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 3시에서 5시 사이의 시간을 좋아한다. 이 시간을 부르는 말이 있다면 좋겠다. ‘개와 늑대의 시간’ 같은 그런 거 말이다. 해가 지고 어두워져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안 된다 해서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고 하는데, 3시에서 5시 사이는 뭐라고 해야 할까. 점심 장사를 마치고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가게가 닫혀 있는 시간. 일반적으로는 ‘브레이크 타임’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때 초조해진다. 가게 주인의 입장에서는 잠시 쉬거나 준비하는 시간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가게에 들어갈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길을 걷는 걸 좋아한다. 가게는 닫혀 있고, 거리의 볼륨도 줄어들어 있다. 머리에 두건을 쓴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층계참에 앉아 전화를 하기도 하고, 길고양이가 지나다닌다. 거리가 반쯤 잠들어 있는 듯하다. 어슬렁대다가 문이 열린 가게를 발견하기도 한다. 무슨 이유에선가 열어둔 가게를 말이다. 또 4시에 문을 여는 가게가 있기도 하다. 이런 데 들어가서 첫 잔을 마시면 그렇게나 좋다.
식전주의 시간이다. 밥을 먹기 전에 마시는 술. 안주와 함께 먹지 않는 술. 술만으로 온전한 술. 이게 식전주다. 3시와 5시 사이는 식전주의 시간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간에 마시는 식전주를 나는 꽤나 좋아한다. 술은 다 각각의 매력이 있고,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지루할 때도 피곤할 때도 좋지만, 식전주의 시간에 마시는 식전주도 좋다. 주로 맥주이지만 가끔은 아페리티프(Aperitif·식전주)를 마신다. 아페리티프인지 아페티리프인지 여전히 헷갈리지만, 나는 이 단어를 좋아한다. ‘열다’라는 뜻을 품고 있는 단어답게 ‘아페리티프’를 발음하면 마시기 전에도 뭔가가 열리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정말, 열린다.
마음이 막 들뜬다. 이 술을 다 마시고 나서 어떤 술을 본격적으로 마실지, 또 어떤 음식과 먹을지 생각하게 된다. 식전주를 마시지 않아도 오늘의 안주와 오늘의 술에 대해 생각하지만 식전주를 마시면 좀 더 열렬해진다고나 할까. 없던 열정도 솟아나는 걸 느끼며 식전주의 위력에 놀란다. 이 가볍고, 청량하고, 산뜻한 이 술에 이런 힘이 있었나 싶다.
식전주에 눈뜬 것은 이탈리아에서였다. 그 전에, 파리나 베를린에서 지낼 때 식전주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는 했지만 상당히 어정쩡했다. 마셔 보기는 했지만 식전주와 식후주가 와인이나 맥주와 어떻게 다른지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상당한 시간을 반주의 세계에서 보냈던 것이다. 술만 먹지 않고 늘 음식과 먹었다. 부대찌개에는 소주를, 복국에는 화랑을, 과메기에는 막걸리를 더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술만 마시라니…, 술부터 마시라니….
처음 맛본 건 파리에서였다. 음식 메뉴 책보다 훨씬 두꺼운 술 메뉴 책을 받고 당황했다. 와인과 맥주만 해도 몇 페이지가 넘었는데, 식전주와 식후주가 따로 있었다. ‘일단 식전주를 한 잔 마시고, 다른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다가, 마지막에는 식후주를 마시는 건가?’ ‘팁을 주는 것처럼 이렇게 마시는 게 이 나라의 불문율인가?’ 싶었는데 물어볼 데가 없었다. 나는 저지르는 타입이 아니다. 몇 주동안 술 메뉴판 보기만 하다가 주문했던 게 키르(Kir)였다.
키르가 뭔지 알아서 그랬던 건 아니다. 키르와 키르 로열(Kir Royal)이 위 아래로 있었는데, 키르 로열을 시키고 싶었지만 비싸서 그냥 키르를 시켰다. 십 년도 더 된 일이라 기억이 확실하지 않지만 키르와 키르 로열은 4유로 차이가 났다. 키르 로열에서 무언가를 뺀 게 키르일 테니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별로였다. 달고 썼다. 단맛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다. 단지 그 단맛은 부적절했다. 단맛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그리 유쾌하지 않은 진득한 단맛이 쓴맛을 뚫고 입에 남았던 것이다.
그랬다가 몇 년 전 이탈리아에서 아페롤 스프리츠를 마시게 되었다. 밀라노의 두오모 근처에 머무를 때였다. 그날, 나와 일행은 이십 분 정도 트램을 타고 옆 동네에 갔다. 당시 머물렀던 집의 주인이 만들어둔 리스트에 있는 식당 중 하나였다. 집주인은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옥상 정원에서 키우는 두 마리의 거북을 소개하며 두 마리의 성격에 관해 이야기했고, 추천하는 식당은 이렇게 나눠서 알려줬다. ‘로마 요리’ ‘전통 요리’ ‘시칠리아 요리’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요리’, 그리고 ‘세련된 요리’.
가운데 운하를 두고 좌우로 식당 거리가 펼쳐진 동네였다. 원래 야외에 앉으려고 했는데 주인이 우리 식당은 안이 더 좋다며 실내를 보여줬고, 우리는 바로 납득했다. 야외에 앉으려고 했던 것은 운하를 사이에 두고 노천에 앉아서 식전주를 마시고 있는 이들의 기운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앉고 싶었던 야외보다 누가 봐도 상석인, 서로 기대어 술을 마시는 연인과 나무들과 운하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서 아페롤 스프리츠를 마셨다. 거리에서 그날의 밀라노 사람들은 모두 아페롤 스프리츠를 마시고 있었다. 메뉴판을 펼치기도 전에 아페롤 스프리츠를 달라고 했다. 다섯 시가 될 무렵이었다.
그날 투명한 오렌지빛의 이 음료를 마시고 나서 뭔가가 바뀌었다. 전에도 아페롤 스프리츠를 먹은 적 있었지만 그날 마셨던 아페롤 스프리츠는 처음 마시는 술 같았다. 신선했다. 세상에 이렇게 달면서 쓰고, 맑으면서 톡 쏘는, 산뜻한 술이 있나 싶었다. 마지막에 술잔에 들어 있는 오렌지를 건져 먹으며 식전주의 세계에 제대로 입문했다. 내일 또 아페롤 스프리츠를 마셔야지 하면서 잠들었고, 일어나서 아페롤 스프리츠를 마셨다.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매일 이 ‘아페롤 루틴’을 반복했다.
그렇게 식전주에 스며들었다. 키르도 알고 보면 상당히 괜찮지 않을까. 키르가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 내가 생각하기에 식전주란 딱 한 잔을 마시는 것이다. 양이 많지 않아야 하고, 그래서 배가 부르지 않아야 한다. 아름답기까지 하다면 더 좋다. 맛은 달지 않아야 한다. 드라이하거나 씁쓸하면서 산미가 있는 술이라야 한다. 마시면 발끝이 가벼워져야 한다. 그리고 절대 취하지 않아야 한다. 아직 다섯 시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