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들은 라떼 몇 잔을 들이켜도 된다.’ ‘라떼 무한 리필 가능!’

몇 달 전 유튜브에 올라온 6·25 참전 여군의 영상엔 이런 댓글이 달렸다. ‘라떼’ 혹은 ‘라떼는 말이야’란 유행어는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해 과거 얘기만 늘어놓는 기성세대를 풍자한 말. 하지만 청년들이 무조건 옛날 얘기를 싫어한다는 것은 편견이다. 끝이 안 보이는 터널에 들어선 듯 막막할 때 인생 선배의 쓴소리, 응원의 한마디를 갈구한다. <아무튼, 주말>이 그 멋진 만남을 주선한다. 첫 회로, 90년대생 기자가 전쟁의 한복판에서 병사들을 살려낸 구순의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한다. "제일 먼저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매일 출근하는 서울 종로구 보훈회관 사무실에서는 식물을 기르고 텃밭도 가꾼다. 할머니는 "보훈회관을 함께 쓰는 고엽제 전우회에서 선물해줬다"며 하얀 장미를 꺼내들었다. 꽃말이 존경이다./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그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기억이다.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보훈회관에 자리한 6·25참전유공자회 종로구지회. 박옥선(89) 할머니의 5평 남짓한 사무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아프가니스탄 카불 공항에 일어난 폭탄 테러로 13명의 미군이 순직했다는 소식이었다. 대부분이 20대 장병. 할머니는 70여 년 전 자신의 젊은 날을 떠올렸다. “백마고지 전투가 한창일 때 야전병원으로 밀려들어 오던 환자들 생각이 나요. 또다시 그런 젊은 생명을 잃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요.”

박옥선은 6·25전쟁이 발발하자 국군간호사관학교에 자원했다. 열여덟 살이었다. 간호 인력이 부족할 때라 기초 교육을 마치자마자 전장에 나가 부상당한 군인들을 돌봤다. 양구·철원·대구 등 수많은 병원을 돌아다녔다. 실려 오는 환자들을 보면 전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팔과 다리가 날아간 중환자들이 많은 날엔 ‘고지가 함락됐구나!’ 탄식했고, 평소보다 환자가 적게 들어오는 날엔 ‘잠잠해지려나’ 안심했다. 전방에서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할 수 없어 운동장에 가마니를 깔아놓고 치료하던 날들도 있었다.

휴전 후에도 중앙보훈병원(당시 국립원호병원)에서 일하며 월남전에서 다쳐 돌아온 군인들을 돌봤다. 전역하고 난 뒤인 2009년부터 현재까지 6·25 참전유공자회에서 일하며 참전용사들을 보살피고 있다. 전쟁의 그림자는 아직도 그녀를 뒤따라 다닌다. 아프가니스탄 난민의 고통도 그에겐 먼 나라 일이 아니다. “우리가 겪었던 역경을 똑같이 겪고 있을 거예요. 넓은 마음으로 품어줘야 해요. 어린아이들이 우리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게, 스스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줘야 해요.”

6.25 전쟁 당시 간호장교로 참전한 박옥선 할머니.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피란길 참상 보고 자원 입대

-저는 전쟁을 교과서로만 배웠지만,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하는 피란민을 보고 6·25를 떠올리는 분들 많더군요.

“아프간 사람들도 6·25 못지않은 고통을 오래도록 겪을 거예요. 가진 것 없이 피란만 가서는 해결되는 게 없으니까요. 우리가 피란 갔을 때 한 산모는 헛간에서 짚을 깔아놓고 애를 낳았어요. 상상해 보세요,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요즘은 호텔 못지않은 데서 애를 낳아도 힘들다고 난리들인데….”

-전쟁이 일어났던 날을 기억하세요?

“경기여중 5학년이었는데, 6월 25일에 교복을 맞추러 갔어요. 지금 문화일보사 건물 자리, 동양극장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삐라(전단)를 막 뿌려요. 38선이 터졌다고. 휴가 간 군인들은 부대로 복귀하고 민간인은 집에 가서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라고. 교복도 못 맞추고 허겁지겁 집으로 돌아왔지요.”

-간호사관학교엔 어떻게 가게 되셨나요?

“6·25 나고 낙동강까지 피란을 갔다가 9·28 서울 수복 때 집으로 돌아왔어요. 서울 시내가 불바다가 돼서 학교가 다 불타버렸지요. 서울의 동서남북으로 훈육소(임시 학교)가 생겨, 나는 서부훈육소에서 공부를 했는데 두 명의 간호장교가 학교에 와서 호소를 해요. 지금 38선에선 손이 모자라 사람들이 죽어간다고,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한 번쯤 나라 위해 일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국군간호사관학교에서 2기생을 모집하고 있으니 도와달라고요. 그 자리에서 손을 들었어요.”

-단숨에 마음을 먹기가 쉽진 않았을 텐데요.

“이미 내 몸으로 전쟁을 경험했으니까요. 아버지 목말을 타고 한강을 건너, 당시엔 모래밭이었던 여의도를 지나 안양·수원까지 갔어요. 수원까지 가니까 인민군이 벌써 우리를 앞질렀어요. 미군 전투기가 민간인과 인민군이 섞여 있으니 구별을 못 하고 폭격했지요. 그렇게 논두렁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내 눈으로 봤어요.”

-저라면 오히려 도망치고 싶었을 것 같은데요.

“내 앞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걸 봤는데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가 없잖아요. 아직도 그 사람들이 생각나요. 피란 갔을 때 열차에 매달려가던 사람들, 손수레에 아기들 실어서 끌고 가는 노인들…. 만약 간호 교육을 받으면, 후방에서라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만으로 자원했어요.”

박옥선 할머니가 정전 60주년 기념으로 받은 호국영웅기장. "제일 자랑스러운 메달이라 정복을 입을 때 항상 착용한다"고 했다./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목숨과 땅 맞바꾸던 전장에서 치료

담담하게 전쟁의 기억을 말하던 박옥선 할머니는 부모님을 떠올릴 때 처음 눈시울을 붉혔다. 딸이 자원입대한다는 소식을 뒤늦게 듣고 서울역까지 쫓아온 아버지를 돌려보내고 훈련소행 기차를 탔다.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눈물을 훔치던 뒷모습이 그녀가 본 아버지의 마지막이었다.

“아버지 임종을 못 봤어요. 그게 아직도 가슴이 아파요. 돌아가시면서 자식 얼굴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그런 걸 생각하면 나 자신이 미운 거예요. 내 고집으로 아버지 임종도 못 보고…. 젊은 사람들한테 효도하라고 꼭 말해주고 싶어요. 부모를 섬기는 사람은 나쁜 짓 못 해요.”

-아버지를 돌려보내고 바로 훈련소로 떠나신 건가요.

“그랬죠. 지금이야 2시간 만에 가지만 그땐 13시간 만에 부산에 도착했어요. 가니까 각 지역에서 온 사람을 큰 트럭에다 한꺼번에 싣더라고. 동래 범어사 밑에 천막을 쳐놓은 간이 훈련소에 들어갔어요. 다들 아무것도 모르는 초보니까 집중적으로 간호 교육을 받았죠.”

-훈련소 생활은 어떠셨어요?

“혹독했죠. 처음 부모를 떠나 생활하는 데다 훈련 일정이 빡빡했어요. 아침 5시 반에 일어나서 6시에 점호하고, 아침 8시부터 간호학 공부하고 오후엔 군사훈련을 했어요. 교육을 따라가야 하니, 밤에는 이불 뒤집어쓰고 플래시 켜놓고 공부했지요.”

-군사훈련까지 받으신 건가요?

“당시엔 총도 없어서 대나무 깎은 총으로 연습했어요. 수류탄은 실전에 써야 하니까 핀 빼고 끼는 법을 알려주고. 수류탄 던지는 훈련을 받다가 가까운 데서 터지는 바람에 고막이 상했어요. 그래서 한쪽 귀가 안 들려요.”

6.25 전쟁 당시 열차 안에서 부상자를 치료하는 간호장교의 모습. /국군간호사관학교

◇그 눈을 보고 어떻게 포기합니까

-훈련받고 얼마 안 돼 전방에 투입되셨다고요.

“강원도 양구의 야전병원으로 갔죠. 백마고지 전투, 옹진 전투 같은 치열한 전투에선 목숨하고 땅을 맞바꾸는 거나 마찬가지였어요. 팔다리 없는 아이들, 눈이 빠지고 코가 날아간 아이들을 내 손으로 받았어요. 사람이 그냥 우습게 죽어요…. 환자를 딱 보고 가망이 없다 싶으면 손을 떼야 해요. 환자는 많고 시간은 촉박하니까요. 회복할 수 있을 만한 사람만 걸러서 후방으로 보내야 했어요.”

-살 사람일지 죽을 사람일지 판단한다는 게 막중한 부담이었겠네요.

“그 자리에서 판단 못 하면 죽을 사람도 죽고, 살 사람도 죽으니까 그게 참 어려웠죠.”

-병원 환경도 열악했겠죠?

“상처에 바르는 빨간약도 부족해서 못 썼어요. 붕대도 없어서 홑이불 찢어서 감아주고. 그 정도로 우리나라가 어려웠어요.”

-특별히 기억에 남는 환자가 있나요?

“옹진 전투 때 한쪽 턱으로 들어간 총알이 반대쪽 볼로 나와서 얼굴이 아예 함몰된 환자가 들어왔어요. 차라리 눈이 빠졌으면 나았을 텐데, 눈이 공중에 떠서 덜렁거리는 거예요. 울면서 치료했어요. 친구들이 ‘도대체 그 사람이랑 어떤 사이길래 그렇게 정성껏 치료하느냐’고 할 정도로.”

-대체 어떤 사이였길래(웃음).

“환자하고 간호장교 사이죠! 친구들한테도 그랬어요. 우리가 나이팅게일 선서하지 않았냐. 나는 손 들고 선서했으니까 그 소임을 다하겠다. 다행히 그분이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아 계세요. 몇 년 전에 제가 TV에 나온 걸 보고 국방부에 연락하셨더라고. 몇 십 년 만에 서울역 제과점에서 다시 만났지요.”

-얼굴이 다 함몰됐는데 어떻게 살 수 있다고 판단하셨어요?

“눈이 살아있더라고요. 돌아가실 분들은 눈꺼풀을 뒤집어보면 눈망울이 허약해. 그런데 그분은 눈빛이 또랑또랑해요. 그 눈을 보고 어떻게 포기합니까. 친구들한테 ‘살리자’고 설득했죠. 그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1969년 간호장교들이 환자를 치료하는 모습. /국가기록원

◇휴전 후에는 월남전 환자들 돌봐

-전쟁 중에 잠시라도 휴식 시간이 생기면 뭘 하셨나요?

“그땐 공부밖에 몰랐어요. 조금이라도 시간 나면 공부했어요.”

-전쟁 중에 공부라니요?

“내 꿈이 외교관이었거든요. 외국어를 많이 배워야 하니까 틈만 나면 독일어 공부를 했지. 차라리 그 길로 갔으면 내가 성공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지금 이 자리에서 충실히 일하는 게 내 마음이 편해요.”

-요즘 군대 내 폭력 사건들이 많이 보도되는데 그때도 그랬나요.

“우리 땐 참 조용했어요. 남자 군인도 얌전했고, 여자 군인도 얌전했지. 요즘은 군대가 너무 이상해졌어요. 후배들도 와서 선배님들 있을 때가 참 좋았다 그래요.”

-의외네요. 그때가 더 혹독할 줄 알았는데.

“그때는 공부하다 말고 전쟁이 나서 불려갔잖아요. 공부에 한이 맺힌 사람들이었거든. 저녁만 먹고 나면 책 펴서 공부했어요. 우리 땐 그랬어요.”

-그럼 휴전 된 이후에는 어디서 일하셨어요?

“보훈병원에서 일하며 월남전에서 부상당한 환자를 받았어요. 그중에 지뢰를 밟아서 다리 하나가 날아간 환자가 한 분 들어왔는데 그렇게 악독할 수가 없어요. 미국에선 중환자가 모르핀 달라면 주는데, 우린 못 주거든. 그러니까 환자가 아침마다 내 멱살을 잡는 거야, 모르핀 놔달라고. ‘내가 당신 누나 하겠다, 누나 말 좀 들어봐라’ 하면서 다독였어요. 그분이 나중에 신학 공부를 하더니 보훈병원 목사까지 지냈지요. 내 평생의 보람이에요. 그렇게 악독하던 사람을 변화시켰다는 게.”

-어떻게 참으셨어요?

“이해해야죠. 한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목숨 걸고 싸운 사람들인데. 아무리 나라 위해 싸운다고 해도 자기 목숨하고 맞바꾼 거 아니에요. 그땐 6·25 환자, 월남전 환자, 4·19 환자가 병원에 한꺼번에 다 있었어요. 지금까지 계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 전쟁이란 끝이 없는 거예요. 여전히 진행 중이지.”

-‘전쟁’ 하면 뭐가 제일 먼저 떠오르세요?

“살인. 전쟁은 살인이에요. 너를 죽여야 내가 사니까. 이만큼 참혹한 게 있나요. 남을 비방하고 미워하고 파괴하는 게 전쟁이에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절대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죠. 나야 이제 갈 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새로운 세대는 나처럼 힘들게 살아선 안 돼요. 어린아이들 키울 때 마음껏 사랑만 해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돼야죠.”

-하늘이 원망스러운 적은 없었나요.

“처음엔 그랬죠.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어쨌든 내가 선택한 길이잖아요. 누구도 원망하지 말자.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자. 아침에 일어나 그렇게 마음먹고 하루를 시작해요.”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현충탑 앞에 선 박옥선 할머니. 박 할머니는 "1950년 6월 28 서울대병원에서 학살당한 900여 명의 넋을 기리는 비"라고 설명하면서 "다음 달엔 이곳에 6.25 참전유공자 명비도 함께 세워진다"고 했다. /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총알이 우릴 피해가서 지금 수다를 떨지

박옥선 할머니는 지난해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다.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도 그는 참전유공자의 장례식을 직접 챙긴다. “1953년 7월 27일 기준으로 종로구지회에 참전유공자로 등록된 분이 1300여명이었는데 지금 생존해 계신 분이 290명 정도예요. 한 달에 두세 분씩 돌아가시고 있어요.” 인터뷰 중에도 사무실 전화가 수시로 울렸다. “정거장 같은 곳이죠. 코로나 전에는 여기 모여서 차도 마시고 얘기도 나눴는데….”

-모이면 무슨 얘길 하나요.

“우리끼리 농담으로 총알이 나를 피해갔다고 해요. 총알이 나를 피해가서 여기 앉아서 수다를 떨 수 있는 거라고. 1년에 네 번 정도 행사가 있는데 모이면 다 같이 ‘사랑합니다!’를 외쳐요. 사랑 안에는 모든 게 들어 있잖아요. 사랑하면 이해도 용서도 해줄 수 있고, 슬플 때 같이 울어줄 수 있고, 함께 즐거울 수 있으니까.”

-혼자 사시는 분들이 많은가요.

“많죠. 생활이 어려우니까 자식들이 그냥 집을 나가버린 경우도 있어요. 저도 기초수급자이고 혼자 살아요. 내가 어렵게 사니까 어르신들 더 잘 모셔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내가 당한 것 이상으로 고통당한 분들이잖아요. 그렇게 나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이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떠나시니까 매일 가슴이 아프죠.”

-안타까운 사연이 많을 것 같습니다.

“종로구지회 회원 중에 인민군 출신으로 남한에 포로로 잡혀온 분이 있어요. 포로로 잡혔다가 풀려났는데 갈 곳이 없으니까 군대에 재입대한 거야. 그래서 제주도에서 훈련을 받고 전방에 배치를 받았는데 이번엔 또 북한 포로로 잡혀간 거예요.”

-영화보다 더 극적이네요.

“포로로 잡혀갔다가 공습 때 다들 도망가니까 그때 남한으로 다시 넘어왔다더라고요. 이 동네 사시는데 중환자라 일어나질 못하세요. 안 겪어도 될 고생들을 하신 분들이 많죠. 또 다른 회원은 한쪽엔 소변통, 한쪽엔 대변통을 차고 있어요. 아내는 장애가 있어 17년 동안 일어나질 못하고. 집에 가면 냄새 때문에 들어가질 못해요. 그런 분들을 보면 이 일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어. 비참한 일을 보면 볼수록 더 일을 해야지 싶고.”

-안보 교육도 다니신다고요.

“초·중·고등학교에 학군단 교육까지 들어가 봤는데 초등학생이 제일 열심히 들어요. 새로운 이야기니까 질문도 많이 하고. 옛날이야기처럼 들려주면 아이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더라고요.”

6.25전쟁때 간호장교로 참전한 박옥선 할머니/한준호 영상미디어 기자

◇아이들이 묻더라 “왜 싸웠느냐고”

-초등학생들은 무슨 질문을 하던가요.

“왜 싸웠느냐고 묻더군요. 왜 싸웠느냐고….”

-언젠가는 통일이 될 수 있을까요?

“한쪽에서만 손뼉을 치는데 어떻게 통일이 되나요. 손뼉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한쪽에서는 뒷짐 지고 핵무기를 만들고 있잖아요. 우리는 사랑으로 감싸려고 하는데 반대편에서 그걸 받을 줄 모르니까 통일이 안 되지요.”

-지금 한국 사회도 좌우 반(半)으로 쪼개져 싸우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요. 여당도 야당도 나라를 위해 일할 인재가 없어. 지금 참전유공자회 어르신들이 생활고 겪으시면서 지하철 안내원으로 일하시는데 한 달에 20만원 남짓 받아요. 정치인들이 호의호식하는 동안 굶주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잘사는 사람은 더 잘살고, 못사는 사람은 더 못살게 되고.”

할머니는 매일 새벽 4시 반에 보훈회관에 출근해, 한 시간씩 기도를 하고 하루를 시작한다. 어떤 기도를 하시느냐 묻자 “제일 먼저 나라를 위해 기도한다”고 했다. “오갈 데 없는 청년이 너무나 많잖아요. 그걸 보면 아직도 평안한 나라라고 할 수 없죠. 대통령부터 국회의원, 국무위원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라를 지켜야 할 텐데…. 부정부패로 얼룩져서 지금 서민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리사욕 취하지 말고 진정으로 국민만 바라봐줬으면 해요.”

-요즘 취업이 안 돼 괴로워하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부족해도 조금씩 부족함을 채운다고 생각하고 일을 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돈 많이 주는 곳도 좋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서 받을 만큼 받는 것도 가치가 있잖아요. 살아보니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게 자신을 위해서도 좋더라고요.”

-실패를 자꾸 하면 용기가 사라져요. 어떻게 하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용기는 스스로 만드는 거예요. 누가 옆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전에 살던 집이 빚 보증을 잘못 선 바람에 날아갔어요. 그리고 이곳으로 이사 왔는데 2년 전에 또 화재로 집이 다 불탔지요. 그 고난을 겪고도 제가 뭐 때문에 아직 살아있겠습니까. 용기예요.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이겨내고, 내가 살아내는 거예요. 그래야 남한테 사랑도 받고, 남한테 사랑한다는 말도 할 수 있는 거예요.”

-머리로는 알겠는데 실천하기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 자신을 믿고 가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자빠지고 고꾸라집니다.”

인터뷰가 끝나고 할머니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으로 기자를 데려갔다. 새하얀 무궁화가 흐드러지게 핀 작은 정원에는 6·25전쟁 초기 인민군이 서울대병원에 난입해 학살한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의 넋을 기리는 ‘이름 모를 자유전사의 비’가 세워져 있었다. 할머니와 참전유공자회 회원들은 매년 6월이면 이들을 위해 제를 지낸다고 했다. 이날도 현충탑 앞에 선 할머니는 전쟁과 폭력 속에 스러져 간 이름 모를 이들을 위해 고개 숙여 기도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