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 공연 ‘허수아비’가 진행 중인 가운데 이승무 한예종 교수가 이를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허수아비’는 이 교수가 이끄는 아트앤테크놀로지랩이 일군 결실. 이 교수는 가장 보람된 일로 ‘교육’을 꼽았다. “젊은 예술가들이 훌륭한 창작자가 되는 데 도움을 주고, 저도 그들로부터 새로운 자극을 받는 일은 크리에이터에게 큰 축복이죠.”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하늘에선 눈이 떨어졌다. 손에서 까슬한 감촉이 느껴졌다. 허수아비였다. 들판을 무지갯빛으로 물들일 땐 꽃내음이 났다. 화산이 폭발하자 매캐한 향과 열기가 느껴졌다. 함께 싸워 불새를 쫓아냈다. 마지막 순간, 허수아비는 미소 띤 얼굴로 나를 안았다.

지난 17일 서울 코엑스에서 국내 최초 메타버스 공연이라는 ‘허수아비’를 관람했다. ‘사악한 새들이 습격한 마을, 폐허가 된 그곳에서 관객이 허수아비와 친구가 돼 새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상영 시간은 20분 남짓. VR기기를 착용하자 눈과 귀, 코와 손으로 ‘허수아비’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허수아비’는 영국 레인댄스 영화제 등에서 수상했고, 외신은 ‘역대 디지털 콘텐츠 중 가장 생생한 체험’(포브스) ‘시대를 앞서간 작품’(VR스카우트) ‘헤드셋 안에서 눈물을 흘린 마법같은 공연’(노프로시니엄)이라고 극찬했다.

이 새로운 세계의 창조주는 이승무(58) 한국예술종합학교 아트앤테크놀로지랩 소장. 그는 “허수아비는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스토리텔링”으로 “관객이 공동 창작자로서 함께 만들어가는 작품”이라고 했다. 교수이자 영화감독이며 시나리오 작가인 그는, 2010년 장편영화 데뷔작 ‘워리어스 웨이’로 주목받았다. ‘한국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는 이어령(87) 초대 문화부 장관의 아들이란 사실도 당시 화제가 됐다. 첫 영화 이후 11년, 메타버스와 예술의 결합에 몰두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관객의 눈물, 메타버스의 힘

-이런 공연은 처음입니다.

“‘허수아비’는 메타버스, 가상현실(VR)을 기반으로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식의 의미와 감동을 만들어내는 공연입니다. 영화와 달리 관객이 코크리에이터(co-creator·공동창작자)로서 작품을 같이 만드는 거죠.”

-호평 일색이던데요.

“선댄스 영화제 때 관객의 30% 정도가 눈물을 보였습니다. 허수아비가 떠나갈 때 짧게 사귄 친구와 진짜 헤어지는 것 같았다는 관객, 난생처음 배우를 만나봤는데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는 관객이 있었죠. 현실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시간을 공유하고 감동을 받는 거예요. 감정이입, 현존감, 몰입감…. 메타버스와 VR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왜 하필 메타버스인가요?

“창작자 입장에서 메타버스는 전 세계 관객과 만날 수 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열어줍니다. 관객들은 현실에서 느끼지 못하는 재미와 감동을 메타버스에서 찾는 거고요. 어렸을 때 ‘내가 왕자가 된다면’ ‘내가 저 남자랑 결혼을 한다면’ 이런 상상을 하잖아요. 이런 상상을 어느 정도 구현한 게 영화고, 더 나아간 게 메타버스 기반 콘텐츠죠. 인간의 모든 상상이 구현되는 세상이 바로 메타버스니까요.”

-사람들이 메타버스에 끌릴까요? 현실이 디스토피아라면 몰라도.

“작년에 제가 ‘세키로’란 게임에 빠져 있었는데, 두 달 동안 550시간을 플레이했어요. 아내가 등짝을 때리며 말렸을 정도죠(웃음). 인간이니까 어쩔 수 없이 밥도 먹고 잠도 자야 해서 게임을 중간중간 쉬었지만, 그땐 정말 계속 게임을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제가 현실이 불행해서 게임을 그렇게 많이 했을까요? 현실이 끔찍하지 않더라도, 메타버스가 재밌고 편리하고 중요하게 느껴진다면 사람들은 메타버스를 찾게 되겠죠.”

VR 기기를 착용한 관객의 눈에 보이는 ‘허수아비’ 실황 장면. /한예종 아트앤테크놀로지랩

◇남이 안 한 것이 재밌더라

이 교수는 허수아비 외에도 ‘붉은 바람’ ‘레드 아이즈’ 등의 VR 영화를 만들었다. VR 영화는 기기를 착용하고 보면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게 되는 컨텐츠. 이 작품들은 독일 쿠츠 필름 페스티벌, 캐나다 밴쿠버국제영화제 등에서 수상했다.

-VR영화, 메타버스 공연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요.

“옛날부터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는 것들에 관심이 많았어요. 2015년쯤 오큘러스사의 VR기기를 처음 써봤습니다. 써본 순간, 머리가 아닌 몸이 알았달까요. ‘이것이 인류가 꿈꿔왔던 궁극적 스토리텔링이겠구나.’ 이때부터 뛰어들었죠.”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간다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죠.

“저는 남이 한 것을 하기 싫어해요. 예를 들어 우리나라에 천만 영화가 없었다면 천만 영화를 만드는 게 제 목표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천만 영화는 있잖아요?(웃음) 맨 땅에 헤딩하는 걸 좋아해요.”

-타고난 성향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운전할 때도 샛길로 빠지는 걸 좋아해요. ‘길이 어떻게 생겼을까’ ‘저기로 가면 뭐가 나올까’. 하고 싶은 게 너무 많기도 해요. 인생도 세 번 정도 더 살았으면 좋겠어요.”

이 교수의 영화 데뷔작 ‘워리어스 웨이’는 동양 최고의 무사가 서부 사막에서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해 칼을 든다는 내용의 글로벌 합작 영화. 큰 화제를 모았지만, 흥행 성적은 좋지 않았다.

-데뷔작이 어마어마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반지의 제왕’ 제작자 베리 오스본이 참여하게 됐죠. 20억원 규모의 영화가 600억원 규모가 됐어요. 내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투자된) 자본에 대한 책임을 지는 영화를 만드는 과정은 힘들면서도 재미있었죠. 풀 그린스크린 등 아무도 해보지 않은 것을 시도했고.”

-흥행엔 실패했죠.

“욕심이 많았던 것 같아요. 관객 무서운 걸 뼈저리게 느꼈어요.”

◇이어령의 아들로 산다는 것

이 교수는 ‘워리어스 웨이’ 개봉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아버지 이어령 전 장관과 관련한 질문은 사양했다. 영화 감독으로서만 평가받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번 인터뷰에서는 대화 중간중간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왔다.

-문화예술계의 금수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가요? 좋은 환경에서 문화적 자양분을 듬뿍 받고 자란 것은 맞아요. 그런데 어릴 땐 내가 뭘 잘하면 당연한 거고, 못하면 너는 왜 그러냐는 얘기를 들었죠. 유명한 부모의 자식이란 게 자아형성기엔 그렇게 좋은 것 같지 않아요. 제가 장동건 배우에게도 애한테 잘하라고, 남들은 금수저라고 하겠지만 아이는 나름의 고통이 있는 거라고 말한 적 있어요(웃음). 그래도 부모님은 자유를 많이 주는 분들이셨어요. 남들이 안 하는 걸 하고 싶어하는 성향이 부모님 덕분인지도 모르겠네요.”

-청소년기는 어땠나요?

“누님(고 이민아 목사) 영향으로 일찍 록 음악에 눈을 떴어요. ‘중2병’에 걸려서 남들 안 듣는 음악, 안 읽는 책을 좋아했죠. 예술과 기술이 섞인 건축과로 진학하려고 이과로 갔다가 고2 말에 문과로 바꿨어요. 수학을 정말 싫어했거든요. 부모님은 공부 문제로 전혀 스트레스 주지 않으셨어요. ‘하라면 해!’ 같은 말은 들어본 적 없어요. 의견이 다르면 일단 설득해 보시고, 안 되면 결국 자식들 말을 들어주셨죠. 중학생 때 일렉 기타가 너무 갖고 싶어서 일본에 출장 가신 아버님을 졸랐더니 김포공항에 기타를 손에 든 채 해외 순회공연을 마친 악사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셨어요, 하하!”

이 전 장관은 아들이 인문학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이 교수는 영화의 길을 걸었다. 그는 “(아버지와) 같은 길을 갔다면, 아버님은 제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이었을 것”이라며 “다른 길을 간 게 좋았다”고 했다.

-이 전 장관은 과거 인터뷰에서 ‘아들과 영화를 같이 만들어 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아들은 아마 안 하고 싶어할 것’이라고 덧붙이면서.

“엄청 싸울 것 같은데요? 하하. 어쩌면 이미 함께 만들어온 게 아닐까 해요. 제가 하는 메타버스 작업의 핵심은 아날로그의 아톰(atom)과 디지털의 비트(bit)의 만남에 대한 것입니다. 아버님이 15년 전 ‘디지로그(digilog) 선언’에서 예견하신 거죠. 아버님께서 식사 때마다 툭툭 던지는 말씀들이 저에겐 맞춤형 TED(세계적인 지식공유 강연 프로그램)였달까요. 도전하고 창조하는 것의 기쁨, 본인의 창작에 대한 자존감과 엄격함, 특정 장르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성 등을 당신 삶으로 보여주셨죠. 이 모든 게 제 창작에 녹아있다고 생각해요.”

이승무 한예종 교수가 <아무튼, 주말>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아버지처럼 달변이군요.

“아내가 말 좀 그만하라고 해요. 나이 들어서 말이 많아졌다고(웃음). 아버님을 점점 닮아가는 것 같기도 해요. 우리가 인생의 끝이라고 말하는 죽음조차도 뭔가의 시작일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아버님 삶의 태도는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부분입니다.”

-앞으로의 계획은요?

“예술에 도움이 되는 기술과 기술을 견인하는 예술의 융합이라는 작업에 마지막 에너지를 쏟고 싶어요. 그리고 지속 가능한 창작 시스템, 협업을 할 수 있는 창작 생태계를 만드는 게 제 목표예요. 우리나라는 작가들 개인기에 의존하는 경향이 커요. 반면 콘텐츠 시장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픽사나 마블 같은 회사들은 브레인 트러스트나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 체제 등을 통해 지속 가능한 창작 시스템을 만들어왔죠.”

-여러 직함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직함은 무엇인가요.

“크리에이터요. 제 삶의 원칙이 ‘가슴이 뛰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건데, 제게 가슴 뛰는 일은 뭔가를 만드는 일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