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셧다운 시절 베를린을 다녀온 H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즘의 독일 맥주는 별거 없다는 말이었다. 차라리 한국 맥주가 낫다고. 봉쇄된 도시에서 책을 보고, 맥주를 마시고, 서쪽의 드넓은 녹지인 그뤼네발트(Grunewald)를 걷기만 했다고 말해서 더 설득력이 있었다. 이유도 함께 분석해주었는데, “수요가 딱히 없어서”라고 했다. 듣자마자 무슨 말인지 감이 왔다. 그래서 “아아”하고는 이렇게 맞장구를 쳤다. “하긴 거기는 맥주보다 물이 비싸니까요.”
무슨 말인가 하면, 독일은 맥주가 정말 흔하다. 그리고 싸다. 물보다 싸다. 물이 맥주보다 비싸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싼 가격에 다양한 양질의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오랫동안 그래왔을 테고, 그러니 맥주에는 얼마 이상 지불할 수 없다는 심리상의 마지노선이 옹벽처럼 형성되었을 거다. 한 병에 삼만 원하는 와인은 사도 한 병에 오천 원 하는 맥주는 살 수 없다든가 하는.
나도 베를린에 삼 개월 머문 적이 있다. 독일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면 한결같이 “맥주 많이 마셨겠네?”라는 질문이 돌아왔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이제야 말씀드린다. 그때만 해도 맥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또 너무 흔해서 오히려 마시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술이 불법인 국가에 갔더라면 그보다 더 마셨을 것 같다. 흔하면 귀한 줄 모르게 된다. 그래서 음식을 주문하며 음료를 시킬 때 나는 맥주보다는 물이나 진저에일을 시켰다.
그럴 때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맥주가 제일 싼데”라고. 그러고는 맥주가 음료 중 제일 싸므로 맥주를 시킨다고 말했다. 반은 농담이겠지만, 반은 진지한 말로 들렸다. 그때의 베를린은 월세가 폭등하기 전이었지만 도시 생활자에게 생활비는 늘 빠듯하고, 손쉽게 아낄 수 있는 게 식비니까. ‘음식 하나에 음료 하나’ 시키는 게 그곳의 불문율이었기에, 맥주를 마시고 싶지 않아도 일단 맥주가 가장 싸니까 시키는 사람도 있었다. 독일에서의 맥주란 그런 것이었다. 자긍심의 원천이기도 하지만 가장 싸게 마실 수 있는 음료이기도 한.
이렇게 한참 이야기를 하고 나서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H는 요즘 ‘핸드앤몰트’라는 맥주가 괜찮다며 주문했다. 튤립 모양의 전용잔에 맥주가 나왔다. ‘The Hand and Malt’라고 금색으로 된 글자가 박힌 잔에. 맥주는 라거 특유의 황금색도 아니고 바이젠의 불투명한 살구색도 아니었다. 다른 스타일의 맥주였다. 호박색이라고 해야 할까? 버번위스키 색과도 비슷해 보였는데, 거품은 바이젠만큼이나 풍성했다.
벌써 한참 전이라 어떤 맛이었는지 선명하지 않다. ‘몰트(맥아)’라는 이름이 붙어서인지 홉의 쓴맛은 별로 느끼지 못했고 보리 맛이 강했다는 정도? 아주 맛있고, 시원했다는 것 정도? 맥주와 독일에 대한 이야기로 인해 한껏 고조되었던 ‘맥주욕’에 부합하는 맥주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강렬한 첫 잔이었다.
식전주이기도 했다. 안주를 기다리며 이 맥주를 마셨다. 맥주를 식전주로 먹어본 적은 많아도 이런 맥주를 식전주로 먹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맥주를 마시지만 맥주가 아닌 다른 무엇을 마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각별할 수밖에. 그래서 더 어떻다고 표현할 수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좋았던 순간에는 흠뻑 젖어 있기 때문에 세세한 정황을 떠올리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운 면이 있다.
핸드앤몰트는 한국에서 만들고 있는 맥주다. H가 요즘 한국 맥주가 맛있다고 하긴 했지만 이 맥주도 한국 맥주인 줄은 몰랐다. 남양주에 브루어리가 있고, 브루어리 투어도 한다. 홉과 몰트 같은 원재료를 보여주고, 맥주의 양조 과정을 설명해주고, 내가 마셨던 튤립잔에 5종의 맥주를 시음하는 코스였다. 코로나 때문에 요즘도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다녀온 분들의 후기를 보니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맥주를 크래프트 맥주라고 한다. 크래프트(craft)는 ‘장인(匠人)이 하는 작업’이라는 뜻이지만 크래프트 맥주가 장인이 만든 맥주는 아니다. ‘거대’ 자본을 가지고 ‘운용’하는 회사가 아닌 ‘소규모’의 맥주 양조장을 크래프트 브루어리라고 하고, 거기서 만들어지는 맥주를 크래프트 맥주라고 한다고, 나는 이해하고 있다. (여기까지 쓰다가 오비맥주가 핸드앤몰트를 인수했다는 걸 알게 되었는데, 그저 맛이 유지되길 바랄 뿐.)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게 된 게 그 무렵인 것 같다. 크래프트 맥주를 한 병씩 사고 하나씩 알아가고 할 무렵. 세상에 이렇게나 다양한 맥주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맥주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런 맥주를 모아놓은 매장에 서서 다양한 국적과 생소한 이름으로 된 맥주를 보고 있으면 말할 수 없이 부풀어 오른다. 마치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에 서서 어떤 책을 살지 고민을 하는 순간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베를린에서 지낼 때 내가 마셨던 맥주는 한국에서 마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라거보다 바이젠을 좋아하니 바이젠을 마셨고, 맛있는 라거가 많으니 라거를 또 마셨고, 레몬을 섞고 도수가 약한 맥주인 라들러를 마셨는데, 본질적으로 다른 맥주를 접한 건 아니었다. 대기업 맥주를 마셨다.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대기업 맥주를 마셨을 뿐.
크래프트 맥주를 마시면 마실수록 이건 정말 미국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쓴 맛이 강조된 맥주, 신맛이 나는 맥주, 체리 맛 맥주, 도수가 높은 맥주, 땅콩버터 맛이 나는 맥주, 커피 맛이 나는 맥주, 매운 맛이 나는 맥주 등등 다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맛이 있다. 자본주의의 용광로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다양성과 혼합과 변용의 각축장이랄까?
미국 영화감독인 데이비드 린치가 만든 1980년대 영화 <블루 벨벳>에 나오는 크래프트 맥주 이야기를 하고 싶다. 하이네켄은 집어치우고 팹스트 블루 리본(Pabst Blue Ribbon)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는 특이한 악당이 나온다고. 팹스트 블루 리본이 맥주다. 그러니까 원하는 맥주의 이름을 콕 집어 말한 거다. 그 덕에 비실비실했던 팹스트 블루 리본은 뜨기 시작한다. 그리고 힙스터 문화의 아이콘 같은 게 되었다나? 언젠가 브랜드 마케팅을 다룬 책에서 봤는데, 이 글을 쓰다가 생각이 났다.
‘음, 이게 블루 벨벳의 그 맥주로군.’이라며 맥주를 마셨었다. 마시면서, 확실히 뜬 게 맞긴 맞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2021년의 내가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도 이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게 아닌가. 팹스트 블루 리본을 마시며 이 맥주의 어떤 점이 ‘블루 벨벳’의 맥주가 되게 했는지 궁금했다. 흰색의 배경에 파란색 리본이 멋스럽고,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빨간색 선이 경쾌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 맥주는 경쾌해. 날아오르는 느낌! 크래프트 맥주가 특히 경쾌한 것 같다. 탄산이든 거품이든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톡톡 튀는 질감이든 말이다. 그러니 거부할 수 없을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