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시험마저 불공정하다면, 무엇을 믿어야 합니까?’
지난달 20일부터 정부세종청사 고용노동부 본청 앞에선 맹추위 속에서도 1인 피켓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작년에 치러진 제58회 세무사 시험이 불공정하게 출제·채점됐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시험을 봤던 청년들이 진상 규명과 대책을 요구하는 시위를 한 달 넘게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부정 출제·채점 의혹을 제기한 ‘세무사시험연대(세시연)’에 가입한 응시자는 이미 700명이 넘었다. 이들은 왜 분노하는 걸까. 불합격자뿐 아니라 이번 시험에 합격한 응시생조차 “단순한 출제·채점 오류라고 하기엔 세무공무원 출신에 특혜를 주려 했다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고 말한다. 작년 세무사 시험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해명에도 풀리지 않는 ‘부정’ 정황들
세무사 시험은 1차·2차로 나뉜다. 문제가 된 건 2차 시험이다. 2차 시험은 ‘회계학 1부’ ‘회계학 2부’ ‘세법학 1부’ ‘세법학 2부’ 4개 과목에서 평균 점수가 높은 순서로 합격자가 결정된다. 다만 평균 점수가 높아도 한 과목이라도 40점 밑 과락이면 불합격이다.
이 중 ‘세법학 1부’가 논란의 핵심이다. 응시생 3962명 중 82.1%인 3254명이 세법학 1부에서 과락을 받았다. 최근 5년간 평균 과락률이 38%인 점을 감안하면 이 과목 과락률이 이례적으로 높다. 평년보다 월등히 어렵게 출제됐거나, 유독 이 과목에서 과락자가 많이 나오게 채점 기준을 바꿨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그런데 이번 시험에 응시한 세무공무원 출신 720여 명 중 상당수는 세법학 1부를 아예 치르지 않았다. 현행법상 20년 이상 세무공무원으로 일했거나 국세청 근무 경력 10년 이상에 5급 이상으로 재직한 경력이 5년 이상인 공무원은 2차 시험 중 세법학 1·2부를 면제받기 때문이다.
그 결과 올해 합격자 중 세무공무원 출신이 이례적으로 많이 나왔다. 작년에는 합격자 중 세무공무원 출신이 17명이었는데, 올해는 151명으로 9배 가까이 늘었다. 올해 합격자의 21%다. 통상 매년 합격자 중 세무공무원 비율은 3% 수준. 시험을 주관한 한국산업인력공단 직원이나 출제위원이 부당한 청탁을 받거나 외부의 압박을 받은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과락자가 대거 나온 세법학 1부의 특정 문제가 공무원 출신에 유리하게 출제됐다는 의혹도 있다. 세법학 1부 4번 문항의 경우 응시생의 절반이 넘는 2025명(51%)이 ‘0점’ 처리를 받았다. 해당 문항에 대해 응시생들은 “사설 학원에서는 전혀 중요하게 다루지 않는 부분”이라고 입을 모았고, 현직 세무사들은 “실무를 해보지 않으면 사실상 풀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다. 세시연은 “해당 문제는 세무사들이 이용하는 실무 관련 사이트에 게시된 사례와 거의 유사한 것으로 확인했다”는 입장이다.
이에 1차시험은 면제를 받지만 2차시험 4과목은 모두 치러야하는 임용 20년이 안 된, 10년 이상 경력의 세무공무원 출신에 유리하게 출제된 문제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논술형 시험은 통상 부분점수가 있다는 걸 감안하면 0점 처리자가 이례적으로 많은 것은 부정 채점 의혹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공단 측은 “정상적인 출제·채점이 이뤄졌으나 논란이 있는 만큼 고용노동부의 감사 결과를 기다리겠다”는 입장이다.
◇청년들 “공무원 출신과 불공정 경쟁”
고용노동부의 감사 결과가 나오더라도 이번 사태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을 태세다. 젊은 응시생들이 세무사 시험의 기본 룰(rule) 자체를 문제 삼고 나섰기 때문이다. “세무공무원 출신에게 1차 시험을 면제해주고 거기에 2차 시험 과목 일부도 면제하는 것 자체가 불공정”이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세시연 측은 “현재 약 250여 명이 공단에 행정심판 및 행정소송을 준비 중이고, 세무공무원 출신에 시험 과목을 면제해주는 현행법에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이 문제삼는 법령은 세무사법 제5조 2항에 규정된 세무사시험 면제 조항이다. 해당 조항은 세무공무원으로 10~20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 대해 1차 시험을 면제하거나 2차 시험 과목의 절반을 면제해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런 조항이 대체 왜 있는 걸까. 세무사법이 처음 제정된 1961년에는 세무사 시험 자체가 없었다. 대신 관련 학위가 있거나 고졸 이상, 세무공무원을 10년 이상 재직한 경우 세무사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했다. 고학력자와 전문인력이 부족한 현실을 감안해 실무경험자들을 전문직종으로 진출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1972년부터 세무사 시험 제도가 마련되고 관련 법도 개정됐지만 1999년까지는 10년 이상 세무공무원으로 일한 사람 중 5급 이상으로 5년 이상 재직한 사람에게는 자동으로 세무사 자격을 부여하는 조항이 그대로 유지됐다. 드문드문 ‘특혜’라는 문제 제기가 이어지면서 결국 2000년부터 시행된 개정된 세무사법에서는 세무사 자격을 자동 부여하는 조항이 폐지됐다. 하지만 이는 2000년부터 임용된 세무공무원에게만 적용되고, 2000년 전 임용된 공무원에는 소급 적용이 되지 않는다.
2000년 이후 임용된 세무공무원에게는 자격증을 주지 않는 대신 지금과 같은 시험 감면 규정이 마련됐다. 공교롭게도 2000년에 임용된 세무공무원들이 대거 재직 20년을 넘어 2차 시험 절반을 면제받게 된 지난 시험부터 세무공무원 출신 합격자가 크게 늘어난 점도 의혹을 키우는 정황 중 하나다.
세무 업계에서는 “고위 공직 출신 세무사들의 힘이 막강하기 때문에 특혜 규정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고위 공직을 거친 세무사들이 세무사 단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일종의 ‘대관 창구’ 역할을 톡톡히 해준다는 암묵적인 카르텔이 있다는 것이다. 이번 사태가 ‘공정’에 유독 민감한 MZ세대 응시생들의 역린을 건드린 셈이다.
◇신규 세무사 3분의 1이 세무공무원 출신
MZ세대인 젊은 세무사들 사이에서도 “이 기회에 세무사 시장 내 기득권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공무원 출신 세무사들이 대거 진출한 탓에 젊은 세무사들이 경쟁에서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국회 환노위)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한국세무사회에 매년 새로 등록된 세무사는 연 587~983명이다. 이 중 약 3분의 1인 연 203~304명이 세무공무원 출신이다. 2000년 전 임용돼 5급 이상 5년 이상 재직 후 세무사 자격증을 자동 취득했거나 2000년 이후 시험 감면 규정을 적용받고 시험을 치러 세무사에 합격한 공무원들이 퇴직 후 줄줄이 세무사로 개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30대 세무사는 “소위 ‘큰 건’으로 불리는 대형 거래처일수록 고위 공직 출신을 선호하고, 세무사 자격이 있는 공무원들은 퇴직 전부터 거래처를 관리한다는 얘기가 무성하다”며 “시험을 보고 합격한 젊은 세무사들이 이들과 경쟁해서 이겨내긴 어렵다”고 말했다. 최근 합격한 젊은 세무사 중 다시 세무공무원 시험을 치러 국세청 공무원이 되며 ‘장래를 기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김 의원은 “세무공무원 출신들이 특혜성으로 대거 세무사 시장에 진출하는 건 공정과 상식이라는 시대정신에 어긋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공무원에게 전문직 시험에서 특례를 인정하는 건 시대착오적”이라고 했다. 신봉기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실무 경력자를 선발한다면 특정 과목을 면제할 게 아니라 실무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과목이나 평가 기준을 마련하는 게 합리적”이라며 “장기적으로 입법·사법·행정과 독립된 제4부인 ‘고시부’를 설립해 외부의 개입을 차단하고 엄격하고 공정한 국가자격증 시험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