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에 치른 대선을 앞두고, 집권 여당 소속 중진 정치인 A씨가 무속인을 찾아갔다. A씨에게 무속인이 들려준 얘기는 이랬다. “인감도장을 금으로 두른 도장으로 바꾸면 대권에 다가설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A씨는 인감도장을 금장으로 바꿨지만, 당 경선도 통과하지 못했다. A씨를 잘 아는 정치권 관계자는 “A씨는 교회를 다니던 장로인데도 무속인 말을 찰떡같이 믿더라. 나중에 당 경선에서 떨어지고는 그 상황을 아예 잊은 듯 보였다. 창피해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
대선 레이스에 ‘주술(呪術)’ ‘점(占)’이 이슈로 등장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우니 정치판엔 늘 사주나 점의 힘에 기대려는 사람이 넘쳐난다. 한 역술인은 “지난 총선에 출마한 한 현역 국회의원은 나에게 하루에 20번씩 전화해 이것저것 물어보더라. 심지어는 새벽 2시에도 전화하더라. 그게 정치인 심리”라고 했다.
이번 대선에서는 국민의힘 윤석열 경선 후보의 손바닥에 적힌 ‘왕(王)’ 자가 이른바 주술 정치에 불을 댕겼다. 같은 당 홍준표 후보가 과거 이름을 바꾼 경력 등으로 주술 정치 공방은 옮겨붙었다. 판·검사, 고위 공무원, 유명 기업 CEO 출신인 대한민국 엘리트마저 정치권에 들어서면 주술의 힘에 의존한다. 왜 그럴까.
◇대만에서 점쟁이 데려와 점치기도
한국인이 사주나 점을 보는 일은 흔하다. 입시나 고시에 붙을 수 있을지, 좋아하는 이성과 결혼할 수 있을지 등등 자신의 미래가 궁금할 때면 점집으로 향한다. 정치권에서는 그 정도가 유별나다. 황태순 정치 평론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점을 자주 보는 사람이 정치인과 고위 공무원이다. 승패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곳이기에 마음의 안도를 점이나 주술로 얻어보겠다는 생각”이라고 했다. 박주선 전 국회 부의장도 “정치권에는 너무 많은 우연이 도사리고 있고, 당선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나 과학적 자료가 없다. 똑똑하다고, 토론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자기 앞날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싶은 인간의 욕구”라고 말했다.
한 전직 의원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는 박 대통령에게 운이 들어온다고 퍼트리기 위해 전국의 무속인들을 섭외하는 등 공작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점에 의존한 정치는 대한민국 역사와 함께 시작된 것”이라고 했다. 1990년 12월 21일자 동아일보 19면에는 ‘정치인과 점’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온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유신을 단행하면서 날짜를 1972년 10월 17일로 정했는데, 당시 중앙정보부 판단기획실장 김성낙씨가 용하다고 소문난 세검정의 모 점술가에게 받아 왔다” “전두환 정권 청와대 고위 참모는 청운동에 사는 노인을 찾아가 선거 날짜를 어떻게 잡아야 노태우 민정당 후보가 승리할 수 있는지 물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있다.
한 전직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 인사에 따르면 정권 실세였던 P씨는 1990년대 당시 대권을 꿈꿨다. 용하다는 점술가를 대만에서 데려와서 점을 쳤다. 그랬더니 점쟁이는 P씨에게 “별 세 개가 보인다”고 말했단다. 이 인사는 “대통령이 별 하나인데, 자기는 셋이라고 하니 P씨가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나. 그런데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갔다”고 했다. 고(故) 박태준 포철 회장은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 후보와 경쟁할 무렵, 헬기를 타고 경남 함양군 서상면의 한 중학교 운동장에 내렸다. 그곳에 사는 유명 역술인에게 조언을 얻기 위해서다. 이 사실은 신문을 통해 알려졌고, 점쟁이와 국사를 논의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이 일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처럼 거물급 정치인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대신 측근들이 유명 역술인이나 스님 말을 듣고 후보에게 보고하는 경우가 많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는 본지 통화에서 “1992년 대선에서 패한 DJ가 영국 유학을 떠났을 때 경북에 있는 설송 스님이란 사람이 DJ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직접 가서 얘기를 들어 봤다. 나중에 DJ에게도 말씀드렸는데,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고 했다. 역술인 채봉 선생은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후보 측근의 지인들이 와서 당선 가능성을 물은 적이 있다. 후보의 사주나 운은 좋지 않았지만, 부인의 운기가 좋아서 이 후보가 될 거라고 말해준 적이 있다”고 했다.
다만 ‘떨어진다’ ‘이번에는 어렵다’는 나쁜 얘기는 후보에게 직접 하진 않는다. 민영삼 전 민주평화당 최고위원은 “떨어진다는 얘기를 듣고 좋아하는 후보가 누가 있겠나. 대신 점을 본 측근 스스로 대책을 세운다. 일부 점쟁이는 이것을 이용해 부적을 쓰라고 하는 등 돈을 뜯기도 한다”고 했다. 김두규 우석대 교수는 “풍수와 사주를 보면 당선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는데, 역술인들도 운이 나쁜 것으로 나오면 ‘가급적 돈을 쓰지 말라’고 하거나 ‘좋은 어른들,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참모를 쓰라’는 식으로 돌려서 말한다. 낙선했을 경우 빠져나갈 궁리를 만들기 위해서”라고 했다.
◇누구에게 줄 설까요? 여전한 주술 정치
주술의 힘은 2020년대 정치권에도 여전히 뻗치고 있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낙선한 한 전직 국회의원 B씨는 선거를 앞두고 점집 3~4곳을 다녔다고 했다. 대부분 ‘붙는다’고 점쳤지만, 그는 낙선했다. B씨는 “내가 처음 도전할 때는 안된다고, 떨어진다고 하던 점쟁이가 더 많았는데 그때는 오히려 당선됐다. 작년엔 현역 의원이어서 그랬는지, 된다고 한 사람이 더 많았다. 결과적으로 보면 맞힌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한 중견 정치인 C씨는 이번 대선을 앞두고 역술인을 찾았다. 그는 “내가 어느 대선 후보에게 줄을 서야 하느냐” 물었다. 이 역술인이 특정 후보를 점찍었고, 얼마 후 C씨가 특정 후보 지지를 선언하면서 캠프에서 요직을 맡게 됐다는 보도가 나왔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중진 정치인 D씨가 어느 후보에게 줄 서야 하는지 역술인에게 물었는데, 그 역술인이 ‘문재인’ 후보라고 알려줘서 그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인사는 현 정권에서 요직을 차지했다.
‘왕’ 자 논란과 역술인 멘토설 등에 휩싸인 윤석열 후보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소 엇갈린다. 역술인 서대원(초아) 선생은 “역술은 스스로 공부하고 터득해야지, 남에게 물어보면 주술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모자라서 남에게 물을 경우에는 은밀하게 알아보는 게 바람직하지, 세상 사람 다 알게 하는 건 옳지 않다”고 했다. 반면 박주선 전 부의장은 “역술을 한 사람들이 유명 정치인들 사주를 갖고 당선 여부를 예측하는 건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인데, 정책을 다뤄야 할 토론회에서 이것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게 맞는지 의문”이라고 했다. 최지연 숙명여대 심리학과 교수는 “인간은 대개 불안한 심리 상태가 지속되는 걸 피하기 위해 미래를 알고자 한다”며 “비과학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점을 보는 이유이며, 이는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