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정동은 한국에서 근대 문화가 태동한 시작점이다. 1883년 미국 공사관이 처음 들어선 이후 각국 공관이 연이어 세워진 ‘외교 타운’이었고, 서양식 학교와 교회가 모여있던 근대 서양 문화의 저수지였다. 이 때문에 근대 시기 정동을 말할 때 흔히 건축물을 떠올리지만, 이곳에서 서양음악 선율이 처음으로 울려퍼졌다는 사실은 잊혔다.
가을 한낮, 정동 거리에서 120여 년 전 불렸던 근대 악곡의 선율이 되살아났다. 지난달 13일 낮 12시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야외마당.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 성악가들이 무대에 올랐다. 우리나라 감리교 최초의 찬송가집인 ‘찬미가’에 실렸던 노래 등 초창기 찬송가들이 풍금 반주에 맞춰 울려 퍼졌다. 점심시간에 바쁘게 이동하던 직장인들, 커피잔을 손에 들고 산책하던 이들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바로 이곳, 배재학당이 있었던 정동에서 근대음악의 시작을 알리는 노래들이 퍼져나왔지요. 여러분은 지금 역사의 현장에 계시는 겁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4개월간 펼친 이 프로젝트의 이름은 ‘음악을 통해 본 정동’. 근대음악 전문가인 민경찬(64)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학과 교수가 복원한 악보를 바탕으로 근대기 정동 일대에서 울려퍼진 곡들을 음악인들이 직접 노래하고 연주했다. 국가(國歌), 종교, 학교로 주제를 나눠 총 네 차례 음악회를 열었고, 공연 후엔 근대건축 전문가인 김종헌(59) 배재학당박물관장의 안내로 음악의 발원지인 정동 일대 건축물 현장을 답사했다. 근대 음악과 근대 건축이 만나 정동의 가치와 의미를 재발견한다는 취지. ‘근대’라는 이름으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을 정동에서 만났다.
-근대 음악을 복원해 무대에 올린 첫 행사다. 어떻게 시작했나.
김종헌(이하 김): “근대 시기 정동을 서양 공사관 거리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정동은 덕수궁 등 우리 전통문화가 서양문화와 만난 접점이자 새로운 문화가 뒤섞이고 꿈틀거린 용광로였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각국 공사관이 모이면서 사람들이 만나 생각을 교류하고 소통이 이루어졌다. 특히 근대음악이 처음 울려퍼진 곳인데 그동안 정동을 논의할 때 음악이 빠져 있었다.”
민경찬(이하 민): “김 관장이 먼저 정동과 음악이라는 주제로 음악회를 해줄 수 있겠냐고 제안을 해서 너무 기뻤다. 평생 근대음악 연구에 매진하면서 복원한 악보들이 있었고, 이를 무대에 올리고픈 바람이 컸다. 우리가 지금 향유하는 음악은 거의 근대에서 왔는데 제도권에서는 연구도 제대로 안 한다. 음악대학에서도 서양음악사를 가르치지만 근대음악사는 커리큘럼에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왜곡도 많고, 전공자들도 내용을 잘 모른다.”
-첫 공연 주제가 ‘국가(國歌)’였다.
민: “한국의 근대음악은 능동적으로 서양음악을 받아들인 결과물인데 대부분 국가나 찬송가였다. 정동에 외국 공관이 생겨나면서 각국 국가가 연주됐고, 이 국가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붙이면서 나중에 찬송가나 창가가 된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가 뭔지 아시나. 1902년 대한제국 양악대장을 지낸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작곡한 대한제국 애국가다. 대한제국 선포 이후 국가 상징물로 애국가의 필요성을 느낀 고종의 명으로 작곡했다. 요즘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와 달리 “상제(上帝)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라는 가사가 주요 내용인데, 영국 국가 ‘신이여 여왕을 보호하소서’를 연상시킨다.”
-대한제국 애국가를 직접 복원했는데.
민: “에케르트는 우리 민요 ‘바람이 분다’라는 노래를 바탕으로 작곡을 했다. 당시 헐버트가 채보했고, 에케르트가 작곡한 관악 합주보가 남아있다. 가사는 별도로 남아있었는데, 어떤 음 밑에 어떤 가사가 붙는지는 알 수 없었다. 가사가 인쇄된 게 1902년이다. 띄어쓰기도 없고 그때 쓰던 한글이라 해독이 쉽지 않았다. 신문·잡지 등 당시 자료를 찾아가면서 밥 먹고 그것만 연구했는데도 이 한 곡 복원에 7년이 걸렸다.”
대한제국 애국가는 일제강점기 기미가요를 부르도록 강요받으며 금지곡이 된다. 민 교수는 “놀라운 건 해외에서 독립운동가로 개사돼 계속 불렸다는 거다. 해외 독립운동 현장에서 발견된 악보들을 보면 종이 질도 안 좋고 글씨도 막 날려써서 눈물이 나온다”며 “선율과 가사는 조금씩 바뀌었다.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에서 ‘우리 대한을 도우소서’ 하는 식이다. 하와이 버전, 만주 버전 등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고 했다.
민 교수는 서울대 작곡과를 졸업하고 일본 도쿄예술대에서 음악학 석사를 마쳤다. 한국의 근대에 관심을 갖게 됐고, 우리나라 근현대음악의 출발 지점인 대한제국 시기의 음악 복원에 매달렸다. 30년 넘게 복원한 노래가 1000곡이 넘는다. 정동제일교회, 새문안교회, 성공회 성당, 구세군 교회 등에서 신자들이 불렀던 찬송가,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학생들이 직접 만든 찬송가 등이다. 그는 “근대 시기 정동에서 불린 음악이 흥미로운 건 전문가가 없는 상황에서 민중들이 노래 가사를 직접 만들어 불렀다는 것”이라고 했다.
김종헌 관장은 고려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교통 건축의 변천’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면서 근대에 처음 발을 들였다. “유럽에선 철도역이 19세기의 상징이지만 우리는 일제에 의해 간소화돼 있어서 쓸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연구하다 보니 철도역사(驛史)가 결국 사회사와 연결되는 게 재미있었다”고 했다. 지난 2002년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건립 당시 덕수궁 영역에 대한 지표조사에 참여하면서 정동과의 운명적 만남이 이뤄졌다. 지표조사를 통해 이 지역이 덕수궁 선원전(역대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던 전각) 터임을 처음 밝혀낸 학자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장으로 재직하면서 정동과 배재학당에 대해 연구 조사를 많이 했다.
김: “와서 보니 배재학당이 엄청난 곳이더라. 당시 우리 교육은 논어·맹자 등 동양 사상을 기반으로 왕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 간 관계에 대한 공부였는데, 아펜젤러가 첫 서양식 근대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을 설립하고 천문·물리·음악·미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국 문화를 기반으로 기독교·서양 문화를 유입해 이승만·여운형 같은 인재를 길러낸 거다.”
-’정동에서 살았던 외국인들’ 같은 행사도 여럿 기획했다.
김: “자료를 찾기 어려울 때 결국 사람을 추적하면 길이 보였다. 정동에 살았던 최초의 서양인인 초대 주한 미국공사 푸트, 한국 도자기를 사랑했던 플랑시 공사, 천의 얼굴을 갖고 정동을 누빈 알렌…. 역사는 역시 사람이 만드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동은 공사관 거리나 건물이 전부가 아니라 이곳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모여서 어떤 교류가 있었는지를 추적하는 게 정동의 원래 모습을 복원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하지만 결국 일제에 의해 실패한 역사 아닌가.
“일제강점기라는 시련이 있었지만, 한 번 실패했다고 해서 영원히 실패한 건 아니다. 2005년 미국 MIT에 교환교수로 갔었는데 거기엔 실패한 과학만 연구하는 모임이 있다. 실패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시기가 안 맞거나 경제적인 힘이 모자라거나 어느 한 요소만 바꾸면 성공 확률이 높은 게 사실은 실패한 과학이라는 거다. 우리도 식민 지배를 받았다는 역사를 무조건 지우려하기 보다, 어떤 부분이 왜 실패했는지 면밀하게 보면 다시 끓는점을 찾을 수 있고 그 장소가 바로 정동이라고 생각했다.”
김 관장은 지난 2018년 문을 연 워싱턴 주미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 복원을 총괄했다. 공사 기간 2년간 워싱턴에 머무르며 감독한 그는 “단순히 건물 한 채를 복원하는 걸 넘어서 잊힌 역사를 불러온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사진, 신문 기사 등 각종 사료를 발굴하면서 건물을 복원하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김: “130년 전, 외교로 돌파구를 찾아야 할 시기에 미국 땅을 밟은 공관원의 심정을 상상했다. 문짝을 한 켜 한 켜 벗겨냈더니 페인트 13겹이 칠해져 있더라. 사료를 찾고 하나씩 복원해가는 어려움도 컸지만, 양국 간 행정 시스템의 차이, 공사 압박에서 오는 현실적 문제가 더 컸다. 스트레스가 심해 회의 중 쓰러져 조지타운 대학병원 응급실에 실려간 일도 있다. 갑자기 누가 등을 도끼로 내려치는 것처럼 극심한 통증을 느꼈는데, 한국에 돌아온 후에야 대동맥 박리였다는 걸 알게 됐다. 작년에는 뇌동맥류가 발견돼 큰 수술도 받았다. 개인적으로는 시련을 겪었지만, 서양에 설치된 우리나라 첫 공관을 복원하면서 대한민국 근대사를 회복한다는 보람이 더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