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인 ‘프리즈(Frieze) 런던 2021’이 영국 런던 리젠트 공원에서 지난 13일부터 닷새간 열렸다. 이번에 개최된 프리즈는 2003년 첫선을 보인 이래 가장 큰 성공을 거뒀다. / AFP 연합뉴스

기온이 부쩍 떨어지면서 하늘이 높고 색이 진해지는 계절입니다. 한국에서 가을은 마음의 양식을 쌓는 계절이라고 하지요. 영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을을 가장 영감 받는 계절이라고들 합니다. 출판사들이 가장 많은 책을 내놓는 ‘수퍼 목요일’이 10월에 있고,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 역시 가을에 열리지요. 이번 한국국제아트페어(KIAF)가 많은 관심 속에 성황을 이뤘다고 하는데, 런던의 아트페어에 대해 궁금하신 분들은 혹시 안 계신가요? 이번 <런던매일>에서는 영국 최고 규모의 아트페어인 프리즈(Frieze)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프리즈 런던과 프리즈 마스터로 구성되어 있는 프리즈는 영국의 가장 활발한 미술 시장입니다. 런던 시내에 있는 리젠트파크의 바닥에 마른 나뭇잎들이 떨어져 쌓이고 프리즈가 열리면 공원 곳곳에는 설치·조각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공원 중심부에 이 아트페어의 상징이 된 초대형 천막이 세워지지요. 이 하얀 장막을 걷어내면 39국을 대표하는 200여 갤러리의 부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전 세계의 미술 애호가, 수집가, 전시기획자, 그리고 올해 마지막 피크닉을 즐기는 아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지요. 특히나 올해 프리즈는 지난해 팬데믹으로 개최를 취소하면서 2년 만에 열리게 되었는데요, 2003년에 첫선을 보인 이래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해라고 하네요.

프리즈는 영국뿐 아니라 전 세계 주요 갤러리가 제안하는 현대미술의 현주소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척도입니다. 이번 프리즈 2021에서는 특히 유색인종 여성 예술가가 기존의 유명 갤러리와 신흥 갤러리 모두에서 판매를 주도했습니다. 특히나 프리즈 아티스트 어워즈를 받은 베트남 출신의 작가 성 티우(Sung Tieu)의 작품은 냉전시대의 전쟁과, 전쟁에서 쓰인 음파로 인해 의학적 장애가 발생한 ‘하바나 신드롬’ 사건을 영화로 자세히 재구성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독립 큐레이터이자 예술 고문인 클라우디아 쳉(Claudia Cheng)은 이번 프리즈 아트페어가 다양성과 포용성의 정신에 대해 보여주었다고 평가했습니다.

런던 프리즈 2021에 등장한 서도호의 2019년 작품 'Hub-2, Breakfast corner'

한국 작가들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는 점도 저에겐 무척 반가운 일입니다. 런던의 대표적인 갤러리인 화이트큐브는 한국 단색화 거장인 박서보의 작품 ‘110222′를 선보였습니다. 반복적인 행동을 통해 고요함과 명상을 추구하는 이 작품은 VIP에게 공개된 첫날 36만 달러에 판매되었습니다. 화이트큐브는 동양 미학, 또는 철학을 보여주는 예술가들에 초점을 맞춘 특별 큐레이션 부스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리만 머핀 갤러리는 서도호 작가의 작품으로 부스를 채웠는데요, 핑크색의 폴리에스테르로 세워진 건물 모양을 갖춘 설치물 ‘Hub-2, Breakfast corner, 260-7, Sungbook-Dong, Sungboo-Ku, Seoul, Korea’(2019)가 입구에 설치돼 많은 시선을 끌었습니다. 작가가 살던 집의 형태를 갖춘 섬세한 설치물은 다양한 도시에 존재하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춘 작가 그 자체를 대변하는 듯 보입니다. 저 역시도 한국의 친정집이 생각나 그 앞에서 한참을 머물렀습니다.

아트페어의 성공은 갤러리와 도시 모두에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특히나 새로운 투자거리를 찾는 투자자들에게 세계적으로 성공한 아트페어의 목적지로서 의미를 가진 도시는 더욱 매력적일 테죠. 전통적인 미술 전시장과는 달리 하나의 경제적인 모델로 자리를 잡은 아트페어를 이야기하는데에는 경제적인 지표가 빠지지 않고, 아트페어가 막을 내리면 어떤 작품이 어떤 가격에 팔렸는지로 한참 시끄럽습니다.

그러나 이 한바탕 축제가 끝난 자리에 얼마나 높은 가격에 그림이 팔렸는지와 흥행에 관한 이야기만이 남는 것은 어딘지 허전한 일입니다. 낙엽이 굴러다니는 공원의 빈자리는 괜히 더 쓸쓸하고요. 이제는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증권 시장처럼 기록을 쏟아내고 경제적인 지표를 나타나게 된 것도 더 이상 어색한 이야기가 아니지만 분명히 미술에는 경제적인 가치 외에도 존재의 이유가 있습니다.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저서 ‘영혼의 미술관’에서 현대의 미술계와 미술 시장의 문제로 인해 거리가 멀어진 현대인과 미술의 관계에 대해 짚어냅니다. 그리고 미술의 ‘쓸모’에 대해 깊이 탐구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은 쉽게 희망을 잃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술을 통해 숨어있는 감각을 느끼고 나쁜 기억을 교정하고 중요한 기억을 붙들고 슬픔을 존엄화하여,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우리 자아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데 예술 작품을 이용해야 한다.”

저는 어쩌면 아트페어에 썩 어울리는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도 윈도쇼핑만 실컷 하다 돌아왔거든요. 그림을 소유하지 않아도 작품 앞에서 느낀 감상과 그 경험은 오롯이 제 것임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니까요. 작품 속에, 제목 속에, 작가의 손이 지나간 자리에, 꼭꼭 숨겨놓은 작가의 메시지를 따라서 온감각을 동원하는 것으로도 저의 아트페어는 무척 즐거웠답니다.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려도 좋고요, 그러다 결국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길을 잃어도 괜찮습니다. 가을은 산책하기 좋은 계절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