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가 풍년인데 민심은 싸늘하다. 지난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가족 문제로 잇달아 사과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재명 후보는 아들의 상습 도박 혐의에 대해, 윤석열 후보는 아내 김건희씨의 경력 부풀리기 의혹과 관련해 사과했다. 하지만 국민 절반은 두 후보의 사과에 대해 ‘충분하지 않다’고 응답했다는 여론 조사 결과가 나왔다. 리얼미터가 YTN 의뢰로 지난 20~21일 1027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두 후보의 사과가 충분했느냐는 질문에 절반 이상이 ‘충분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이 후보의 사과가 충분하지 않다는 응답은 53.6%, 윤 후보의 사과가 충분하지 않다는 답은 59.2%였다.
◇실패한 사과 공식 다 갖췄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경력 기재가 정확하지 않고 논란을 야기하게 된 것 자체만으로 제가 강조해 온 공정과 상식에 맞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윤석열 후보는 지난 17일 예고 없이 기자실을 찾아 아내 김건희씨의 허위 경력 의혹에 대해 사과했다. 의혹이 제기된 지 사흘 만이었다. 전문가들은 “타이밍도, 내용도 실패한 사과”라고 지적했다. 사과의 원칙은 ①무엇이 미안한지 내용이 구체적이어야 하고 ②늦지 않게 제때 ③진정성이 느껴져야 효과가 있다. 하지만 윤 후보는 ①구체적 해명 없이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라고 했고 ②시간을 지체해 논란을 키웠으며 ③진심이 느껴지지 않아 반감을 샀다.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는 페이스북에 “설마 이걸로 끝내지는 않겠지요? 사과에도 정석이 있습니다. 제기된 의혹의 해명과 잘못들의 인정, 깨끗한 사과와 통절한 반성, 그리고 앞으로의 다짐과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고 썼다.
김씨에 대한 의혹은 2007년 수원여대 겸임교수에 지원하면서 제출한 경력증명서에서 ‘한국게임산업협회 기획이사로 3년간 재직했다’는 부분, 2013년 안양대 겸임교원에 지원할 때 ‘대한민국 애니메이션 대상’ 수상을 기재했지만, 실제 수상자 명단에는 김씨가 없었다는 의혹 등이다. 하지만 윤 후보는 어정쩡한 태도를 취해 논란을 키웠다. 15일에는 “대선 후보의 부인이, 결혼 전에 사인의 신분에서 처리한 일이라 하더라도, 미흡하게 처신한 게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선 국민께 송구한 마음을 갖겠다는…”이라며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했고, 16일에는 “어찌됐든간에 십수 년 전에 관행에 따라 했다 하더라도, 현재는 국민에게 요구되는 기준이기 때문에 국민께는 늘 죄송한 마음”이라고 했다. 의혹의 사실관계에 대해선 뚜렷한 설명을 내놓지 않으면서 “미흡하게 처신한 게 있다면” “십수년 전 관행에 따라 했더라도” 같은 표현을 썼다.
◇‘죄송합니다’는 사과가 아니다
‘쿨하게 사과하라’의 저자 김호·정재승은 “사과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미안하다’를 사과의 전부로 착각하는 것”이라며 “‘죄송합니다’는 유감의 표현이지 완전한 사과가 아니다”라고 했다. ‘미안해’ 뒤에 ‘하지만’ ‘다만’ 같은 말을 덧붙이면 역효과만 난다. 예를 들어 ‘미안해. 하지만 네가 약속을 너무 촉박하게 잡았잖아’라는 표현은 사과가 아니라 비난에 가깝다.
윤 후보는 지난 10월에도 ‘전두환 발언’에 대해 사과하면서 소셜미디어에 ‘개에게 사과 주는 사진’을 올려 논란에 휩싸였다. 이후 “국민께서 좀 오해하거나 오해하실 만한 그런 상황을 제가 만들었다면 전부 제 불찰이고 제가 국민께 온전히 질책을 받을 사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다시 사과했다.
사회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아론 라자르에 따르면, 전형적인 ‘반쪽짜리 사과’다. 라자르는 저서 ‘사과에 대하여’에서 “정치인이 범하는 최악의 사과는 ‘만약 그랬다면~, 사과한다’라는 조건부 사과”라며 “책임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재명 후보는 16일 장남 불법 도박 의혹과 관련해 “아비로서 머리 숙여 사과드린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아들이) 치료받을 것”이라고 했다. 본지 보도가 나온 지 4시간 만에 관련 의혹을 시인한 것이다. 논란이 확산되기 전에 빨리 사과한 ‘타이밍’은 윤 후보보다 노련했다. 하지만 이후 불거진 장남의 성매매 의혹에 대해선 “확인을 해봤는데 성매매 사실은 없었다고 한다. 본인이 맹세코 아니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이미 여러 차례 고개를 숙였다. 지난 8월 자신의 음주운전 전력에 대해 “변명의 여지없이 음주운전을 한 사실은 반성하고 사과드린다”고 했고, ‘형수 욕설’ 논란에 대해서도 “제 부족함의 소산”이라고 했다. 민주당이 국민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며 사죄의 큰절까지 했고, 문재인 정부 실정을 두고도 “역사상 가장 취약한 계층을 만들어버린 점에 대해 사과드리고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일단 상황을 피하고 보자는 식의 처세에 가까운 사과”라며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신속한 사과를 지지율 만회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진중권 전 교수는 “양심이 아닌 지지율에 반응한 것”이라고 꼬집었다.
◇오바마의 사과를 보라
커뮤니케이션 전문가인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사과 정치’에 답이 있다”고 했다. 오바마는 위기 때마다 적극적인 사과를 했고, 대중에게 진심으로 전해졌다. 지난 2008년 5월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오바마는 크라이슬러 자동차 생산 공장을 방문 중이었다. 현장에 있던 여기자가 “미국의 자동차 산업 노동자들을 어떻게 도울 생각인가” 질문을 던졌다. 오바마는 “잠시 기다리세요, 스위티(sweetie)”라고 했는데, 이 표현이 문제가 됐다. 스위티는 애인이나 가까운 친구에게 쓰는 말로 성희롱으로도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이었다.
논란이 일자 오바마는 직접 여기자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지 않자 음성녹음기에 메시지를 남겼다. “두 가지 사과할 일이 있어서 전화했어요. 하나는 당신의 질문에 답을 주지 못한 것인데, 무척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두 번째 ‘스위티’라는 표현을 쓴 것에 대해 사과합니다. 이는 저의 나쁜 말버릇일 뿐 비하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이번 실수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내게 전화 한번 달라. 만회할 기회를 만들겠다”고 덧붙였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리고 추후 어떻게 조치를 취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한 좋은 사과의 예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