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후우. 할 수 있다.”
9대13. 남은 시간은 3분. 패색이 짙은 상황에서 박상영은 숨을 몰아쉬며 ‘할 수 있다’를 주문처럼 외웠다. 가까스로 한 점을 따라잡았지만 상대는 만만치 않았다. 10대14. 주문이 통했던 걸까. 1점만 내줘도 지는 상황, 박상영은 연속으로 4점을 따냈다. 14대14. 올림픽 금메달까지 단 1점. 심판의 마지막 ‘알레(allez·시작)’ 구령에 두 선수 모두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승자는 번개처럼 상대의 머리를 찌른 박상영이었다. 15대14. 스물한 살의 박상영은 이렇게 2016년 리우올림픽에서 한국 올림픽 사상 최초의 펜싱 에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죽기 전엔 포기하지 말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해 준 경기’ ‘패기와 열정의 에너지가 TV를 뚫고 나와 결국 감동을 선사했다’ 등의 찬사가 줄을 이었다.
그로부터 5년. 박상영은 2020 도쿄올림픽에서도 활약하며 한국 남자 에페 최초의 단체전 동메달을 이끌었다. 이번에도 역전승이었다. 리우올림픽 땐 포효하며 승리를 만끽했던 그가 이번엔 피스트(piste·펜싱 경기대)에 주저앉아 굵은 눈물을 쏟아냈다. 금메달을 땄을 때도 보이지 않았던 이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박상영은 리우 이후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슬럼프에 빠져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할 수 있다’는 ‘해야만 한다’는 부담으로 바뀌어 그의 어깨를 짓눌렀다. 간신히 기량을 회복하고 올림픽을 준비하는데 온갖 고비가 찾아왔다. 박상영은 “‘죽고자 하면 살 것’이란 마음으로 임했다”고 회고했다.
올림픽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늦여름, 박상영(26)을 만났다. 훤칠한 키에 소년 같은 웃음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는 “(도쿄올림픽 준비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겪어서 할 얘기가 많을 것 같다”며 웃었다.
◇진통제 15알씩 삼키며 뛰었다
-올림픽 이후 한 달, 어떻게 지냈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 2주간 자가 격리했다. 그 뒤 국가대표 선발전 경기를 치렀는데, 무릎에 통증이 있어서 개인전은 16강에서 기권했다. 단체전은 결승에서 기권해 은메달을 땄다.”
-무릎 통증이 심각한가.
“앉기가 힘들다. 올림픽 두 달 전부터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있었다. 치료와 훈련을 병행하며 계속 진통제와 소염제를 복용했다. 한 번에 5알, 하루에 15알씩 먹었다.” 동메달 시상대에 올라선 박상영의 팔과 다리는 온통 테이핑투성이였다. 전 세계 에페 선수 가운데 가장 공격적인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온몸이 ‘부상 병동’이다.
-동메달을 딴 뒤 인스타그램에 ‘역사 하나 썼다’고 적었더라.
“아무도 안 써주시길래…(웃음). 이번 올림픽이 너무 간절했다. 솔직히 단체전보다는 개인전이 메달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올림픽 두 달 전에야 팀이 결성됐다. 손발을 맞춰본 적도 몇 번 없는 상황에서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치 않게 동메달을 딴 거다. 진짜 ‘우리가 역사를 썼구나’ 하는 자부심이 들었다.”
-중국전 역전승이 짜릿했다.
“(마지막에 만난) 중국 둥차오 선수에게 자신이 없었다. 그 선수한테 한번 진 적이 있다. ‘무조건 역전해야겠다’는 욕심으로 경기하니 점수 차가 더 벌어졌다. 그런데 영준이 형이 동점으로 잡아줬다(권영준은 34대34 동점을 만들어 박상영에게 바통을 넘겼다). 피스트에 올라가는데 도망가고 싶더라. 그래도 ‘내 손으로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비장했다.”
-승리 직후, 왜 그렇게 울었나.
“올림픽 준비하면서 뭐가 수월하게 풀린 적이 없다. 2020년에 몸이 좋았다. 국제펜싱연맹 월드컵 개인전 은메달도 땄고, 단체전 금메달도 땄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올림픽이 1년 연기가 됐다. ‘올해가 아니면 메달을 못 딸 것 같은데’란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다잡고 열심히 훈련하는데, 갑자기 봉사 활동 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외국에 나갈 수 없다는 통지를 받았다. 올림픽이 100일도 안 남은 시점에 선수촌에 못 들어가고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그 학교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왔다. 훈련도 못 하고 2주 자가 격리를 해야 했다. 입에서 욕 나오더라. 세상이 나에게 ‘너는 메달을 못 딴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동메달을 딴 거다. 눈물이 쏟아졌다.”
박상영은 2015년 십자인대 파열로 군 면제를 받을 수 있었지만, 군 면제 대신 2014 인천아시안게임 금메달로 받은 체육 요원 대체 복무를 선택했다. 그런데 체육 요원이 채워야 하는 544시간의 의무 봉사 활동이 이번 올림픽 준비에 걸림돌이 됐다. 그는 자가 격리 동안 울산 훈련장에서 심판대 등 기구를 용달차에 실어와 경남 진주 부모님 집 옥상에 간이 피스트를 설치해 훈련했다. 그는 “발버둥이라도 쳐보자 해서 한 것”이라고 했다.
◇모두가 안 될 거라 했던 메달
-중국전도 역전승이었는데, 8강전인 스위스전도 역전승이었다.
“우리가 약세라고 생각했다. 상대 전력이 너무 강했다.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내가 막내지만, 나까지 긴장하면 형들이 흔들릴 것 같단 생각이 컸다. 4점 뒤진 상태에서 들어갔을 때는 지금 우리가 지고 있다는 상황 그 자체를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안 찔려야겠다’는 생각 하나뿐이었다. 상대의 빈틈을 보고 휘몰아쳤다.” 박상영은 스위스전에서 4점을 뒤진 상황에서 피스트에 올랐다. 연달아 6점을 뽑아내며 승기를 잡은 그는 3분 동안 14점을 따내며 5점 차 승리를 견인했다.
-경기 전날 108배를 했다고.
“‘저 때문에 안 지게 해주세요’ 하며 빌었다. 형들이 동영상을 찍어주면서 너무 웃기다고 했다(웃음). 내가 흔들리면 아예 진다는 생각에 그랬다. 경기 전에 여자 에페 단체 은메달, 남자 사브르 단체 금메달 등 좋은 소식들이 많았다. (펜싱에서) 메달의 맥이 이어지고 있는데 우리가 끊으면 죄책감에 너무 힘들 것 같았다.”
-메달 소식에 주변 반응은.
“다른 선수들 메달 딸 때는 다 환호하며 웃더니, 우리가 따니까 울더라. 처음에 다 안 된다고 했다. 랭킹으로 봐도 메달권이 아니었다. (박상영의 세계 랭킹은 8위, 나머지 3명은 50위 밖이었다.) 모두가 안 된다는 걸 해냈다.”
-개인전에선, 리우 챔피언으로서의 부담이 상당했을 것 같다.
“엄청 심했다. 불면증을 앓았다. 비인기 종목은 대중의 관심을 4년에 한 번씩 받는다. 저번(리우올림픽)에 나는 최고의 평가를 받았고, 그때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도쿄올림픽이 나란 사람을 세상에 또 한번 각인하는 시험대란 생각이 드니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중압감이 컸다.”
-16강 일본전은 시원하게 이겼는데.
“미노베 가즈야스 선수는 ‘아시아 최초 세계 랭킹 1위’란 타이틀을 갖고 있는 선수다. 내가 11개월간 세계 랭킹 1위를 유지하다가 마지막 한 시합을 방어하지 못해 놓쳤다. 그래서 이 선수는 꼭 이기고 싶었다. 분석을 많이 했다. 머릿속으로 (미노베와) 몇 천 판은 뛴 것 같다.”
-8강에서 세계 랭킹 1위 게르게이 시클로시(헝가리) 선수를 만난 게 운이 없었다.
“랭킹 1위라서 겁먹고 이런 건 없었다. (올림픽 2연패라는) 내 꿈이 좌절됐다는 사실에 상실감이 컸지만, 한편으론 끝나고 나니 후련했다.”
-김정환(펜싱 사브르) 선수가 리우 때 사브르 종목 최초 메달을 땄는데, 박상영의 ‘할 수 있다’ 한마디에 묻혔다고 하더라.
“하하! 내가 지금 딱 그런 느낌이다.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 딴 ‘어펜저스(남자 사브르 단체팀)’가 나와버리면서 우리(에페팀)는 다 죽어버렸다. 지금은 펜싱 하면 무조건 어펜저스다. 김정환 선수의 5년 전 그 마음이 공감됐다.”
-메달 색깔에 따라 국민들 반응이 다를 것 같다.
“공항에서 가장 많이 느낀다. 금메달을 땄을 때는 공항 문이 열리는 순간 카메라 플래시 세례가 말도 못 한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다. 동메달은 인사 좀 하다가 좌회전해야 한다(웃음). 그런데 이번에 새로 느낀 게 있다. 예전엔 ‘올림픽은 무조건 금메달을 따야 한다’ ‘금메달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말을 많이 했는데 이젠 꼭 그렇지도 않더라. 특히 우상혁(높이뛰기 4위) 선수처럼 긍정과 희망의 메시지를 준 선수들에게 큰 응원과 박수 보내주시는 걸 보고 기뻤다.”
◇ ‘기적의 사나이’ 감사했지만 부담
-국민들에겐 박상영의 ‘할 수 있다’가 아직도 강렬하다.
“리우올림픽 끝나고는 알아보는 분이 정말 많았다. 한번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는데 밖에서 ‘혹시 할 수 있다 아니세요?’라고 하더라. 민망해서 대답을 안 하니까 문을 두드리며 ‘할 수 있다 아니에요? 저만 알고 있을게요’라고 하셔서 ‘맞아요’ 했다(웃음).”
-한동안 ‘기적의 사나이’ ‘긍정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너무 감사했지만 부담스러웠다. 더 잘해야 하고, 더 잘하고 싶었는데, 늪에 빠진 듯 점점 안 됐다.”
박상영은 리우올림픽 뒤 슬럼프에 빠졌다. 2017-2018년 국가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자비로 세계 대회에 출전해야 했다. “진짜 죽고 싶었다. 그만두고 싶고, 쪽팔리고….”
-어떻게 극복했나.
“승부욕이 강해서 내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 못 했다. 그런데 ‘그래, 나 못해’ 인정하고 내려놓으니 오히려 경기가 잘 풀리더라.” 그는 2017년 10월 월드컵, 12월 국제그랑프리 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도쿄올림픽 근대5종에서 동메달을 딴 전웅태, 펜싱 사브르 단체전 금메달을 딴 오상욱 선수와 친하다고 들었다.
“웅태는 한국체육대학 동기다. 같이 수업도 듣고 운동도 많이 했다. 근대5종에도 펜싱이 있어서 웅태가 펜싱 관련해서 많이 물었고, 나는 멘털 부분을 많이 물었다. ‘너는 안 불안해?’ 하면서. 같은 입장이니 위로가 많이 되더라. 상욱이도 마찬가지다. 상욱이는 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메달 안 따도 행복할 것 같다’고. 그 얘기를 듣고 ‘나는 너무 절박한데, 이 친구는 즐기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절박한 마음을 줄이고, 즐기는 마음을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 미래에 살지 말고 현재에 살자
-리우올림픽 이후 변한 것이 있다면.
“실력이 좋아졌다. 보이는 것도 많아져서, 상대 동작의 의도를 이제 알 것 같다. 그런데 예전엔 상대가 막더라도 내가 강하게 뚫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공격했는데, 지금은 두려움이 많다. 펜싱을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1도 변하지 않았다.”
-이미 세계 정상을 찍었는데, 더 잘하고 싶다고?
“다른 사람들이 ‘잘한다’고 평가한대서 내가 잘하는 게 아니더라. 잘한다는 게 영원한 것도 아니고.”
-선수 인생 중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
“매 순간이 힘들었다. 에페는 힘과 키가 중요한데, 힘이 센 것도 키가 큰 것도 아니라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매일 했다.”
-그런데 왜 계속하나.
“모르겠다. 도쿄올림픽 전에도 ‘그만둬야겠다’ 생각했다가, 끝나니까 ‘파리올림픽을 위해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굳이 답을 찾자면, 재미있기 때문인 것 같다. 펜싱은 힘과 스피드를 갖고 두뇌로 겨루는 수 싸움이다. 상대도, 전략도 늘 바뀐다. 그게 너무 재밌다.”
박상영은 한때 의도적으로 펜싱을 멀리한 적이 있다고 했다. 불안감 때문이다. “부재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말이 정말 맞더라. 어느 날 내가 물병을 펜싱 칼 쥐듯 쥐고 있었다. 내가 정말 펜싱에 미쳐 있구나 생각했다.”
-펜싱하면서 가장 좋았을 때는.
“매 순간이 좋다. 지금은 도쿄올림픽 동메달 딸 때가 제일 좋았다. 리우 금메달보다도 좋았다.”
박상영은 휴대전화 메모장에 훈련 일지를 작성한다. 주로 심리적인 고민을 적는다. 하나만 보여달라고 하자 “오글거린다”며 망설이던 그가 도쿄올림픽 개막 전날인 지난 7월 22일에 적은 메모를 보여줬다.
‘스트레스와 불안을 두려워하고 부정한다면 나는 인생의 절반 이상 혹은 대부분을 부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져도 괜찮다. 어떠한 결과가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어림짐작하려고 하거나 컨트롤하려고 하지 말자. 미래에 살지 말고 현재에 살자.’
◇형편 어려운 ‘어린 상영이’들 돕고 싶다
경남 진주 출신인 박상영은 중1 겨울방학 때 처음으로 펜싱 칼을 잡았다. 체육 선생님 권유로 펜싱부에 가봤고, 검도와 비슷한 건 줄 알고 펜싱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전까진 잘한다는 칭찬을 별로 못 받아봤다. 그런데 펜싱 선생님들이 ‘너 진짜 잘한다’고 칭찬해주시더라. 가족처럼 끈끈한 펜싱부 분위기도 좋았다.” 그가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던 건 중3부터다. 2010년 한 해에만 전국 대회 메달 8개를 휩쓸고 소년체전 최우수선수상도 받았다. ‘괴물’ ‘천재’란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녔다. 2013년, 그는 최연소 펜싱 국가대표가 됐다.
-펜싱은 처음부터 잘했나.
“아니다. 시작하고 2년 가까이 입상조차 못 했다. 나는 항상 내가 노력하는 것에 비해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중학생 때도 오전 8시에 운동이 시작되면, 6시까지 체육관에 가서 개인 운동을 했다. 연습 끝나고도 혼자 연습을 더 했다. 최고로 잘하고 싶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다던데.
“아버지가 사업을 했는데,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었을 때부터 사정이 안 좋았다. 이사도 정말 많이 다녔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이 집에 놀러왔는데 ‘야, 이게 집이냐’란 말을 한 친구도 있었다. 상처를 많이 받았다. 엄마한테 운동복 살 돈을 달라고 하는 게 미안해서 말을 못 했다. 선배들 옷을 받아서 입기도 하고, 세 장에 만 원 하는 티셔츠를 사서 입기도 했다. 비싼 펜싱 칼이 부러질까 봐 제대로 연습도 못 했다.” 박상영은 2013년부터 3년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후원 덕분에) 처음으로 개인 도복을 입어봤다”고 했다. “너무 좋았다. 칼이 부러지더라도 운동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든든했다.”
-부모님이 누구보다 기뻐하셨겠다.
“엄마는 그때 얘기만 하면 아직도 운다. ‘해준 게 없다’ ‘공짜로 키웠다’ 이런 말씀을 한다. 엄마가 주기적으로 주민센터 같은 데 가서 줄을 서 쌀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다. 엄마가 ‘그땐 미안했다’란 말씀 하실 때마다 마음이 안 좋다. 그런데 엄마는 나한테 정말 많은 걸 해주셨다. 나를 믿어주신 것 자체가 감사하다.”
-포상금과 CF출연료 등을 모교인 진주 제일중, 경남체고 펜싱부에 기부했던데.
“후배 중에 예전의 나보다 더 안 좋은 상황에 처한 친구가 있다. 그 친구만 도와주면 되레 상처를 받을 수 있으니 학교에다 기부했다. 내가 운동할 때 현실적인 고민이 많았다. 친구들이 빨래할 때 섬유유연제를 쓰는 게 부럽고, 나이키 운동복도 갖고 싶고 그랬다. 후배들은 그런 걱정 없이 운동하게끔 도와주고 싶었다.”
박상영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세계 최고가 돼서 어려움 겪는 아이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고 했다. “지금은 세계 최고가 뭔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내가 아직 더 달려야 한다는 거다. 세계 최고가 아니어도, 지금도 어딘가에서 힘들게 운동하고 있을 어린 상영이들을 돕고 싶다.”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나.
“아침 8시에 일어나 10시에 운동하고, 병원 갔다가, 오후 3시부터 다시 운동한다. 운동은 항상 해야 한다.”
-펜싱 말고 좋아하는 게 없어 ‘미친 펜서’란 별명도 있던데.
“하하! 그건 아니다. 술도 좋아하고, 친구들과 노는 것도 좋아한다. 최근엔 게임 리그오브레전드(롤)를 시작했다. 내가 나름 긍정의 아이콘인데, 롤만 하면 (게임이 어려워서) ‘이건 무조건 졌다’며 부정적으로 변한다(웃음).”
리우올림픽 직후 박상영의 꿈은 그랜드슬램(아시안게임·세계선수권·올림픽 석권)이었다. 지금의 꿈은 뭘까. “그랜드슬램, 올림픽 2연패 다 좋은데, 그것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발걸음이 멈추는 데까지 가보고 싶다. 내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그게 제일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