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대구오페라축제 무대에 오른 오페라 '아이다'의 공연 장면. /대구오페라하우스

#1. “작품 좋지예?” “소프라노가 억수로 잘하데예~.”

토요일인 지난 6일 오후 대구 오페라하우스. 벨리니 오페라 ‘청교도’ 중간 휴식 시간에 로비로 쏟아져 나온 관객들이 방금 끝난 2막에 대해 감상을 나눴다. 서정적인 선율, 고난도 기교가 특징인 벨칸토 오페라의 정수로 꼽히지만 국내에선 쉽게 접하기 어려웠던 이 작품이 제18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폐막작으로 무대에 올랐다. 60대 남성 이영구씨는 “매년 오페라축제 시즌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며 “10년 전부터 거의 전 작품을 빼놓지 않고 봤다”고 했다. 올해 대구오페라축제는 개막작 ‘토스카’부터 ‘아이다’ ‘삼손과 데릴라’ 등 오페라 6작품 11차례 공연에 관객 2만8000여 명, 객석 점유율 90%를 기록했다.

#2. 같은 날 대구 아트페어가 한창인 대구 엑스코(EXCO) 동관에선 미술 작품을 구입하려는 컬렉터와 관람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유모차를 끄는 젊은 엄마, 40~50대 부부, 중절모 쓴 노(老)신사가 작품이 걸린 부스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올해 14회째인 이번 행사는 처음으로 대구화랑협회와 키아프(KIAF·한국국제아트페어)를 주최하는 한국화랑협회가 공동 주관해 개막 전부터 기대를 모았다. 국제갤러리, 리안갤러리, 갤러리현대 등 5국 126화랑이 참가해 5000여 작품을 선보였다. 나흘간 방문 관람객 총 1만4000여 명, 역대 최대인 98억원의 판매 실적을 달성했다.

지난 6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2021 대구 아트페어' 전경.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이곳을 그저 ‘보수적인 선비의 고장’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대구는 근대기 문화가 태동한 예향(藝鄕)이자 뿌리 깊은 문화 도시다. ‘사진의 수도’ ‘구상미술의 중심지’ ‘뮤지컬 특별시’ 등 문화 도시 대구를 일컫는 수식어도 넘쳐난다. 위드코로나(일상 회복)가 시작된 올가을엔 어느 해보다 뜨거운 예술의 열기로 가득 차 있다. 대구미술관에선 프랑스에서 건너온 샤갈·자코메티·칼더의 걸작이 한국의 이우환·서세옥·박서보 작품과 어우러진 ‘모던 라이프’전이 한창이다. 세계 32국 작품을 선보이며 동시대 사진 예술의 흐름을 보여준 ‘2021 대구사진비엔날레’는 지난 2일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미술·클래식·뮤지컬·사진 등 장르를 불문하고 뻗어나가는 문화 예술 1번지. 대구는 어떻게 문화의 도시가 됐을까.

프랑스 국보인 마르크 샤갈의 회화 '삶(La Vie)'. 대구미술관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매그재단과 함께 열고 있는 해외 교류전 '모던 라이프'를 위해 처음으로 유럽 땅을 떠나 한국에 왔다. /매그재단

◇폐허에서 바흐가 흐르던 기적의 공간

임언미 월간 ‘대구문화’ 편집장은 “근대기 예술가들이 씨 뿌리고 닦아놓은 토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한국 문단의 주류를 이뤘던 이상화·현진건, 근대 서양음악의 기틀을 다진 박태준·현제명, 근대 미술의 토대를 닦은 이상정·서동진과 이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양식을 꽃피운 화가 이인성·이쾌대 등이 모두 대구 출신이다.

6·25전쟁이 터진 후엔 향촌동과 북성로 일대에 예술인들이 자리 잡으며 예향의 전통을 세웠다. 특히 향촌동은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문인 묵객들의 요람 역할을 했다. 1951년 향촌동 골목에 문을 연 클래식 감상실 ‘르네상스’는 당시 외신기자들이 “전쟁의 폐허에서 바흐의 음악이 흐른다”고 경탄했던 기적의 공간이다. 골목 끝에 구상 시인이 단골로 묵었던 화월여관이 있고, 그 앞 백록다방에서 화가 이중섭이 담배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전쟁 때문에 암울했던 세상을 노래한 구상의 ‘초토의 시’ 출판 기념회가 인근 꽃자리다방에서 열렸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문화 예술인들이 결성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곳도 대구였다. 임 편집장은 “부산이 피란 수도라면 문화 예술의 수도는 감히 대구라고 말할 수 있다”며 “근대기에 만들어놓은 문화적 토양이 있었기 때문에 대구로 피란 온 예술가들을 넉넉히 품을 수 있었다”고 했다.

대구의 근대를 품은 계산성당 첨탑(오른쪽)과 맞은편 대구제일교회 첨탑.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로 유명한 시인 이상화 고택.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요즘 관광객들은 ‘근대 골목 투어’로 대구 문화의 저력을 확인한다. 박태준이 작곡한 가곡 ‘동무 생각’에 나오는 ‘청라언덕’이 골목 여행의 출발점이다. 일명 ‘90계단’이라는 3·1운동 만세길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결혼식을 올렸다는 계산성당, 시인 이상화 고택(古宅)까지 둘러봤다면, 건물 하나에 위아래로 들어선 향촌문화관과 대구문학관을 놓치지 말자. 피란 시절 예술가들의 터전이었던 다방 골목과 막걸리 집, 대한민국 최초의 음악 감상실 ‘녹향’까지 고스란히 재현했다.

피란 시절 문인들이 즐겨 찾던 막걸리집을 대구 향촌문화관에 재현한 공간.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탄탄한 공연 인프라에 교육 열기까지

대구는 ‘오페라의 도시’일 뿐 아니라 ‘뮤지컬 특별시’로도 통한다. 지난 주말 막을 내린 대구국제오페라축제(DIOF)와 함께 매년 6월 열리는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DIMF)은 대구의 공연 문화를 이끌어온 두 기둥이다. 제작자들은 “서울을 빼면 가장 안정적인 관객이 있는 도시”라고 말한다. 인구 250만 대비 탄탄한 인프라가 갖춰진 것이 비결로 꼽힌다. 계명아트센터·수성아트피아 등 1000석 넘는 대극장이 11개다.

김수정 대구오페라하우스 홍보팀장은 “지난 2003년 개관한 대구오페라하우스는 전국 최초 오페라 전용 공연장”이라며 “오페라 축제와 뮤지컬 축제를 열 수 있는 1600석 규모의 무대가 열린 것”이라고 했다. 뮤지컬 평론가인 원종원 순천향대 교수는 “초연 작품이 실험적으로 DIMF 무대에 먼저 올라와 검증된 후 서울로 올라가는 공식이 생겼을 정도로 성공한 축제”라고 말했다.

지난 6일 오후 제18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폐막작인 벨리니 오페라 '청교도'를 보기 위해 관객들이 대구오페라하우스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지난 6일 오후 제18회 대구국제오페라축제의 폐막작인 벨리니 오페라 '청교도'를 보기 위해 관객들이 대구오페라하우스 2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교육 열기도 문화 도시 대구의 힘이다.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에서 가장 많은 음악 인구와 전공자를 보유하고 있는 도시다. 계명대와 대구가톨릭대 등 매년 1000명 이상 음악대학 전공자들을 배출하고 있다. 송현민 음악평론가는 “대구에 피란 왔던 문인과 예술가들이 전쟁 후에도 남아서 교수진으로 안착해 매년 수준 높은 졸업생을 배출했다”며 “대구가 오페라, 클래식 등 각종 축제를 선도할 수 있는 인적 기반이 됐다”고 말했다.

◇현금 부자 많아 ‘큰손 컬렉터’ 형성

대구는 현대미술의 발상지로도 통한다. 1970년대 젊은 미술가들이 대구 낙동강 인근에서 다양한 미술 실험을 펼쳤던 ‘대구현대미술제’가 기폭제가 됐다. 최윤석 서울옥션 전무는 “보수의 심장이라는 도시에서 열린 실험적 미술 행위는 대한민국 미술사에 한 획을 그었고, 이런 저력을 바탕으로 지금까지도 대구는 현대적이고 급진적인 작품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고 했다.

초창기 좋은 화랑이 대구에 많았던 것도 ‘큰손 컬렉터’가 형성된 비결이다. 안혜령 대구화랑협회장은 “1980~90년대 인공화랑, 시공화랑 등은 이우환·박서보·윤형근 등 한국 미술계 중요한 작가들의 전시를 고루 열었을 정도로 안목이 높았다”며 “곽인식·이강소·이배·김호득 등 대구 출신의 훌륭한 작가군이 있고, 이들을 발굴해 좋은 작품을 공급하는 화랑이 있으니 일찌감치 두꺼운 컬렉터층이 형성된 것”이라고 했다. 안 회장 자신이 대구의 컬렉터 출신이다. “시공화랑 대표가 작고한 뒤 인수자가 나타나지 않아 안타까워하다가 직접 인수해” 리안갤러리를 열었고, 대구에서 시작한 갤러리는 서울 분점까지 성공적으로 안착해 현재 국제 아트페어에서 한국 톱10 갤러리로 꼽힌다. 그는 “해외 굵직한 아트페어장에도 대구 손님들은 꼭 온다”며 “대구 사람 특징이 진득해서 한번 작품을 사면 쉽게 돌리지 않는다”고 했다.

지난 6일 대구 엑스코에서 열린 '2021 대구 아트페어' 현장. 작품을 구입하려는 컬렉터와 관람객들이 부스 사이를 오가고 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또 다른 미술 관계자는 “대구에서 섬유 산업이 붐을 이루면서 부를 축적한 현금 부자들이 작품 수집에 관심을 갖게 됐고, 지금까지 컬렉션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며 “갤러리가 항상 60~70곳을 유지하는 것도 대구에 그만큼 수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컬렉션에 처음 눈을 뜬 곳도 대구다.

지난여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은 코로나 와중에도 총 관람객 3만9931명을 끌어모았다. 대구 출신 화가 이인성의 ‘노란 옷을 입은 여인상’, 이쾌대의 ‘항구’ 등이 전시돼 첫날부터 매진 행렬이 이어졌다. 올해 개관 10주년을 맞은 대구미술관은 수준 높은 기획 전시로도 정평이 났다. 최은주 대구미술관장은 “일본의 구사마 야요이, 중국의 장샤오강 등 블록버스터급 특별전을 열었고, 특히 33만 명이 다녀간 구사마 야요이전은 상하이와 서울 예술의전당 등으로 전시가 이어지는 기록을 세웠다”며 “지방 미술관에서도 기획만 좋으면 얼마든지 성공적인 전시를 열 수 있다는 사례로 회자된다”고 했다.

지난 6일 대구미술관 '모던 라이프' 전을 찾은 관람객들이 페르낭 레제의 그림을 감상하고 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교촌치킨, 신전떡볶이, 서가앤쿡... 모두 고향이 대구였네!

대구 출신 브랜드가 ‘전국구 맛집’ 된 비결

교촌치킨, 멕시칸치킨, 페리카나, 호식이 두마리 치킨, 처갓집 양념치킨...

이 치킨 프랜차이즈의 공통점은? 모두 대구에서 태어난 브랜드라는 것. 한국식 프라이드 치킨의 본산지인 대구는 애호가들 사이에서 ‘치킨의 성지’로 통한다. 전문가들은 “대구에서는 오래전부터 닭을 이용한 다양한 요리가 발달했고, 6·25전쟁 이후 수성구 황금동 일대를 중심으로 도계장과 양계장이 들어서면서 치킨 산업의 기반이 마련됐다”고 말한다. 1970년대 대구 칠성시장에 닭고기 가공 회사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도 배경이 됐다.

대구 출신 브랜드는 치킨뿐만이 아니다. ‘서가앤쿡’ ‘미즈컨테이너’ ‘신전떡볶이’ 등 전국구 프랜차이즈 브랜드 상당수가 대구에서 출발했다. 대학 구내식당으로 시작한 미즈컨테이너는 숟가락으로 떠먹는 피자, 샐러드와 파스타를 한 접시에 담은 파스타 샐러드 등 독특한 메뉴로 서울 강남까지 진출했다. 서가앤쿡은 음식의 양을 거의 2인분으로 늘린 ‘2인 1메뉴’를 합리적 가격에 제공해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 사랑을 받고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 신전떡볶이는 1970년대부터 대구에서 유행했지만 다른 지역에는 없던 ‘후추 소스 떡볶이’를 내세워 중독성 있는 매운맛으로 호평받고 있다.

미즈컨테이너의 대표 메뉴 '치킨 바베큐 플레이트'. /미즈컨테이너 제공

왜 하필 대구 출신 프랜차이즈가 많을까. 육주희 전 월간식당 편집장은 “섬유·패션 산업이 발달했던 도시답게 소비 성향이 강하고 젊은 층은 맛과 트렌드에 굉장히 빠르고 민감한 곳”이라며 “식자재 원가가 서울보다 월등하게 저렴해 가격 경쟁력이 높고, 무침회·찜갈비 등 양념으로 맛을 보강하는 솜씨가 예전부터 발달한 것도 대구의 강점”이라고 꼽았다. 외식업 전문가인 이윤화 다이어리알 대표는 “대구는 섬유 산업으로 축적한 부를 토대로 외식에 진출한 업체가 많다”며 “돈과 조직력을 갖춘 프랜차이즈 기업이어서 대구에서 성공한 브랜드는 서울에서도 통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