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지하철에서 머리가 지끈거린 직장인 봉달호씨. 두통약 사려고 회사 건물 1층 편의점에 들렀다. 의약품 진열대 앞에서 상품을 고르고 있는데 부장님이 들어오신다. “어이, 봉 대리. 여기서 뭐 해?” “살 게 좀 있어서요.” 인사를 꾸벅했다. “그래? 어서 골라. 내가 사줄게.” 부장님이 계산대를 가리켰다. 아싸! 봉 대리는 얼른 두통약 상자를 집어 계산대에 올렸다. 부장님 표정이 의심하는 눈초리로 경직된다. “아침부터 이게 필요해?” 봉 대리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 생활필수품이 다되었네요. 요새 무리하는가 봐요. 헤헤헤.” 계산대에는 콘돔 상자가 아담하게 놓여 있었다. 두통약을 고른다는 걸, 부장님이 사주신다니 서두르다가, 덥석 그걸 움켜쥔 것이다. 아침부터 구입한, 생활의 필수품. 하긴 요새 봉 대리가 무리하긴 했지….

일러스트=김영석

“이거 우리 가게 이야기 같지 않아요?” 하면서 직원이 편의점 단톡방에 올린 내용이다. 웃기는 사연 올리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발견한 이야기란다. ‘ㅋㅋㅋ’가 연달아 튀어나왔다. “계산대 근무자도 눈이 두 배는 커졌겠는걸?” 하면서 다시 ‘ㅋㅋㅋ’가 이어졌다.

편의점에서 직장 상사를 만난다는 건 ‘땡잡은’ 일이다. “내가 살게, 여기 올려” 하는 목소리가 우리 편의점에선 매일 반복되는 풍경이다. 그럴 때 몇 가지 반응 유형이 있다. 첫째, 내숭형. “괜찮습니다” 하며 사양한다. “괜찮아, 어서” 하는데도 쑥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서로 ‘괜찮아’를 몇 번 주고받는다. 그러다 결국 올릴 거면서. 둘째, 축소형. 300ml 우유로 고르려다가 부장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급히 200ml짜리로 바꾼다. 거참 소심한 사람. 그래봤자 450원 차이인데. 그렇다고 부장님이 칭찬하는 것도 아닌데. 셋째, 편승형. “여기 기획실 신 대리도 있습니다” 하면서 부장님 의견은 묻지도 않고 다른 손님 것까지 슬그머니 숟가락을 얹는다. “어, 신 대리? 반가워” 하는 부장님 표정이 그리 반가워 뵈지 않는다. 넷째, 도발형. 갑자기 냉동고에서 1만3천원짜리 대용량 아이스크림을 꺼내는 손님이 있다. ‘이번 기회에’라는 미소가 짓궂다. 부장님 눈동자에 번뜩 불꽃이 튄다.

편의점 점주로서 나는 역시 ‘편승형’을 좋아한다. 기획실 신 대리뿐 아니라 회계팀 최 과장, 영업본부 박나래 사원, 홍보실 정 차장까지 회사 전 직원이 편의점 계산대에 숟가락을 얹었으면 좋겠다. 오늘 김 부장님께서 크게 한턱 쏘신다네! 모두 편의점으로 모이라고 사내 방송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평화주의자인 나는 ‘도발형’을 그리 선호하진 않는다. 다음부터는 편의점에 들어오기 전에 ‘아는 얼굴 없나?’ 하며 급히 내부를 둘러볼 부장님의 경계하는 태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고, 부장님. 봉 대리랑 정 차장이랑 벌써 다녀갔습니다. 한편으로 ‘내숭형’과 ‘축소형’ 손님에게는 힘껏 용기를 북돋고 싶다. “부장님이 사주신다잖아요. 고르세요. 기분 좋으실 때 맘껏 골라요.” 어쨌든 손님들의 다양한 목소리 가운데 “내가 살게, 여기 올려” 하는 목소리처럼 반가운 음성은 없다. 은하계를 몽땅 사줄 것처럼 믿음직한 그 목소리.

가끔 이런 일도 있다. 부장님이 호기롭게 나섰는데 신용카드가 먹통인 것이다. 휴대폰 지문 인식이 안 된다며 “왜 이러지?” 하면서 진땀을 흘린다. 여기저기 꿀꺽,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계산대에 있는 나도 잠깐 애가 탄다. 결국 “오늘은 제가 사겠습니다” 하면서 봉 대리가 나선다. 하긴 부장님만 사란 법은 없지. 2만원어치 넘는 음료와 과자를 봉 대리가 계산했다. 어째 표정이 모두 심상찮다. ‘일부러 그러신 것 아닐까?’ 하는 날카로운 의혹의 눈빛들이 오간다. 설마 부장님이 고의로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내가 감히 보증까지는 못 하겠고, 유독 카드 오류가 잦은 부장님이 계시긴 하다. 참 불가사의한 일이다. 나로서는 누가 계산하든 고마운 결과일뿐더러, 세상엔 너무 진지하게 확인하지 않는 편이 나은 일이 많다.

코로나19가 휩쓸어 간 풍경 가운데 하나는 “내가 살게, 여기 올려” 하는 목소리. 각자 조용히 들어왔다 조용히 빠져나가는 편의점이 되었다. 점심 식사 마치고 편의점 앞에서 아이스크림 누가 살까 가위바위보를 하던 신나는 함성, 간식 내기 ‘사다리 타기’ 하던 떠들썩한 오후도 2년째 사라졌다. 이번 여름 아이스크림 매출은 평년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유독 비가 많은 여름이기도 했다. 여름이 여름 같지 않게 지나가고 모든 계절이 계절 같지 않다.

낼모레면 찐빵 기계가 들어온다는 소식이다. 얼음컵 냉동고가 창고로 들어가고, 그 자리에 군고구마와 어묵이 허연 김을 내뿜으며 판매를 개시하겠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상 가운데 또 이렇게 올 것은 오고 갈 것은 간다. 두통약 대신 콘돔 상자를 올려놓아도 좋고, 300ml 우유 대신 200ml짜리로 바꿔도 좋으니, 그리고 종종 신용카드가 애를 먹여도 좋으니 다정한 목소리도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다. “어이, 봉 대리. 내가 살게, 여기 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