끓는점을 훌쩍 넘긴 ‘오징어 게임’의 열기가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관련 기사가 수없이 쏟아져 드라마를 안 본 사람에게조차 몇몇 장면은 눈에 익다. 그중 하나가 연분홍, 연노랑으로 칠한 ‘미로식 복도’로 초록색 체육복 차림 참가자들이 일개미처럼 줄지어 움직이는 장면 아닐까.
색감만 봐선 영락없는 ‘인스타 감성’인데, 알고 보면 극 중 어떤 공간보다 섬뜩하다. 파스텔 빛 통로는 참가자들이 게임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복도, 즉 죽음으로 이어지는 문이다. 통로가 복잡하게 얽혀 출구가 어딘지,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건지 내려가는 건지조차 헷갈린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출구가 보이지 않는 밑바닥 인생, 도무지 끊어낼 수 없는 ‘빈곤의 굴레’와 묘하게 닮았다.
주연 배우 이정재가 “현대미술 작품 같은 세트”라 한 이 공간엔 진짜 현대 미술이 숨어 있다. 황동혁 감독과 채경선 미술감독은 “판화가 에셔 작품을 오마주(경의)해 만든 공간”이라고 밝혔다. 에셔(1898~1972)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독창적 예술 세계로 마니아층을 지닌 네덜란드 판화가다. 건축학도였던 에셔는 철저한 수학 계산을 토대로 반복, 순환, 착시 등을 활용해 ‘트릭 아트’ 같은 그림을 그렸다. 실재와 가상이 오묘하게 뒤섞인 스타일이다. 아무리 올라가도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무한 계단’이 그의 그림에 단골로 등장하는 소재다.
오징어 게임 속 미로식 복도에 직접 영향을 준 작품은 대표작으로 꼽히는 석판화 ‘상대성’(1953)이다. 얼핏 보면 역삼각형 모양으로 이어진 계단 그림 같지만, 자세히 보면 현실에선 절대 있을 수 없는 장면이다. 위쪽 가로로 뻗은 계단에 서 있는 두 사람을 보면, 같은 계단인데 한 사람은 올라가고 한 사람은 내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가 벽이고, 어디가 바닥인지도 헷갈린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중력 3개를 한 화면에 중첩해 표현하면서 초현실적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판타지 영화나 SF 영화에서 상상력을 증폭하는 지렛대로 삼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재 아닌가. 팝의 전설 데이비드 보위가 마왕으로 등장한 판타지 뮤지컬 영화 ‘라비린스(사라의 미로 여행·1986)’엔 무한 계단을 입체화한 거대한 세트가 등장한다. 영화 ‘박물관이 살아있다: 비밀의 무덤’(2014)에선 주인공들이 박물관에 걸린 에셔의 ‘상대성’ 그림 속으로 들어가 추격전을 펼친다.
종종 명화 패러디를 시도하는 미국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The Simpsons)’에서도 에셔 패러디가 몇 번 등장했는데, 그중 핑크·초록 등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상대성’을 패러디한 장면은 오징어 게임 세트와 매우 비슷하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인셉션’(2010)엔 에셔의 ‘올라가기와 내려가기’(1960)에서 힌트를 얻은 공간이 나오고, ‘닥터 스트레인지’(2016)에선 에셔 특유의 공간 뒤틀림이 CG로 화려하게 구현됐다.
에셔는 수학자, 과학자, 철학자에게도 영감의 원천이 됐다. 오징어 게임의 세계적 인기를 일군 숨은 공신인 ‘상대성’ 그림은 노벨상 수상의 원동력이 된 작품이기도 하다. 블랙홀이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한 공로로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로저 펜로즈(90)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불가능한 도형’에서 기하학적 원리를 확장해 블랙홀 개념을 정립했다. 그가 ‘불가능한 도형’에 빠진 계기가 에셔의 ‘상대성’ 그림이었다. 펜로즈는 에셔가 세상을 뜰 때까지 교류하면서 서로의 작업에 영향을 미쳤다.
미국 인지 과학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퓰리처 수상작 ‘괴델, 에셔, 바흐’에서 에셔 작품은 인간 지성에 관한 저자의 통찰을 입체적으로 확장해주는 역할을 한다. 지금은 정치 논객으로 활약 중인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본업인 미학자로서 이름을 알린 데에도 에셔가 있었다. 구어체로 낯선 미학을 대중화시켰다고 평가받는 진 교수의 스테디셀러 ‘미학 오디세이’ 3권 중 1권(1994)의 부제는 ‘에셔와 함께 탐험하는 아름다움의 세계’. 에셔의 작품을 장마다 보여주면서 미학사와 철학사를 엮어내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