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니 정씨는 처음부터 좀 수상한 사람이었다. 면접 보러 왔는데,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온 사람은 정씨가 처음이었다. 하긴 편의점 알바 면접을 그런 차림으로 오지 말란 법은 없지. 어쨌든 약간 과장돼 보였다. 증명사진까지 제대로 붙은 이력서 필체는 그 옛날 펜글씨 교본처럼 반듯했고, 거기 적힌 내용은 화려하고 놀라웠다. 영어 학원을 오래 운영했고, 어학 교재를 만들어 출간한 적도 있고, 출신 학교는 내가 감히 원서조차 내밀지 못한 대학이었다. 배달 라이더 모집했더니 우주비행사가 찾아온 격이랄까. 아니, 이런 분이 편의점엔 왜?

“요새 학원이 안돼서요. 이 나이에 강사 자리 얻는 것도 힘들어요.” 말끝을 흐렸다. 아, 그렇군요. 안쓰럽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S전자 출신 퇴직자가 면접 보러 온 적도 있고, 갭투자로 아파트를 세 채나 갖고 있다는 분이 면접을 봤던 적도 있는데, 학원장 출신이 오지 말란 법도 없지. 일만 시켜주면 열심히 하겠다고 정씨는 의욕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자리에서 채용을 결정했다. 정씨 몸집이 우람해 특대 사이즈 근무복을 따로 주문해야 했지만 열정을 보이는 사람을 위해 그 정도 투자쯤이야. 그러고 보면 자기 집 근처 편의점 놔두고 30분 넘게 버스 타고 와야 하는 우리 편의점에 굳이 왜 지원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했어야 했는데, 나는 마냥 좋은 방향으로만 받아들였다.

일러스트=김영석

정씨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알고 싶은 마음이 ‘일’이 아니라 ‘가게’에 집중된 것이 문제였다. 하루 손님은 몇 명인지, 건물 임차료는 얼마인지, 월 매출은 어느 정도인지, 인건비 외에 고정지출 비용은 무엇인지, 그러면 순이익은 얼마나 나오는지, 그런 것을 자꾸 캐물었다. 점장이 “새로 들어온 정 매니저가 이상하다”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편의점 차리려고 그러세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더니 생글생글 웃기만 하더라나. 그러던 정씨는 보름 만에 편의점을 그만뒀다. 문자메시지 한 줄 단호하게 전송하고 나오지 않았다. 몇 개월 지나, 정씨 SNS 프로필 사진이 어느 편의점 배경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9년째 편의점을 운영하며 이런 일을 서너 번쯤 겪었다. 창업을 염두에 두고 ‘사전 답사’ 차원에 알바를 지원하는 분들이 간혹 계신다. 프랜차이즈 가맹을 하면 예비 점주 교육을 받는데, 그때 직영점이나 시범 점포에서 경험을 쌓기 때문에 굳이 다른 가맹점을 찾아갈 필요까진 없다. 어쨌든 노력과 열정은 존중한다. 이것저것 알아보지 않고 덜컥 창업 전선에 뛰어들었다가 후회하는 사람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 회사엔 가본 적도 없고, 사업에 대해 알지도 못했다면서 무슨 대가성인지 모를 ‘자문료’를 매달 1500만 원씩 꼬박꼬박 받았다는 전직 대법관님이 계시고, 6년간 말(馬)처럼 일한 퇴직금을 기껏 50억 받았다는 국회의원 아드님의 억울한 사연도 있는데, 정 씨의 사소한 위장(?) 취업 따위 그리 나무랄 일도 아니다. 갑도 을도 아닌, 병과 정들의 세상에서 속고 속이는 해프닝일 뿐. 그래도 직원을 새로 채용하고 교육하는 일에 적잖은 품이 들어가는 법이거늘, 다음 근무자를 탐색할 겨를조차 주지 않고 갑작스러운 ‘결근 겸 퇴사’라니.

정씨를 위해 특별히 주문한 근무복은 아직 아무도 입지 못한다. 창고 한 구석 옷걸이에 덜렁덜렁 흔들리는 근무복을 볼 때마다 떠나간 정씨의 듬직한 풍채를 떠올린다. 처음부터 솔직히 말했더라면 더 좋은 관계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뒤늦게 축하 화환이라도 보내드릴 걸 그랬나.

세상엔 내가 취한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깊이 고려하지 않는 사람들이 적잖다. 정씨도 지금은 알바생을 면접하고 있으리라. 좁은 계산대 안에서 손님과 복작이는 일상을 견디고, 하루하루 매출에 머리를 쥐어뜯는 편의점 점주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메시지 하나 달랑 남겨놓고 나오지 않는 ‘자유주의자’ 알바생에게 분개하고 있을 것이며, 점포 내외부를 엉큼한 눈빛으로 훑어보는 낯선 방문자를 경계하며 이웃 편의점과 경쟁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요즘처럼 어수선한 상황에도 편의점 운영 잘하시길. 입장 바꿔 인생을 겪다 보면 상당한 일이 명징해지고, 또 한편으로 너그러워진다.

3년간 일한 직원이 건강이 좋지 않아 조만간 그만둬야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리 급할 것은 없으니 천천히 새로운 직원을 구해보란다. 마음 같아서는 퇴직금 겸 산재 위로금을 100억원쯤 안겨줬으면 좋으련만 우리 편의점은 화천대유하지 않으니 무사태평만 바랄 뿐이다. 이번 구인 광고에는 또 어떤 사람들이 찾아올까. 부디 저 XXL 사이즈 근무복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웅장한 ‘설계’가 내게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