는지 적응하는 기간이었는데 그 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고(故) 최숙현 선수 사건 관련해서 청문회가 있었고, 황희 문체부 장관 인사 청문회도 열렸다. 국정감사를 하고, 현장에 필요한 정책과 법안을 발의하면서, 밖에서 해보고 싶었던 일들을 안에서 직접 제안하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꼈다. 국회에서 내가 해야 할 일에 확신이 생기면서, 남은 기간 더 열심히 달려야겠다 다짐하고 있다.”

-법안을 많이 발의했는데.

“지금까지 총 107건을 발의했고 그중 20건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첫해인 2020년에만 50건을 대표 발의했다. 보조견 출입 거부 사유를 대통령령으로 명확히 해서 장애인 이동권을 보장하는 내용의 장애인복지법 일부 개정 법률안(일명 조이법)을 비롯해 약사법 개정안, 공직선거법(점자 공보물) 개정안, 스포츠산업진흥법 개정안 등이다. 그리고 장애계의 오랜 숙원이었던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선택 의정서 비준 촉구 결의안’이 드디어 본회의에서 통과됐고 대통령 재가까지 거쳐 비준을 앞두고 있다.”

-한선교 당시 미래한국당 대표가 영입 제안을 했다던데, 받아들인 계기가 있었나.

“처음 한 대표님 전화를 받았을 때는 국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해달라는 의뢰인 줄 알았다.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한참 하다가 영입 제안을 하셨다. 그날은 생각해보겠다고 답했고, 그 후 오래 생각하지 않고 ‘하겠다’고 했다. 장애계에 여러 이슈가 있는데 장애 유형만 해도 15~16가지 된다. 당사자가 아니면 알지 못하는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러니 ‘이런 게 필요하니까 발의해주세요’ ‘이런 법안이 개정됐으면 합니다’라고 말씀드려도 주목받는 이슈가 아니다 보니 빨리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기회가 왔으니 선·후배, 동료들을 생각해서 장애계를 대표하는 심부름꾼으로 왔다.”

지난 2020년 국회 의원총회에 참석한 김예지 의원과 안내견 조이. /조선일보DB

◇국감에서 화끈하게 칭찬하는 의원

김 의원은 1순위로 문화체육관광위를 신청해 배정받았다. “이전까지 장애인 국회의원은 무조건 보건복지위원회로 배정됐다더라. 하지만 저는 예술인이고 문화 분야에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고 했다.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두꺼운 점자 자료를 쇼핑백 4~5개에 가득 담아 와, 손가락으로 빠르게 훑으며 질의하는 그의 모습이 화면에 잡혔다. 호통치고 윽박지르는 의원들 사이에서, 차분하게 정책을 묻고 꼼꼼하게 질의하는 태도가 돋보였다. 자연스럽게 그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이게 됐다.

지난해 국회 문체위에서 발언하고 있는 김예지 의원. /김예지의원실

예를 들어 이런 장면. 2020년 문화재청 국감에서 김 의원은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천연기념물 멀티미디어 점자 감각책을 직접 펼쳐 보이며 “기존 텍스트형 점자책과는 달리 촉감과 스토리텔링, 음원을 활용해 저 같은 사회적 약자가 자연 유산을 향유할 수 있게 해줬다”며 “마음으로 열렬히 박수를 보낸다”고 했다. 정재숙 당시 문화재청장이 “국감 현장에서 칭찬받기는 처음”이라며 “5000부 찍고 싶었는데 예산이 부족해서 450부밖에 못 찍었다”고 답하자, 도종환 당시 문체위원장이 “5000부 제작하는 데 예산이 얼마나 필요하냐”고 묻기도 했다.

-국감에서 칭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제가 칭찬을 많이 못 듣고 자라서 칭찬을 많이 하려고 한다(웃음). 효과가 있었던 게, 지난해 관련 예산이 편성됐다. 그 영향으로 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도 청자·목간 등 소장 유물을 촉각 교재로 만들었고, 경복궁에는 시각장애인들이 촉각을 이용해 안내판을 읽을 수 있는 촉각 점자 안내판이 설치됐다. 이렇게 퍼져가는 게 제가 진짜 바랐던 거다. 문체부뿐 아니라 교육부에서는 물리학·생물학·역사·지리 등 촉각 자료가 정말 필요한데, 다른 부처들로 이어지는 변화의 시발점이 됐으면 좋겠다.”

-국감 준비를 무척 꼼꼼히 하는 것 같은데.

“국회 들어오면서 점역(점자 번역)이 가능한 보좌진과 점자 프린터, 점자 정보 단말기, 음성 지원 노트북 등을 지원받았다. 다른 의원들에 비해 아무래도 자료를 보는 과정이 길다. 표가 있으면 풀어서 봐야 되고, 점자나 음성 자료를 읽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일찍부터 국감 준비를 한다. 평상시에도 늘 국감을 준비한다는 마음으로 챙기고 있다.”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 서있는 김예지 의원.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피아노를 선택한 고집 센 아이

김 의원은 선천적 시각장애인이다. 병명은 선천성 망막색소 변성증. 태어날 때부터 아예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동그란 원 안에 갇혀 보이던 엄마 얼굴이 뿌옇게 흐려지다가 뭉개지더니, 나중에는 얼굴이라는 걸 짐작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명하다는 병원을 두루 찾아다니다 결국 검사를 중단했다. 어머니는 시력을 잃어가는 어린 예지에게 말했다. “네 눈에 별이 가득해져서 그래. 별이 가득하니까 눈이 부셔서 못 보게 된 거야.”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바이올린과 플루트 등 악기를 다룰 줄 알았던 그는 눈이 점점 나빠지고 바깥 활동이 줄어들면서 음악에 더 집중하게 됐고, 피아노 연주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숙명여대 피아노과에 수석 입학하면서 주목받았다. 그것도 장애인 전형이 아니라 일반 전형으로.

“입학과 졸업을 화려하게 했다(웃음). 어떤 학교에도 피아노 전공은 장애인 전형이 없었기 때문에 일반 전형에 응시한 거다. 나보다 수능 더 잘 보고, 더 좋은 학교 간 친구도 많은데 내가 마치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뉴스에 나왔다. 장애인의 기적, 인간 승리로 미화되는 게 당황스러웠다. 저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도 아니고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 으쌰으쌰 힘을 낸 것도 아니다.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한 것이고, 시각장애가 그 일을 하는 데에 그야말로 장애가 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시력에 전혀 문제가 없다가 청소년기쯤 시력을 잃었으면 더 좌절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는 애초부터 보는 것이 주된 감각 수단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각장애가 큰 어려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본격적으로 입시를 준비하며 피아노 선생님을 찾을 때도 많은 분이 장애를 이유로 가르치길 꺼렸다. 점자 악보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대학교 생활은 어땠나.

“12년간 서울맹학교를 다니다가 처음으로 일반 학교에 다니게 된 거다. 그 전까진 나랑 같은 상황의 친구들과 공부했고, 새 학기가 되면 당연히 점자책이 나왔다. 그런데 대학에 오니 남들은 쉽게 보는 교재를 나는 볼 수 없었다. 모든 강의 교재를 점자 도서로 전환해야 했는데, 학기 초에 맡긴 책이 학기가 끝날 때쯤에야 나왔다. 일일이 싸우고, 부딪쳐야 했다.”

-그래서 더 적극적인 성격이 됐나 보다.”

“직접 나서지 않으면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가만히 도움 받기를 기다리면서 누군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고집이 세고 의사 표시가 분명해서 어머니가 젖 뗄 때도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고 했다. 빨간약 바르고 ‘엄마 아야!’ 했더니만, 수건 들고 와서 닦고 먹더라고, 암튼 지독했다더라.”

김예지 의원은 “어릴 때부터 고집 세고 의사 표시가 분명한 아이였다”며 “일일이 싸우고 부딪쳐야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었던 과정이 쉬운 건 아니었지만, 내가 이뤄낸 것들이 인간 승리로 미화되는 건 싫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조이는 내 몸 같은 친구

김 의원이 시각장애인 안내견을 만난 것도 대학 시절이다. 그는 2000년 삼성안내견학교를 통해 첫 안내견 ‘창조’를 만났다. 두 번째 안내견 ‘찬미’는 미국 유학을 함께했고, 2018년 3월 세 번째 안내견인 지금의 ‘조이’와 만났다.

-조이의 본회의장 출입 논란 덕분에 사람들이 안내견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것 같다.

“안내견이 모든 공공장소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분이 많다. 최근에도 저는 안내견과 함께 식당에 들어가려다 거부당했다. 안내견은 시각장애인의 눈이자 발인데, 눈을 빼놓고 들어가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애인복지법에 정당한 사유 없이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명시한 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각장애인들이 늘 겪는 일이다.”

-김 의원에게 조이는 어떤 존재인가.

“가족이고 친구고, 그냥 제 몸 같은 존재다. 생명체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제가 돌봐줘야 하고 책임감이 없으면 함께할 수 없다. 편의성으로만 보자면 사실 안내견보다 흰 지팡이가 더 편하다. 먹이를 주고 목욕시키고 배변 처리하고 아플 때도 돌봐줘야 하니까. 그래도 내가 어떤 생명체를 책임진다는 자긍심도 크고, 무엇보다 심리적 안정감이 있다.”

-조이가 국회에 잘 적응하나.

“저보다 훨씬 더 잘한다. 제가 농담으로 ‘네가 진정한 국개의원이야’ 할 정도로(웃음). 국회를 너무 좋아해서 주말에도 가끔 출근하자고 조른다.”

김 의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조이가 갑자기 몸을 털며 일어났다. “지금 자기 얘기하는 거 아는 거냐” 묻자, 김 의원이 답했다. “옛날엔 무대에서 연주 끝나고 사람들이 손뼉 치면 일어나서 꼬리를 흔들었는데, 지금은 뭘 제일 좋아하는지 아나? 국회 의사봉 땅땅땅! 그걸 치면 벌떡 일어난다. ‘오늘 업무 끝났다~’ 하고 귀신같이 아는 거다.”

-근데 왜 갑자기 속삭이듯 말씀하시나.

“조이가 듣고 있어서. 얘가 눈치가 너무 빠르다. 눈치견, 아니 정치견이다. 호불호도 강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의원님 앞에선 꼬리를 막 흔들고, 어떤 의원님은 불러도 쳐다보지 않아서 제가 민망할 정도다, 하하!”

-조이가 팬레터도 받고 국회에서 제일 인기가 많다던데.

“작년 초에 조이 스웨터를 떠서 보내주신 분도 있고, 편지랑 선물을 같이 보내주신 분도 있다. ‘정치에 관심 없고 지지하는 의원도 없는데, 저랑 조이 활동은 응원한다’고 해주셔서 책임감을 더 느끼고 있다.”

김예지 의원의 안내견 조이.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인터뷰 중 활짝 웃고 있는 김예지 의원.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정치는 여러 소리 조율하는 음악과 닮아”

대학 졸업 후 스스로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음악 교사가 되려던 그는 공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에 유학을 택했다. “인맥도 없는 제가 연주자로 성공하려면 학위는 따야 했다”고 했다. 미국 피바디음대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고, 위스콘신 음악대학에서 피아노 연주와 교습법을 연구해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학 시절 그가 개발한 다차원 촉각 악보가 미국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유학 갈 때도 안내견과 함께 갔더라.

“석사과정 때는 혼자 갔다. 제 한 몸 챙기기도 힘든 유학 초반에 안내견까지 돌보기엔 너무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석사 2년을 마치고 박사과정에 들어갈 때 안내견 ‘찬미’를 만나 함께 미국으로 갔다. 찬미는 유학 생활을 오롯이 같이했고, 일본·캐나다·영국 등 연주 여행도 같이 다녔다. 비행기를 차보다 많이 탄 친구인데, 은퇴 후 좋은 가족을 만나 잘 지내고 있다가 지난달 하늘나라로 떠났다. 마음이 많이 아팠다.”

-미국의 안내견 시스템은 어땠나.

“사실 시스템은 우리나라가 뒤지지 않는다. 문제는 장애인을 보는 시각이다. 한국에선 안내견과 돌아다니면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린다. 부담스러워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호의적이거나. 미국에선 제가 안내견과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사람들이 똑같이 행동했다.”

지난달 한국예술종합학교 무대에 오른 김예지(오른쪽) 의원과 김대진 총장. 조이가 김 의원 곁을 지키고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김 의원은 지난달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열린 ‘포르테 콘서트’ 무대에 올랐다. 한예종 총장인 피아니스트 김대진과 함께 피아노 한 대에 나란히 앉아 드뷔시의 ‘네 손을 위한 작은 모음곡’ 중 ‘조각배’와 ‘발레’를 연주했다. 조이가 가장 먼저 무대에 등장해 끝까지 김 의원 곁을 지켰다. 김대진 총장이 지난해 8월 취임 후 첫 공식 행사로 마련한 이 무대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연주자들이 함께 만든 송년 콘서트. 김 총장은 “한예종에선 장애 학생 23명이 예술을 전공하고 있다”며 “비장애인은 장애인에게 적응하고,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협업하는 과정을 통해 강의실에서는 못 배우는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김 총장이 국회를 찾아가 김 의원에게 제안하면서 이날 공연이 이뤄졌다. 김 의원은 “사회 통합이라는 게 특별한 게 아니다. 이렇게 일상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협업하고 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새해가 밝았다. 국민의힘은 이번주 큰 내홍을 겪었다. 대선을 60여 일 앞두고 윤석열 후보는 선대위를 해체했고, 6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윤 후보와 이준석 대표는 극적으로 ‘원팀’을 선언하며 갈등을 봉합했다. 초선인 김 의원에게 이 과정을 지켜본 심경을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의원은 “폭풍 같은 한 주를 겪었다”며 “예술만큼이나 정치도 길고 불완전한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했다.

“기본적으로 정치란 다양한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의견을 조율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음악과 닮았다. 여러 악기의 소리를 조율해서 화음을 맞추고, 가장 좋은 소리를 만들려면 다른 악기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저는 정치인들이 음악을 공부하시면 훨씬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연주회가 싫으면 중간에라도 나갈 수 있지만, 대통령은 한번 선택하면 좋든 싫든 5년을 겪어야 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적절하게 다듬을 수 있는 후보의 역량이 그래서 가장 중요하고, 그가 최대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뒤에서 든든히 받쳐주는 파트도 중요하다.”

-임기가 끝나면 정치를 계속할 건가.

“당연히 연주자로 돌아간다. 하지만 여기서 하던 일들을 밖에 나가서도 계속할 거다. 그때까지 제가 장애 당사자로 느끼고 뼛속 깊이 동감한 부분들이 반영된 법안을 최대한 많이 만들어놓고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