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협회 유튜브에 결선 비하인드 영상이 올라왔네요. 두고두고 보고 싶어서 브루스 류 장면만 편집했습니다.”
“이 와중에 새로운 기사가 또 떴네요. 프랑스어 기사라 번역기로 돌려 읽었습니다.”
웹소설 작가 제누키사는 지난달 막을 내린 쇼팽 콩쿠르의 열기에 아직 푹 빠져 있다. 우승자인 중국계 캐나다 피아니스트 브루스 류(24)에게 덕통사고(뜻밖에 일어난 교통사고처럼 어떤 일을 계기로 덕후가 된 것을 뜻하는 신조어)를 당했다며 블로그에 ‘사고 일지’까지 공개했다. “본선 2차 때 흥분하기 시작해 3차에서 이성을 잃었네요. 마주르카를 이렇게 재밌게 치는 출전자는 처음 봤고요···.”
올해 6년 만에 열린 제18회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전 세계 수많은 ‘쇼콩 덕후’를 양산했다. 1927년부터 5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는 마우리치오 폴리니(1960년), 마르타 아르헤리치(1965년), 크리스티안 지메르만(1975년) 등을 배출한 피아노 거장의 산실. 직전 대회 우승자(2015년)가 한국의 조성진이다. 이번 대회는 코로나 때문에 1년 미뤄진 데다 예선을 비롯한 전 과정이 쇼팽 콩쿠르 모바일 앱과 유튜브로 생중계돼 오랫동안 기다려온 마니아들을 실시간으로 사로잡았다. 바야흐로 ‘방구석 콩쿠르 덕후’의 시대가 열렸다.
◇1초에 22개 댓글이 쏟아져 내렸다
‘결과의 예술’인 콩쿠르가 과정을 함께 즐기는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한 건 무엇보다 소셜 미디어의 힘! 쇼팽협회에 따르면, 참가자 45명이 연주한 본선 2차 영상만 730만 유튜브 조회 수를 기록했다. 87명이 연주한 본선 1차 영상은 530만, 예선은 약 400만명이 시청했다. 채팅창에는 초당 평균 22개의 댓글이 쏟아졌다. 협회는 “실시간 조회 수 1위는 일본(45.5%)이었고, 그다음 한국·폴란드·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다”고 밝혔다. 피아니스트 김주영씨는 “콩쿠르가 한정된 공간에서 폐쇄적으로 진행되던 과거와 달리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공개되기 때문에 압박감을 느끼는 참가자도 있겠지만, 솔직하게 자기 모습을 보여준다는 생각으로 연주에 임한 사람들에게 좋은 결과가 온 것 같다”고 했다.
경연 과정을 보면서 페이스북에 즉각 감상평을 올리는 풍경도 새로운 콩쿠르 문화로 정착했다. 전문가들은 “밤새우며 인터넷 생중계를 보는 마니아들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올해는 클래식에 관심 없던 이들까지 대거 덕질에 동참한 것이 특이한 현상”이라고 꼽았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는 “올해 쇼팽 콩쿠르의 유튜브 실황 중계는 최고 수준”이라며 “다른 국제 콩쿠르도 실시간 중계를 하지만 쇼팽 콩쿠르의 영상과 음향을 따라갈 수 없다”고 했다.
콩쿠르 중계의 역사가 곧 미디어 변천사다. 쇼팽 콩쿠르는 1927년 1회 대회 때 라디오 중계를 시작해 1955년 5회 때부터 폴란드 국내 TV로 방영하기 시작했다. 2010년 16회 대회에서 처음 인터넷 중계가 시작됐고, 5년 뒤인 17회 대회부터 소셜미디어를 본격 활용했다.
쇼팽협회는 올해 처음으로 콩쿠르 모바일 앱을 내놨고, 페이스북 계정은 영어·폴란드어·한국어·일본어 등 6개 국어로 운영하며 그날의 일정과 현장 사진을 공개했다. 인스타그램·틱톡에선 참가자들의 무대 뒤 모습 등 날것의 영상이 계속 올라왔다. 유튜브 시청이 불가능한 중국 팬들을 위해 웨이보로도 생중계했다. 회사원 김새롬(32)씨는 “예선부터 본선까지 참가자들의 영상을 다 챙겨봤고, 결선이 열린 사흘간은 아예 휴가를 내고 밤을 새웠다”며 “내가 찜한 연주자들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 지켜보는 게 ‘오징어 게임’보다 더 흥미진진했다”고 했다.
◇“새로운 스타 탄생, 직접 목격하고파”
송현민 음악 평론가는 “2015년 조성진이라는 수퍼스타의 탄생을 최종 결과로만 접했던 MZ세대가 이번엔 그 과정에 직접 뛰어들면서 새로운 스타 탄생을 목격하려는 심리가 작용한 것”이라고 꼽았다. 콩쿠르가 진행되는 내내 6년 전 조성진의 연주 실황이 역주행한 것도 독특한 현상. 소셜미디어에선 “올해 참가자들 수준과 비교가 안 된다” “콩쿠르의 교본이라 할 정도로 무결점 연주”라는 평이 올라왔다. 허명현씨는 “2015년 조성진의 연주는 피아노를 다루는 기술 자체가 워낙 압도적이었고, 완벽에 가까운 연주라서 다시 한번 회자되는 것 같다”고 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공연 무대가 사라진 탓에 청중이 온라인으로 연주를 보고 듣는 데 익숙해진 것도 이유다. 송 평론가는 “예전엔 공연을 보는 관람객들이 자기 감정과 느낌을 표현하는 방법이 박수밖에 없었다면 코로나로 영상 중계가 활발해지면서 연주 중간에 댓글로 소통하는 문화가 생겼다”며 “코로나 시대 공연 문화가 콩쿠르에도 통한 것”이라고 봤다.
콩쿠르 덕후들은 “이 대회 하나만을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고, 자신의 모든 걸 쏟아부어 연주하는 참가자들 모습에 반했다”고 입을 모은다. 조성진은 2015년 대회를 앞두고 휴대폰을 없애고 카톡과 문자도 끊었다. 일찌감치 출전을 선언한 뒤 9개월간 쇼팽만 연주하며 “쇼팽처럼 살았다”고 했다. 제누키사는 “인생의 관록이 묻어나는 대가들의 연주도 좋지만, 콩쿠르에 도전하는 젊은 연주자들의 간절함에서 팔팔 뛰는 에너지를 받는다.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해 포텐(잠재력)을 터뜨리는 도전자들의 무대가 바로 콩쿠르”라고 했다.
전 세계 16~30세의 연주자들이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오로지 쇼팽의 곡으로만 실력을 겨루는 것도 이 콩쿠르의 매력이다. 대학원생 남모(26)씨는 “같은 곡을 연주자마다 어떻게 해석하는지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비교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고 했고, 주부 서유리(40)씨는 “참가자 밀착 중계로, 도전자들이 경연 직전에 떨고, 땀 흘리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계속 응원하게 됐다”고 했다.
◇의대생에 공대 출신도.. 흥행 코드 많았다
올해 본선에 오른 87명 중 독특한 이력과 개성을 가진 연주자가 많았던 것도 흥행 요소로 꼽힌다. 특히 일본인 비전공 참가자 두 명이 화제가 됐다. 나고야 의대생 사와다 소고(23)는 2차까지 진출했고, 도쿄대 공대 대학원에 재학 중인 수미노 하야토(26)는 3차까지 올랐다. 수미노는 87만 구독자를 보유한 인기 유튜버. 이번 대회에 일본인 시청자가 유독 많았던 것도 두 사람이 예선부터 흥행을 견인했기 때문이다.
이야깃거리도 풍성했다. 이 대회 우승자(1980년)이자 올해 심사위원 중 한 명인 베트남 피아니스트 당 타이손은 자타 공인 ‘쇼팽 콩쿠르 일타 강사’로 등극했다. 우승자인 브루스 류와 6위 제이제이 준리 부이가 그의 제자다. 물 밑에선 ‘피아노들의 경연’도 펼쳐졌다. 본선 참가자들은 스타인웨이, 야마하, 파치올리, 시게루 가와이 중에서 자신이 연주할 피아노를 직접 고를 수 있다. 연주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피아노는 독일 스타인웨이. 올해도 본선 87명 중 64명이 스타인웨이를 선택했다. 지난 대회에서 압도적이었던 일본 야마하는 올해 결선 무대에서 종적을 감췄고, 이탈리아 파치올리는 브루스 류의 선택을 받으면서 쇼팽 콩쿠르 우승의 기쁨을 처음 만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