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 당연히 참가해야죠. 드라마 보면 5만원권이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이 나와요. 그 돈이면 제 빚 다 갚고 고시원 생활도 청산할 수 있겠다 싶죠. 물론 다른 참가자를 해쳐야 한다는 걸 모른다는 전제에서….”

한국 드라마 사상 처음으로 넷플릭스 전 세계 1위에 오른 드라마 ‘오징어 게임’은 빚에 쫓긴 이들이 꿈꾸는 판타지다. 모두 거액 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게임에 참가한다. 하지만 드라마 밖 실제 채무자들은 빚의 무게에 눌린 채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다. 작년 기준으로 다중 채무자(금융회사 3곳 이상에서 대출받은 사람)는 423만6000명, 이들이 받은 대출 총액은 517조6000억원에 달한다. ‘인생 한 방’을 노릴 수 있는 오징어 게임조차 그들에겐 사치다. 줄지 않는 빚과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진짜 채무자의 삶을 따라가 봤다.

채무자 박모(28)씨가 거주하고 있는 서울 강동구의 한 고시원. 박씨는 1.2평 방 한 칸에서 먹고, 자고, 씻는다. 식비를 아끼려고 하루 중 한 끼는 그동안 모은 동전으로 컵라면을 사 먹는다. /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이 정도야, 금방 갚을 줄 알았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동구의 한 고시원. 싱글 침대와 책상, 변기가 1.2평 방에 모두 들어가 있는 협소한 공간이다. 이곳에 사는 청년 채무자 박모(28)씨는 “그나마 한 뼘 너비 창문이 있으니 좋은 방에 속하죠” 하며 웃어 보였다. 그는 주거 급여로 받는 31만원에 4만원을 보태 고시원 월세 35만원을 낸다. 식비를 아끼려고 하루 한 끼는 그동안 모은 동전으로 컵라면을 사 먹는다.

지금까지 박씨가 빌린 돈은 총 6600만원. 고등학생 때 아버지의 폭력을 버티지 못해 가출하고 자퇴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고정적 직업을 갖지 못했다. 그러다 2016년 카드사에서 받은 100만원 단기 대출로 처음 빚을 지게 됐다. 당시 박씨는 편의점 점원, 성형용 필러 포장, 물류 업체 배송 등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금방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씨는 그 뒤로도 아르바이트가 끊길 때마다 200만원, 300만원씩 은행에서 대출받았다.

2019년 박씨는 은행 청원 경찰로 일하게 됐다. 고정 수입이 생기자 씀씀이가 커졌다. 대출 액수는 1000만원대로 뛰었고, 모바일 게임에 빠져 수백만원씩 아이템을 사 모았다. 급기야 작년 5월에는 제2금융권에서 연리 20%로 1000만원을 빌렸다. 설상가상 다니던 은행은 박씨에게 계약 종료를 통보했다. 박씨는 말했다. “실직자가 되고 현실을 직시하니 절망스러웠죠. 그나마 현실 도피처가 모바일 게임이었는데, 조금만 아이템을 사도 사람들이 좋아해 주니까 잠시 정신을 잃었어요. 한마디로 폐인이 됐죠.”

◇투자 실패한 ‘상우’, 내 모습 같았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투자로 일확천금 벌어야지’ 생각했어요. ‘오징어 게임’ 등장인물 중 생선 가게 아들로 증권 회사에 다니다 투자에 실패해 빚더미에 앉은 ‘상우’(박해수)를 보니 마치 내 얘기 같아 보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어요.”

또 다른 채무자 이모(39)씨는 4100만원을 빚지고 있다. 10년 동안 월급으로 모은 3억원을 주식과 코인 투자로 모두 잃고 빚까지 생긴 것.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괴로웠던 이씨는 최근 들어서야 본인의 정확한 투자 손실액을 확인했다. 정확한 손실액을 알아야 체계적으로 빚 상환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올해 빚 900만원을 갚았다. 이씨의 목표는 3년 안에 모든 빚을 갚는 것이다.

생활비를 극도로 아끼기 위해 월세 25만원짜리 원룸에 산다. 한 달 생활비는 60만원가량. 월세에 통신비와 식비를 모두 합친 금액이다. 이전까지 배달 음식을 즐겨 먹었지만 요즘은 근처 시장에서 재료를 사 와 요리를 해 먹는다. 이씨는 “술 약속은 물론 친구들과 4000원짜리 커피가 부담스러워 카페도 못 간다. 인간관계를 거의 끊다시피 해야 돈을 모을 수 있다”며 “빚을 모두 갚고 나면 프로그래머를 모집해 스타트업을 창업하고 싶다”고 말했다.

◇벼랑 끝에 선 당신, 어떤 선택을 할까

“오죽하면 오징어 게임에 참여할 생각을 할까 싶겠지만, 벼랑에 내몰린 사람이 뭔들 못 하겠습니까. 남은 힘 쥐어 짜 하루를 살아도 남은 빚 언제 다 갚을지…. 위태로운 내 삶 자체가 오징어 게임이죠.”

이날 오전 11시, 박씨는 서울 강남구의 비영리 신용 상담소 ‘희망 만드는 사람들(희만사)’을 찾았다. 희망을 놓지 않고,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채무 상환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다. 박씨는 매달 채무 상환 금액과 생활비 항목이 적절한지 물었다. 김민철 신용 상담사는 “당장은 주거‧생계 급여가 채무 상환으로 모두 충당되겠지만 앞으로 채무 상환이 꾸준히 이뤄질 수 있도록 비율 조정 등을 꼼꼼히 봐 드리겠다”고 했다.

이곳 희만사에서는 올해 초부터 지금까지 채무자 1500여 명이 상담을 받았다.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나 기초생활수급자는 무료이며, 주로 전화로 비대면 상담이 이뤄진다. 올해 전체 상담자 80%가 무료로 상담을 받았다. 이승민 희만사 대표는 “코로나가 길어지다 보니 자영업자뿐만 아니라 소득이 줄거나 일시적으로 끊겨 상담 요청하는 개인도 늘었다”며 “30억원 빚진 사업자보다 1000만원 빚진 20대 청년이 더 불안해하기도 한다. 액수보다는 개인이 느끼는 불안이나 소득 수준, 연체 상황 등에 맞춰 상담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징어 게임 참여 전, 한 번이라도…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채무 조정 제도를 활용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빚을 정상적으로 상환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신용회복위원회를 통해 채무 조정을 받거나, 법원에서 개인 회생 또는 파산 면책 선고를 받는 것. 법원 선고를 위해서는 고액의 법무사 선임 비용을 따로 부담해야 하므로, 신용회복위원회에서 먼저 채무 조정 상담을 받는 편이 낫다. 신용회복위원회 상담 신청비는 5만원. 사회취약계층은 면제받을 수 있다.

신용회복위원회 서울중앙지부 정종식 부지부장은 “오징어 게임에서는 드라마적 요소를 위해 채무자의 좌절이 부각됐지만 신용회복위원회 상담을 통해 채무 조정을 하는 등 희망은 있다”며 “당장 생계가 어려우니 빚을 또 다른 빚으로 해결하는 사람이 많은데, 신용회복위에서는 다른 금융권에서 빚을 내는 대신 기존 채무 관리를 하도록 돕고 있다”고 했다.

신용회복위원회의 개인워크아웃 제도를 통해 박씨 역시 빚 6600만원 중 원금 일부를 감면받아 앞으로 8년에 걸쳐 3200만원만 갚게 됐다. 박씨는 “빚진 사람이 제일 두려워하는 게 빚 독촉인데, 채무 조정에 들어가는 순간 추심 문자나 전화가 중단되어서 안심했다”고 말했다.

◇신용불량자, 유튜브로 희망 전도사 되다

이씨는 지난 6월부터 자신의 일상을 유튜브에 영상으로 남기고 있다. 얼굴이나 신상을 노출하지 않고 오로지 목소리와 생활 모습만 담는다. 이씨는 “솔직히 말하면, 유튜브 광고 수익금이 조금이라도 빚 갚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응원한다’ ‘아직 젊으니 힘내라’는 댓글을 보면 울컥한다”고 했다.

박씨도 3개월 전부터 자신의 ‘빚 투쟁기’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영상 4~5개를 꾸준히 올리고 있다. 박씨는 가장 기억에 남는 댓글 하나를 꼽았다. “빚 때문에 가족에게 무시당하는 가장인데, 영상 보고 다시 일어설 결심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박씨는 “구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책임지고 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유튜브 채널에 후원 계좌 번호를 올려보는 게 어떠냐고 박씨에게 기자가 물었다. 채널 댓글 중에도 박씨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며 후원 의사를 밝히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자 박씨는 말했다. “솔직히 말하면, 저 아직 게임 중독에서 못 빠져나왔어요. 겨우 참고 있는데 후원으로 돈을 쉽게 벌면 또 무너질지 몰라요. 그러니 제 힘으로 다시 서볼게요. 느리고 막막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