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 드라마 ‘겨울연가’의 주인공 배용준씨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도쿄 하네다 공항이 일본 전역에서 몰려든 팬들로 마비된 적이 있습니다. 일본 언론이 헬기를 띄워 중계했을 정도로 당시 ‘욘사마’의 인기가 어마어마했지요. 요미우리신문 서울특파원에게 이런 질문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대체 어느 정도의 스타, 유명인이 오면 공항이 마비되고 헬기 취재가 동원될까요?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어 머리만 긁적였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가 ‘한류’라는 이름의 새로운 문화 충격이 발아했던 시기라면, 2021년인 지금은 한류가 꽃을 피우다 못해 폭발하는 경지에 오른 것 같습니다. BTS가 발표하는 신곡은 빌보드 차트를 밥 먹듯이 오르내리고, 칸은 물론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을 거머쥔 영화들이 잇달아 나오는가 하면, 급기야 넷플릭스 세계 90국을 휩쓴 드라마까지 탄생했으니 말이지요.
최근 활기를 띠고 있는 극장가에서 본 영화만 해도 그렇습니다. ‘모가디슈’ ‘인질’ ‘보이스’ 등 흥미진진하게 본 건 죄다 한국 영화이고, 할리우드에서 만든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007-노 타임 투 다이’는 관람 중 잠시 졸았을 만큼 스토리가 지루하고 만듦새에 엉성한 구석이 많더군요. 한국관광공사가 연작으로 만들고 있는 ‘필 더 리듬 오브 코리아’도 영화 이상으로 재미있습니다. 가장 최근 발표된 ‘머드맥스-서산 편’은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를 패러디해 충남 서산 갯벌을 홍보하는 영상인데, 드넓은 갯벌에 수백 대의 경운기가 질주하는 모습에 2030 젊은이들이 “힙하다”며 찬사를 보냅니다.
한국인 DNA에 흐르는 해학과 풍자, 위트와 유머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민족성에서 나온 걸까요. 예전엔 이런 얘기를 하면 “너도 국뽕이냐?”는 핀잔을 들었는데, 달고나까지 히트시키며 전 세계에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오징어 게임’, 아메리카 갓 탤런트 무대를 열광시킨 한국의 2030태권도시범단을 보니 ‘K컬처’에 대한 자부심, 가져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재미없는 분야는 역시 정치입니다. 양당의 대선 경선 토론회만큼 지루하고도 실소가 터지는 프로그램이 또 있을까요. 국정 철학, 치열한 정책 대결은 보이지 않고 사소한 흠집과 해프닝을 잡고 참 끈질기게도 싸웁니다. 날만 새면 낯빛을 바꾸고 어제와 전혀 다른 말을 하는 후보의 모습은 섬뜩하더군요. 주위에선 “뽑을 사람이 없다”며 한탄을 하니, 차라리 달고나 게임으로 대통령을 뽑으면 재미는 더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잠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