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말 오래간만에 모텔에 가봤네요. 그것도 대낮에~ 헉! 남자랑 단둘이 간 건 처음입니다.” 지난달 중순 네이버 골프 카페 ‘클럽카메론’에 올라온 글이다. 게시물엔 침대에 널브러진 옷가지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야릇한 상상은 접으시라. 글 쓴 이는 “라운드를 마치고 일하러 가야 해서 궁여지책으로 지인과 대실료 2만원을 주고 주변 모텔을 잡아 급히 씻고 나왔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2. “너무 찝찝해 골프장 화장실 세면대에서 웃통을 벗고 씻었죠. 센서 때문에 물이 자꾸 끊겨 한 손은 수도꼭지 센서에 갖다 대고 ‘생쇼’ 하고 있는데 청소 아주머니가 버럭 화를 내시더라고요. 화들짝 놀라 죄송하다곤 했는데, 엄연한 ‘남자’ 화장실에서 여자한테 혼난 거잖아요. 봉변 아닌가요?” 최근 인천의 한 골프장에서 40대 A(자영업)씨가 겪은 일화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가 발간한 ‘레저백서 2021’에 따르면 국내 골프 인구 수는 약 515만명. 골프 대중화 시대, 500만 골퍼들에게 요즘 예약 전쟁만큼 괴로운 골칫거리가 있다. 다름 아닌 ‘샤워 전쟁’. 지난 7월 25일 방역 당국이 수도권의 사회적 거리 두기 4단계를 연장하면서 골프장 등 실외 샤워실 운영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헬스장 등 실내 체육 시설 샤워실은 쓸 수 없는데 골프장 샤워실은 허용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제기된 데 따른 후속 조치였다. 코로나 확산세가 꺾이지 않으면서 수도권뿐만 아니라 거리 두기 3단계를 시행하는 비수도권 골프장도 대부분 샤워장을 폐쇄해 불편함을 호소하는 이들이 적잖다.
지난달 초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자동차로 최소 한 시간 이상 거리에 있는 집에 가서 샤워하는 것은 불편을 넘어 고통이며, 방역을 넘어 다른 위험을 부르기도 한다”며 ‘골프장에서 샤워할 수 있게 해달라’는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지만, 안 통했다. 골프장 샤워 금지 한 달여, 꼼수와 묘수를 넘나드는 별별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친한 형 셋과 친목 골프를 즐기는 30대 B씨. 얼마 전만 해도 막내인 그의 임무는 골프장 근처 맛집 예약이었지만, 요즘은 하나가 더 추가됐다. 숙박 앱을 열어 골프장 근처 모텔을 잡거나 대중목욕탕을 검색해 동선을 짜는 것이다. 그는 “모텔 사장님이 한 방에 네 사람이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4만원짜리 방 두 개를 잡은 적이 있다. 2인실을 두 시간에 2만원 주고 빌리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식당에 가도 맘 놓고 떠들지 못해 답답한데 모텔에서 깨끗하게 씻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으니 개운하더라”고 했다. 실제로 수도권 골프장 주변에선 골프 복장을 한 남자 넷이 짝을 지어 모텔로 들어가는 모습이 심심찮게 목격된다. 회사원 정모(39)씨는 “골프 모임 ‘단톡’에서 깔끔 떠는 한 명이 모텔을 잡자고 했다가, ‘남자끼리 욕실을 시차 없이 공유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나머지 멤버들이 반발해 무산됐다”며 웃었다.
대부분 골프장에선 임시방편으로 일반 물티슈보다 큰 크기의 일회용 물수건을 비치했지만, 땀에 흠뻑 젖은 몸을 닦아 내기엔 역부족이다. 인천의 한 골프장 관계자는 “한 장에 700~800원 하는 일회용 물수건을 라커 룸에 두니 한꺼번에 너무 많이 가져가 버려 감당이 안 되더라. 결국 라운드가 끝날 때 1인당 하나씩 주는 방식으로 바꿨다”고 했다. ‘깔끔파’에겐 성에 안 찬다. 골프복을 입은 채 바로 차에 가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놓고 수건에 생수를 적셔 온몸 구석구석을 닦고 옷을 갈아입는 사람도 있다. 대기업 팀장 C씨는 “골프를 끝내고 땀에 절어 근처 부대찌개 집으로 갔는데 땀 냄새에 찌개 냄새까지 섞이니 견딜 수가 없더라. 식당에 있는 물티슈 수십 개를 챙겨 차 안에서 샤워 수준으로 닦아냈다”고 했다.
한여름 무더위가 물러났다고 고비를 넘긴 게 아니다. 경기도 소재 모 골프장 관계자는 “가을장마가 이어지면서 무더위 때보다 손님들 불만이 더 많아졌다. 비에다 땀까지 젖으니 못 참겠다면서 한 번만 씻게 해달라고 막무가내로 물고 늘어지는 손님도 있다”며 “처음에는 샤워실 앞에 작게 ‘샤워 금지’라고 써 붙여 놨는데 이젠 아예 가림막을 쳐서 폐쇄해 버렸다”고 했다.
비즈니스 목적으로 골프 접대를 해야 하는 쪽에선 샤워 문제가 더 예민하다. 얼마 전 접대용 골프를 예약한 모 대기업 팀장은 “4시간 비 맞고 골프 친 뒤 흠뻑 젖은 채로 식사하는데 다들 집에 빨리 가고 싶다는 생각만 하는 것 같았다. 이전 같으면 느긋하게 탕에서 씻고 개운하게 식사를 모시는데 그걸 못 하니 아무래도 접대하는 쪽에선 신경이 쓰인다”고 했다.
샤워할 수 있는 골프장 찾아 삼만 리인 경우도 있다. 강원도 횡성, 평창 등 거리 두기 2단계를 유지해 샤워실을 이용할 수 있는 곳이나, 골프장에 붙어 있는 기업 연수원에서 샤워할 수 있게 해주는 골프장을 찾는다. 서울에 사는 40대 직장인 D씨는 “어르신들은 좀 멀더라도 느긋하게 샤워할 수 있는 2단계 지역을 많이 찾는데 우리같이 집안 눈치 보이는 30~40대 가장은 더러움을 감수하고라도 수도권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일부 골프장에선 샤워비 명목으로 그린 피를 1만~1만5000원 깎아 주기도 하고, 7000~8000원 하는 골프장 커피숍의 아메리카노를 제공하는 곳도 있다. 주변 호텔 사우나 이용권을 주거나, 라커 룸을 폐쇄하는 대신 카트료를 반값으로 할인해 주기도 한다. 한 골프장 관계자는 “미국이나 유럽에선 고급 골프장 아니면 샤워 시설이 아예 없는 곳이 많은데 한국은 사우나를 라운드의 마무리로 생각한다. 그 중요한 코스 하나를 뺀 것이니 그만큼 할인해 달라는 게 한국 정서”라며 “‘골프에서 샤워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