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제32회 공인중개사 시험이 실시된 서울 은평중학교에서 응시자들이 시험을 마친 뒤 고사장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여행 가이드였던 서주희(37)씨는 최근 공인중개사 시험 2차에 응시해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그는 일주일에 평균 40시간 정도를 공부하면서, 약 9개월간 시험에 매달렸다. 서씨는 “작년 코로나로 휴직하게 됐고, 미래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며 “가채점해보니 합격 커트라인은 넘은 듯하다. 주변에서도 공인중개사 시험을 제법 어려운 시험이라고 보는지 축하를 많이 해주더라”고 했다.

곧 정년을 앞둔 대기업 부장 A(56)씨도 올해 같은 시험 응시자. 그는 “책 사놓고 공부 시작한 지는 벌써 6~7년도 넘었다”면서 “매번 원서만 제출해놓고 시험은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은퇴가 다가오니 절박해졌다. 가채점 결과 붙은 것 같다고 하니 아내가 딸 대학 붙었을 때만큼이나 기뻐하더라”며 웃었다.

지난달 30일 열린 공인중개사 시험에는 서씨와 A씨 같은 사람 40만명이 몰렸다. 1985년 공인중개사 시험이 시작된 이래 역대 최다 접수 인원이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제32회 공인중개사 자격 시험 1·2차 접수 인원은 40만8492명. 역대 최다라던 지난해(36만2754명)를 훌쩍 뛰어넘었고, 이젠 수능(작년 49만3434명) 응시자 수를 위협한다.

한국산업인력공단 관계자는 “접수 인원은 최초로 원서를 제출한 사람을 집계하는 것으로, 중간에 취소하는 사람이나 결원 등으로 매해 60~70%대 응시율을 보이기 때문에 실제 시험에 응시한 사람은 28만명 정도라고 보면 된다”며 “최근 3년 연속 접수 인원이 증가하고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에선 왜, 지금 다들 공인중개사 시험장으로 몰려드는 것일까.

◇중년의 고시에서, 어른들의 수능으로

공인중개사 시험은 한때 ‘중년의 고시(高試)’로 불렸다. 경력 단절자나 은퇴 이후 제2의 삶을 준비하는 중·장년층이 많이 응시한다는 인식 때문이다. 요즘엔 ‘어른들의 수능’이란 별명이 붙는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 시험에 대거 뛰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시험의 경우 접수 인원 가운데 30대 이하가 16만1904명으로 전체의 39.6%를 차지한다. 10대도 936명이나 있다.

젊은 층은 당장 부동산 사무실을 차려야겠다는 생각보다, 높아지는 취업의 벽에 ‘보험용’으로 자격증을 준비하는 경우가 많다. 대학을 휴학 중인 이현정(22)씨도 그중 한 사람. 그는 이번에 공인중개사 시험 1차를 봤다. 이씨는 “최근엔 공인중개사 자격증이 있으면 가산점을 주는 기업도 있어 일단은 가산점을 목표로 공부했다”면서도 “혹시나 취업에 실패하더라도 자격증을 따놓으면 적어도 부동산을 차릴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고 했다.

최근 집값 상승세가 계속되면서, 중개 수수료가 크게 높아진 것도 인기 요인으로 꼽힌다. 중개 수수료는 매매 금액의 0.5%와 같은 식으로 거래 금액에 따라 변한다. 지난달 중순 정부의 부동산 중개 수수료 개편 전까지, 10억 아파트를 매매하면 공인중개사는 수수료로 최대 900만원(최대 0.9%)을 받았다. 최근 시행규칙 개편으로 같은 거래라고 했을 때 상한이 500만원(최대 0.5%)으로 낮아졌지만,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가 12억원이 넘는 만큼 여전히 단 한 건의 거래만 성사시켜도 웬만한 대기업 직장인 월급을 웃돈다.

중견기업에 다니는 김모(37)씨는 “예전엔 공인중개사를 ‘돈 잘 버는 직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최근엔 달리 보인다”며 “부동산 광풍이 불면서 경매 등에도 관심이 많아져 자연스럽게 시험까지 도전하게 됐다. 시험에 떨어지더라도 부동산 관련 지식을 넓힌다는 차원에서 만족한다”고 했다.

코로나로 재택근무와 비대면 수업 등이 많아지면서 공부할 여유가 생겼다는 의견도 있다. 직장인 이모(29)씨는 “재택근무를 하면서 아무래도 회사에 출근할 때보다 여유 시간이 많이 생겼다”며 “장기적으로 이직 등도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자산 관리 전문성 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공인중개사 자격증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복덕방 할아버지’에서 ‘부동산 아줌마’로

“이 복덕방에는 흔히 세 늙은이가 모였다. 언제, 누가 와서, 집 보러 가잴지 몰라, 늘 갓을 쓰고 앉아서 행길을 잘 내다보는, 얼굴 붉고 눈방울 큰 노인은 주인 서 참의이다.”

공인중개사 이전엔 복덕방(福德房)이 있었다. 복과 덕을 주는 곳이라는 뜻으로 운수를 알아보는 방법 중 하나였던 생기복덕(生氣福德)에서 온 말이다. 1937년 소설가 이태준이 쓴 ‘복덕방’에는 구한말 무관으로 지내다 가옥 중개업으로 근근이 먹고사는 복덕방 주인 서 참의가 등장한다. 당시 복덕방은 담당 관청에 신고만 하면 영업할 수 있었다. 소설에 나오듯 주로 마을에 오래 살았던 토박이 노인들이 소일거리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복덕방’이란 말 다음에 ‘할아버지’란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건 이 때문일 것이다.

1970년 강남 개발과 함께 ‘복부인’이 등장하며 분위기가 달라졌다. 복부인은 상류층 부인들이 아파트 단지나 택지 주변 등의 복덕방을 단골로 드나들며 부동산 시장을 누비고 다닌 데서 나온 말. 당시 복부인을 필두로 한 주식회사 형태의 복덕방은 부동산 투기 조장·가격 조작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이로 인해 1983년 부동산중개업법이 제정되면서, 1985년 제1회 공인중개사 시험이 시작됐다. ‘복덕방 할아버지’보다 ‘부동산 아줌마’란 말이 보편화된 것은 이 시험 이후다.

2017년 한국공인중개사협회가 발표한 개업공인중개사 현황에 따르면 개업 공인중개사 중 남성 비율은 54%, 여성은 46%다. 그러나 40~50대만큼은 여성 비율이 남성보다 월등하다. 40대의 경우 여성 공인중개사가 62%, 남성이 38%다. 50대도 여성(52%)이 남성(48%)보다 많다.

◇공인중개사 시장 포화, 시험 변경 예고도

부동산업계는 높아지는 공인중개사 인기를 마냥 흐뭇하게 바라보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한국공인중개사협회에 따르면 1985년 이후 작년까지 공인중개사 자격증 보유자는 46만6589명. 그중 11만5000명 정도가 현직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매해 1만5000명~1만8000명가량이 폐업한다.

공인중개사협회 측은 “편의점보다 공인중개사 사무소가 많다는 말처럼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라며 “올해 시험 합격자가 배출되면 이제 자격증 보유자가 50만명에 육박할 텐데, 자격증이 있어도 원하는 만큼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더욱 치열한 적자생존 경쟁이 펼쳐질 것”이라고 했다.

현행 시험 방식은 절대평가로 개별 과목 40점, 전 과목 평균 60점 이상만 맞으면 합격한다. 여기에 족집게 인기 강사와 편리해진 인강(인터넷 강의) 인프라 등이 생겨나면서 자격증 소지자는 크게 늘었다. 협회는 상대평가 당시 매해 1000~3000명 정도였던 합격자가, 2000년 이후 한 해 평균 1만~2만명 가까이 배출되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협회 관계자는 “공인중개사 시험은 원래 2년에 1번 치러지는 상대평가 방식이었으나, 1997년 IMF 경제 위기 이후 실업자가 크게 늘면서 매년 시행으로 바뀌었다. 운전면허 시험이 쉬워지면 교통사고가 늘어나듯 공인중개사도 부동산 거래 사고 등 현장에서 서비스 질에 대한 불만이 생겨나고 있다”고 했다.

이에 국토교통부는 지난 8월 공인중개사 시험 방식 변경을 예고한 상태다. 공인중개사 시험 난도를 높이고 평가 방식을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로 전환해, 전문성을 높이고 신규 공인중개사 수급을 조절하겠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