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문재인), “30년 맞벌이 부부로 살면서 단 한 번도 ‘밥 줘’란 말을 해본 적이 없다”(안철수), “나는 모태 페미니스트”(유승민).
지난 2017년 대선에서 후보들은 여성 유권자들의 표심을 잡기 위해 눈물겨운 사투를 벌였다. 당시는 2016년 강남역 살인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젠더 이슈가 크게 부각되고, 2030 여성들의 사회적 목소리가 커졌을 때였다. 4년여가 흐른 지금,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는 ‘광기의 페미니즘을 멈춰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페이스북에서 공유했고, 국민의힘 윤석열 후보는 공개 석상에서 저출산의 원인에 대해 “페미니즘이라는 게 너무 정치적으로 악용됐다더라”고 발언했다. 현재 주요 대선 후보들은 페미니즘에 거리를 두면서 ‘이대남(20대 남성)’ 표심 잡기에 혈안이다.
◇“李·尹 싫다”는 2030 女心
“진심으로 제3의 후보를 찾는 중이에요.” 지난해 쌍둥이를 출산한 37세 여성 김모씨는 “아기를 키우는 입장에서 출산·육아에 관심이 큰데 이재명·윤석열 후보는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또 (두 후보가) 일상적인 성차별, 성폭력 등의 문제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김씨처럼 주요 대선 후보들이 여성의 삶, 여성의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두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는 2030 여성들이 적지 않다. 투표권을 갖게 된 이후 빠짐없이 선거에 참여했다는 회사원 심모(30)씨는 이번 대선에는 기권을 할 수도 있다고 했다. 심씨는 “여성으로서 사는 게 무섭지 않도록, 나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대통령을 뽑고 싶은데 지금 후보 중엔 (그런 후보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16일 한 여초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너네 대선 때 누구 뽑을지 정했어?’란 글이 올라왔는데, ‘무효표 던질 예정’ ‘제3당 공약 보고 아니다 싶음 그냥 기권표’ ‘진짜 둘 다 싫은데 파란당(민주당) 안 뽑으면 윤(석열) 될 것 같아서’ ‘이재명은 죽어도 안 되겠어서 방어표 던지려고’ 등의 댓글이 쇄도했다. 대학생 페미니즘 연합동아리 ‘모두의페미니즘’이 최근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후보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 ‘여성 정책을 빼먹을 거면 여성(으로부터) 세금을 걷지 말라’ ‘너무 수준 떨어지는 짓은 좀 안 해주셨으면’ 등이 제안됐고, ‘대선판에서 가장 화나는 것’으론 ‘국민의 반을 놔두고 남초 커뮤니티에나 귀 기울이는 정치인들’ 등의 응답이 나왔다.
2030 여성 유권자들의 고민 섞인 표심은 여론조사에서도 나타난다. 리서치뷰가 8일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내년 대선 가상 양자 대결(이재명·윤석열)에서 ‘지지하는 후보가 없거나 모른다’고 답한 부동층 20대(18·19세 포함) 여성은 29%, 30대 여성은 12%였다. 이 조사에서 부동층 전체 평균은 8%였다. 같은 날 발표된 리얼미터 조사에서 부동층 20대 여성은 17.1%, 30대 여성은 15.3%였다(전체 평균 8.6%).
◇2017년엔 패션, 지금은 골칫덩이?
2030 여심 이반의 원인으로는 우선 이재명·윤석열 후보의 마초 이미지가 꼽힌다. 이 후보의 여배우 스캔들, 형수 욕설 논란 등은 여성 유권자의 등을 돌리게 했다. 취업 준비생 이모(27)씨는 “유튜브에서 이재명 후보의 형수 욕설을 들었다. 도저히 찍을 수 없겠더라”라고 했다. 윤 후보의 실언과 태도 논란은 그의 비호감도를 높였다. 교사인 최모(33)씨는 윤석열 후보에 대해 “외신에 ‘쩍벌(다리를 크게 벌리고 앉는 자세)’하고 사타구니를 긁는 대통령이 나오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할 것 같다”고 했다.
여기에 두 후보의 ‘남(男)클릭’이 더해졌다. 이·윤 후보는 나란히 여성가족부 개편을 시사했다. 이들은 일단 여가부 이름에서 ‘여성’을 지우자고 제안했다. 이 후보는 공약의 근거로 “남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것도 옳지 않다”고 했고, 윤 후보는 “(기존의) 여성가족부가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등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 줬다”고 했다. 이 후보는 현 정부의 페미니즘 정책이 남성을 역차별했다는 내용의 글을 선대위 관계자들과 공유했고, 윤 후보는 성범죄 무고죄 처벌 강화를 공약으로 제시했다.
대학생 김모(23)씨는 이러한 두 후보의 행보가 국민을 분열시킨다고 했다. 김씨는 “(두 후보가) 이대남 표를 얻으려고 여성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2017년에 문 대통령은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했는데 뭘 했는지 모르겠다. (대선 후보에게) 여성은 그땐 구색 맞추기용 ‘패션’, 지금은 ‘골칫덩이’인 것 같다”고 했다. 대기업 직원인 이모(34)씨는 “대선 주자들이 2030 유권자를 (남녀로) ‘갈라치기’ 해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고 했다.
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대표는 “거대 양당 후보가 여성 혐오적 흐름에 편승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2030 여성들이 깊은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신 대표는 현재 양당 중심의 대선 구도를 바꾸자는 취지의 대선전환추진위원회를 추진 중인데, 참여 의사를 밝힌 6000여 명 중 대부분이 2030 여성이라고 한다. 신 대표는 “(2030 여성들이) ‘우리가 표가 없냐, 왜 우리를 유권자 취급하지 않느냐’란 말씀을 하더라. 이들은 분노하고 있다”고 했다.
◇“이대남 응집력에 여성票 과소 평가”
지난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18~29세 남성 72.5%, 30대 남성 63.8%(출구조사 기준)가 오세훈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고, 이는 오 후보의 당선을 이끌었다. ‘헌정사 첫 30대 제1야당 대표’를 탄생시킨 것도 2030 남성들이었다. 한 야당 관계자는 “2030 남성들의 응집력을 본 정치권이 이들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한 셈법”이라고 했다.
그러나 현재 최대 부동층인 여성의 표심이 결집할 경우 대선 결과를 좌우할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다. 2017년 대선 때 2030 여성의 투표율(20대 79%·30대 77%)은 같은 연령대 남성(20대 73%·30대 71%)보다 높았고, 2020년 총선에선 18세부터 50대까지 여성 투표율이 남성 투표율보다 높았는데, 특히 25~29세의 경우 남녀 투표율 격차가 10.8%포인트로 가장 컸다. 김형준 명지대 교수는 “여성 유권자들은 2012년 대선에서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란 캐치프레이즈의 박근혜 후보에 기대를 했고 실제 40대 여성 표심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2017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페미니스트 대통령’ 약속에 2030 여성들이 표를 줬다”며 “이번 대선에서 2030 여성, 특히 육아·교육 문제에 민감한 30대 여성이 캐스팅보트를 쥘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각 후보 측은 고심하는 분위기다. 민주당 선대위 관계자는 “20대 남성들은 우리 당을 별로 안 좋아하고, 여성들은 후보에 대한 비호감도가 높아 곤란한 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 “당과 후보에 대한 각각의 비토 기류를 어떻게 희석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윤석열 후보 측 관계자는 “윤 후보는 여성 유권자들의 지적을 받아들이고 변화할 의지가 있다. 특히 경력 단절, 보육 문제 등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김형준 교수는 “표만 생각해 2030 유권자 사이에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양당 후보가 2030 여성들을 이끄는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제3 지대 후보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새 양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신지예 대표는 “(양당 후보 아닌)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2030 부동층은 움직일 것”이라며 “여성도 남성도 모두 차별받고 있다. 차기 대통령은 모두를 대변하겠다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