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주말] 식객 고수 김진영 MD와 떠난 예산&춘천 오일장 여행

깨끗하게 손질된 채소도, 싱싱한 생선회마저도 ‘프레시’ ‘새벽 배송’이란 꼬리표를 달고 현관문 앞까지 배송되는 시대에 굳이 전국 오일장을 찾아다니는 남자가 있다. 내로라 하는 셰프들 사이 ‘식재료의 대가(大家)’로 통하는 김진영 MD(상품기획자·50)’. 만화 ‘식객’의 허영만조차 “식재료에 대한 전문가라고 자부하는 나도 김진영 앞에서는 입을 닫는다”고 할 정도로 ‘강호의 고수’로 알려진 그는 만화 ‘식객2′ 속 ‘흑돼지고기 에피소드’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 3년간 전국 60여 개 장터를 찾아다닌 이야기를 묶어 ‘오는 날이 장날입니다’(상상출판)를 펴낸 26년차 식재료 전문가이자 ‘여행자의 식탁’ 대표 김진영 MD와 식재료 탐험을 떠났다. 가을과 겨울 사이 계절 냄새, 사람 냄새 가득한 오일장으로.

예산오일장이 열린 지난 10일, '식재료 고수' 김진영 MD(오른쪽)가 상가 천막 밑에 좌판을 펼친 노인을 찾아가 토종 팥을 구입했다. 노인은 "이 귀한 팥을 어떻게 알아봤느냐?"며 팥 5000원어치를 봉지에 담아 건넸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김장場 펼쳐진 예산오일장

“동치미 헐 때, 사과를 넣고 허데~ 큼직하게 쓸어서 느면 빛깔도 곱고 맛도 있지. 근디 날이 따뜻허면 사과도 빨리 쉬어서 쉬기 전에 끄내야 혀.” “난 사과 대신 뻘건 피망을 느니 괜찮드라구~.” “에이, 피망은 익으면서 물이 탁해져서 안뒤야~ 사과로 혀야 깔끔허지.”

지난 10일 우중(雨中) 오일장으로 펼쳐진 예산오일장의 ‘마상굴농원’ 사과 좌판 앞. 사과를 고르던 60~70대 노인들 사이에 때아닌 ‘동치미 만담’이 펼쳐졌다. “동치미에 넣어 먹으면 아삭아삭하니 맛있다”던 예산사과는 만담 덕분인지 동치미 주인공인 무보다 더 빠르게 팔려나가는 분위기. 근처 좌판엔 ‘아기 사과’가 가지째 나와 있었다. 아기 주먹보다 더 작은 빨간 사과가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린 게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품 같다. “이건 씨 사과여~” 하는 상인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자 곁에 있던 한 남자가 설명을 거든다. “수분(受粉)용 사과예요. 홍로, 부사 꽃보다 일찍 꽃을 피워 벌을 유인하기 위해 심는 사과라고 해서 ‘씨 사과’라 불리죠.” 마트에서 투명 팩에 담겨 말끔한 상태로 만나던 아기 사과의 ‘출생의 비밀’을 알려준 남자, 김진영 MD다.

'예산사과'로 유명한 예산군 예산오일장에선 '아기 사과'를 가지째 판다. '씨 사과'라 불리는 아기 사과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품 같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1995년, 입맛 까다로운 강남 주부들이 시장 대신 찾는다던 뉴코아백화점 식품 구매 담당자로 시작해 친환경 식품 브랜드 ‘초록마을’, ‘쿠팡’ 온·오프라인 마켓의 식품 팀장으로 일해온 그는 발굴해 소개한 아이템마다 ‘완판’ 행진을 이어갔던 식재료 전문가. 이제는 유명해진 ‘버크셔 돼지’ 품종을 알린 이도 김진영이다. “지난 3년간 전국의 오일장을 찾아다녔다”는 그에게 이번 예산오일장은 작년 가을에 이어 올해 다시 방문한 장터. “계절을 느끼고 현지 생산자들 만나는 데 오일장만 한 곳은 없죠. 장이 그새 김장 장(場)으로 바뀌었네요. 작년 10월에 방문했을 땐 햇것이 차고 넘치는 분위기였는데.”

예산오일장은 충남 예산군 예산읍 ‘예산시장’ 주차장과 공터 일대에 매달 5·0일이 낀 날에 서는, 예산 최대 오일장. 1926년 개설돼 어느덧 개장 100년을 앞두고 있다. 예산시장 상인번영회 측에 따르면 11월 현재 90여 팀이 ‘장세’(오일장 참가비)를 내고 참가하고 있다. 비가 오는 와중에도 이날 오일장은 김장 재료를 찾아나선 이들로 북적였다. ‘광천 혜경이네 젓갈’에선 육젓, 오젓 등 김장용 젓갈들이 쉴 새 없이 팔려나갔다. 어물전에선 꽃게와 생새우가 인기였다. 빗방울이 굵어지자 한쪽에선 일찌감치 “떨이!”를 외쳤다. 김 MD는 “이런 날씨는 오후 서너 시만 돼도 파장 분위기”라며 부지런히 식재료 탐색에 나섰다.

지난 10일 예산오일장 젓갈 맛집인 '광천 혜경이네 젓갈' 주인이 육젓을 들어보이며 웃었다. "광천에서도 젓갈 가게를 크게 한다"는 주인은 "김장을 앞둔 '대목'에는 오일장이 재미가 좋다"고 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그 남자의 식재료 사냥법

김진영 MD의 걸음이 멈춘 곳은 버섯 좌판. 이것저것 향을 맡아보던 그는 ‘참나무 표고버섯’이란 이름표를 단 바구니를 가리키며 “봄·가을 오일장에서 발견하면 꼭 사야 할 것 중 하나”라고 했다. ‘원목 표고버섯’이었다. “표고버섯 재배는 배지 재배 방식과 원목 재배 방식 두 가지가 있는데 원목 재배 방식은 절단한 참나무에 구멍을 뚫어 버섯 씨균을 접종해 햇빛이 들지 않는 곳에 두고 1년 6개월 정도를 기다려야 수확할 수 있어요. 1년 내내 수확하는 배지 재배보다 시간과 정성이 들어가 훨씬 비쌀 것 같지만 가격 면에선 큰 차이 안 나죠. 표고는 향을 먹는 버섯이니, 이왕이면 향이 진한 원목 표고버섯을 선택합니다.”

김진영 MD가 예산오일장에서 고른 '원목 표고버섯'. 참나무 원목에서 재배해 향이 깊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김 MD는 상점 천막 밑 좌판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춰 팥 5000원어치를 샀다. “여긴 국산 팥을 파는 곳이에요. 토종 팥은 적색만 있는 게 아니라 녹색, 황색, 검은색 등 다양해요. 예팥(이팥), 흰팥, 검은팥 이름도 다르고요. 개량 팥보다 구수하고 향도 좋습니다.” 오일장을 찾아다니는 이유에 대해 그는 “식재료는 궁극적으로 향과 맛을 내기 위한 것이니 당연히 직접 향과 맛을 확인하고 고를 수 있는 장터를 찾는 것”이라고 했다. “예쁘게 포장돼 백화점과 마트에 놓이는 식재료들은 향이나 맛을 알 수 없지만, 오일장에선 싱싱한 무, 버섯 하나도 직접 향을 맡아보거나 시식해보고 살 수 있으니까요. 장보기에 성공하려면 오일장 방문 전 해당 지역의 제철 식재료가 무엇인지 알아보는 노력이 필요해요.”

서해와 비교적 가까이 있는 예산오일장에서는 생새우, 꽃게, 굴 등 싱싱한 제철 수산물도 인기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반나절 장터를 구경하니 슬슬 출출해졌다. 김진영 MD는 장터를 두리번거리더니 “오늘은 ‘떡 할머니’가 안 나왔네요” 하며 아쉬워한다. “오일장 열릴 때만 나오시는 떡 할머니가 계세요. 밥알이 씹히는 식감도 특이하고 씹을수록 구수한 맛이 나죠. 처음엔 호기심에 1000원어치만 샀는데 ‘더 살 걸’ 하고 후회했답니다.”

예산오일장 주변엔 ‘백종원 국밥 거리’와 ‘국수 거리’가 있다. 예산 출신인 외식 사업가이자 방송인 백종원의 이름을 내세운 국밥 거리에선 암소 내장탕, 소머리국밥 등을 판다. 국숫집들은 예산시장 부근 70여 년 전통의 제면소 ‘쌍송국수 1호점’을 중심으로 늘어서 있다. 국수 한 그릇에 단돈 4000원. 쌀쌀한 날씨에 뜨끈한 국물 마시며 한 끼 해결하기 좋다.

예산오일장 부근 '추사 고택'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민 감이 소담하다. 장터에서 차로 20~30분 거리에 있지만 지나치기에 아쉬운 곳이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오일장만 보고 가기 아쉽다면 주변 여행을 겸해도 좋다. 1980~90년대 간판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예산시장을 비롯해 ‘수덕사’, ‘예당호 출렁다리’ 등 예산을 대표하는 여행지가 예산오일장에서 차로 20~30분 거리에 있다. 신암면 ‘추사 고택’은 시끌벅적한 장터에서 벗어나 고즈넉한 운치를 느끼기에 좋다. 고택에서 북쪽으로 600m쯤 올라가면 추사 김정희 선생이 심었다는 천연기념물 백송도 만날 수 있다.

경춘선 남춘천역 부근 온의동에서 매달 2, 7이 낀 날 열리는 '춘천풍물오일장'.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 벽화가 그려진 기둥을 중심으로 가을의 수확물들이 장을 가득 채웠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막장’ 사고, ‘메밀찌끄미’ 먹방

매달 2·7일로 끝나는 날, 남춘천역 부근 온의동 철길 고가 아래에서는 춘천풍물오일장이 열린다. 김진영 MD는 “춘천풍물오일장은 양평오일장과 함께 서울에서도 경춘선이나 경의중앙선을 타고 오가기가 편해 반나절 식재료 여행을 떠나볼 만한 곳”이라고 소개했다. “춘천풍물오일장에는 ‘선수’(오일장만 찾아다니는 전문 상인)들도 많지만, 직접 기르거나 캔 토란이나 토란대, 더덕 등을 가지고 나와 그 자리에서 손질해주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어우러져 옛 오일장 풍경이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아요.”

지난 12일 열린 춘천풍물오일장은 모처럼 시끌벅적했다. 6월에는 진한 향 풍기는 춘천 토마토가 유명하지만, 요즘 같은 계절엔 강원도 화천, 양구에서 수확한 사과를 안 살 수가 없단다. 김 MD는 “강원도식 막장도 장바구니에 담아야 할 아이템”이라고 추천했다. “특히 간장과 된장을 가를 때 간장을 뺀 강원도 된장은 색깔이 검은빛을 띠는데 짠맛이 강해도 감칠맛이 유난히 좋습니다. 달고도 짠 맛이 있어서 쌈장 만들기에 좋고, 칼국수 끓일 때 장을 풀어 넣으면 천하일미가 따로 없지요.”

춘천이 낳은 소설가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 벽화가 그려진 고가 기둥을 사이에 두고 홍천 인삼, 소양강 찰토마토, 대관령 배추 등이 사이 좋게 자리한 춘천풍물오일장은 예산오일장에 비해 구경거리가 풍부한 편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잡숴 봐”를 외치며 종이컵에 차(茶)를 건네는 약재 상인부터 시선만 마주쳐도 사과를 깎아주는 과일 상인까지 장터 곳곳이 시식 천국이다.

춘천풍물오일장에서는 옛날 방식으로 구워내는 '옛날 호떡'이 인기다. 연식이 느껴지는 틀에 2개씩만 구워내는 호떡은 재료가 금방 소진돼 늦은 오후 찾는다면 맛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장을 돌며 간단히 허기를 채워줄 주전부리를 맛보는 것도 오일장 탐험의 재미. 도넛, 어묵, 뻥튀기, 옥수수 등 ‘오일장 주전부리 4종 세트’ 외에 호떡을 놓칠 수 없다. “기름에 지글지글 튀겨내는 호떡은 어디서나 먹을 수 있어도, 옛날 호떡 틀에 구워내는 찹쌀 호떡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다”며 김진영 MD가 소개한 곳은 ‘옛날 호떡’(10동-59호)집. 20대 커플부터 80대 노인까지 반달처럼 하얀 호떡을 호호 불며 먹는 ‘세대공감 먹방’ 풍경이 재미있다. 연식을 가늠케 하는 시커먼 무쇠 호떡 틀에 딱 2개씩만 구워내는 호떡을 맛보려면 줄 서는 건 기본이다. 장터 안쪽으로 조금 더 걸어가면 나오는 식당 ‘풀내음’에선 ‘메밀찌끄미’를 부쳐낸다. 메밀전병을 부치고 남은 재료들을 빈대떡처럼 부친 것. 주인 조돈례(75)씨는 “남은 ‘찌꺼기’로 만든 부침개라고 하기엔 좀 그래서 ‘찌끄미’라 부른다”며 웃었다.

춘천풍물오일장이 열리는 날 '풀내음' 식당을 찾아가면 각종 '부꾸미'를 만들고 남은 재료로 부쳐낸 '메밀찌끄미'를 맛볼 수 있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춘천풍물오일장 채소 좌판의 생산지 표지판. '모두 다 국내산'이라는 손글씨에 괜히 믿음이 간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장터 구경은 반나절이면 충분하다. 아련한 옛 풍경 남아있는 ‘육림고개’나 ‘의암호’가 오일장에서 차로 10~20분 거리에 있어 간 김에 둘러보면 알차다. 지난 10월부터 의암호 위로는 ‘삼악산 케이블카’가 오간다. 김진영 MD는 “여행을 계획할 때 장날에 맞춰 코스를 짜면 계절을 좀 더 오롯이 느낄 수 있고 맛에도 깊이가 더해진다”면서 “청송·봉화·영덕 사과와 우엉, 토란대가 넘쳐나는 경북 ‘안동장’이나 전북 군산 ‘대야장’도 가을에 꼭 가볼 만하다”고 추천했다. “참, 군산 대야장에 간다면 술 지게미에서 숙성한 단무지를 꼭 사세요! 그 단무지 하나만 넣고 김밥을 싸도 맛이 아주 기가 막힐 겁니다.”

[ 예산장 가면 삽교 ‘얼큰 소머리국밥’, 춘천장 가면 ‘시래기 장칼국수’ ]

김진영 MD 의 오일장 주변 맛집

김진영 MD가 충남 예산에 가게 되면 굳이 찾아가 먹는다는 삽교 '한일식당'의 소머리국밥. 육개장처럼 뻘건 국물이 매콤한 듯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한옥을 셀프 인테리어 해 카페로 꾸민 '삽교 커피 클래식'. 소머리국밥 맛집 '한일식당' 부근에 있다. 카페 분위기는 지역 주민의 '사랑방'같다. /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오일장 주변엔 반드시 맛집이 있다’. 한식 식재료 전문가 김진영 MD가 말하는 오일장의 법칙이다. 충남 예산군 ‘예산오일장’(5·0일) 주변엔 편히 먹을 장터 국밥집이 여러 곳 있지만, 김 MD는 굳이 차로 20분을 달려 삽교읍에 있는 70여 년 전통의 소머리국밥 전문점 한일식당을 찾는다. 식당 입구, 소머리 고기를 팔팔 끓여내는 커다란 무쇠 솥부터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진다. 육개장을 연상케 하는 뻘건 국물의 소머리국밥(1만원)이 유명하다. 국물이 매콤한 듯하면서도 자극적이지 않다. 담백한 국물 맛을 원할 경우 ‘맑은 국물’로도 주문할 수 있다. 김 MD는 식사 후 한일식당 근처 카페 ‘삽교 커피 클래식’에 들러 커피 한잔하는 코스를 좋아한단다.

강원도 남춘천역 ‘춘천풍물오일장’(2·7일) 부근 사농동 옛날손장칼국수는 직접 담근 막장과 시래기를 넣고 끓인 장칼국수(7000원)가 맛있다. 김 MD는 “막장과 시래기 조합이 봄철 바지락의 감칠맛과 견주어 뒤지지 않는다”고 표현했다. ‘춘천’ 하면 막국수지만 이 집 장칼국수를 맛보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고.

충남 부여오일장(5·0일)이 열리는 날엔 부여 읍내 정림사지 부근 표고농부네 김밥을 먹으러 가자. 원목 표고버섯 재배를 하는 농부가 운영하는 곳으로 향 진한 표고버섯을 넣은 ‘버섯 김밥’(3500원)을 선보인다. 간장에 볶은 표고버섯과 함께 당근, 달걀 지단이 듬뿍 들어간다. 매운 표고버섯 김밥(3500원), 멜론장아찌 김밥(3500원) 등도 있다.

짬뽕이 유명한 전북 군산에서도 대야면 ‘대야장’까지 갔다면 수송동 홍윤 베이커리의 짬뽕 빵(2500원)을 맛볼 것. 김진영 MD는 “우리 쌀과 보리로 만든 빵도 유명하지만, 짬뽕 빵이 그만”이라고 했다. 짬뽕 소를 감싸 안은 빵은 예상처럼 매콤하고 짭조름한 맛이 난다. “담백한 우유나 달콤한 요구르트와 먹으면 ‘꿀 조합’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