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갑철수입니까, 안철수입니까?” “제가 MB의 아바타입니까?”

2017년 4월 23일 대선 후보 3차 TV토론회.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현 대표)는 문재인 민주당 후보 측의 네거티브 공세를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수차례 ‘갑철수’ ‘MB 아바타’를 반복해 말했다. 토론회가 연이어 열렸던 당시는 안 후보 지지율이 문 후보를 거의 따라잡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안풍(安風)’이 거셌을 때였다. 그러나 네 번의 토론회를 거친 뒤 안 후보 지지율은 37%에서 20%로 반 토막 났다(갤럽 기준). 지지율 추락이 순전히 토론 탓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국민의당은 대선 평가 보고서에서 “안 후보가 TV토론에서 대통령감이라는 각인을 하는 데 실패했다”며 TV토론을 패인으로 꼽았다.

2017년 대선 후보 TV토론 장면. 왼쪽은 안철수 국민의당 당시 후보, 오른쪽은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다.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KBS

대선 후보 토론회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당의 후보자를 뽑는 경선 토론회를 이미 9차례(예비경선 포함) 열었다. 이 과정에서 지지율 1위인 이재명 경기지사와 2위인 이낙연 전 대표의 상호 비방전, 이른바 ‘명낙대전’이 화제가 됐다. 국민의힘은 토론회 개최도 전에 진한 내홍을 겪었다. 경선준비위원회가 당초 두 차례 토론회를 열려고 했지만,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윤석열 전 검찰총장 측이 반대하면서 결국 무산됐다. 대선 본선도 아닌, 본선 진출자를 뽑는 당내 경선 토론을 두고서도 양당의 분위기가 과열되고 있는 것이다.

◇ “박빙 대선, 토론 영향력 높아져”

대선 후보 간 TV토론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김대중·이회창·이인제가 맞붙었던 1997년 15대 대선 때였다. 이후 다섯 차례의 대선에서 토론회가 전체 판세를 뒤집는 역할을 한 적은 없었다. 특히 이명박 후보가 독주했던 2007년 대선 때는 TV토론이 결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그럼에도 TV토론의 중요성은 간과될 수 없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가공되지 않은 후보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회는 TV토론이 사실상 유일하기 때문이다. 갤럽 조사에 따르면, 최근 두 대선에서 유권자들이 투표할 후보를 고를 때 가장 많이 참고한 것은 TV토론이었다. 한국정당학회 보고서에 따르면, 2012년 대선 때는 유권자 96.7%가 1회 이상 TV토론을 시청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7일 열린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자 TV토론회에서 후보들이 기념 사진을 찍으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위 사진) 국민의힘은 25일 여의도 당사에서 토론회 대신 당내 대선주자들이 참여하는 '비전 발표회'를 열었다. 사진은 발표회에 앞서 후보들이 기념 사진을 찍는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특히 이번 대선에는 토론회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 클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코로나 여파로 대면 선거 운동이 제한되면서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경선 토론회를 더 열기로 했다. 양당 모두 최대 20회까지 토론회를 열 계획인데, 이는 지난 대선(민주당 11회, 자유한국당 6회)과 비교해 횟수를 대폭 늘린 것이다. 후보들의 토론 장면을 접할 수 있는 경로가 다양해진 것도 토론회의 비중을 높였다. 유권자들은 유튜브·페이스북·트위터 등으로도 토론회를 접할 수 있다. 실제로 이재명 지사가 지난달 5일 열린 TV토론회에서 ‘여배우 스캔들’에 대한 해명을 요구받자 “제가 혹시 바지를 한 번 더 내릴까요”라고 말한 장면이 담긴 뉴스 영상은 유튜브에서 53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다.

이번 대선에서 토론회의 중요성이 배가될 것이란 전망은, 내년 대선이 박빙으로 치러질 것이라는 관측에서 기인한다. 현재 여론조사상 이재명 지사와 윤석열 전 총장은 양강 구도를 형성하며 지지율이 엎치락뒤치락하고 있다. 두 후보 모두 사생활이나 가족과 관련된 의혹이 불거져 토론에서 네거티브 공방이 거셀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지금 기준에서) 후보자 간 인지도나 지지도에서 압도적인 차이를 보이지 않기 때문에 TV토론이 유권자의 표심에 영향을 크게 미칠 수 있는 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면서 “특히 ‘누가 토론을 잘했다’는 긍정 평가보다는, 실언이나 불량한 태도 등에서 기인한 부정 평가가 지지 후보를 바꾸는 데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안철수, 이정희, 권영길이 준 교훈

경선 토론회는 추격하는 후보에겐 기회이고, 선두 후보에겐 리스크 관리의 시험대다. 국민의힘 주자 가운데 지지율 2위를 달리는 홍준표 의원이 윤석열 전 총장을 겨냥해 “토론이 겁나면 지금 드롭(사퇴)하라” 등의 견제구를 던지는 것도, 여권 지지율 1위인 이재명 지사가 토론회 초반 다른 후보들의 공격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면서 ‘김빠진 사이다’라는 얘길 들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아직 토론 실력이 공개된 적 없는 윤 전 총장은 토론 준비에 열심이다. 윤 전 총장 캠프는 드라마 ‘모래시계’ 제작자 출신인 박창식 전 의원을 미디어본부장으로 영입했다. 박 본부장은 “(윤 전 총장이) 전문가들과 함께 부동산·경제·교육 등 여러 분야를 섭렵하면서 다자 토론은 물론 일대일 토론까지 철저하게 대비하고 있다”며 “후보자가 가진 매력을 살리면서, 테크닉적인 면에서 약간의 보완이 가미될 것”이라고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캠프 관계자는 “윤 전 총장이 워낙 달변이기 때문에 토론은 잘할 것”이라면서도 “너무 말을 많이 하다가 ‘MB 아바타’와 같은 참사가 있진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든다”고 했다. ‘8말 9초’ 골든크로스를 노리고 있는 이낙연 전 대표 캠프에서는 이재명 지사에 대해 공격할 포인트가 많은데도 이 전 대표가 너무 점잖게 토론에 임하는 게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캠프 관계자는 “좀 더 공격적인 기조로 토론 전략을 수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고 했다.

2012년 대선 후보 TV토론 장면. 이정희(오른쪽) 통합진보당 당시 후보가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를 보며 발언하고 있다.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TV조선

정치권에서는 ‘토론이 누구를 당선시키지는 못해도, 떨어뜨릴 수는 있다’는 말이 회자된다. 이 말의 산증인이 바로 안철수 대표다. ‘갑철수’ ‘MB아바타’뿐만 아니라, 그가 “거참, 그만 좀 괴롭히십시오” “유(승민) 후보님, 실망입니다” 등의 말을 하며 눈살을 찌푸리고 머리를 좌우로 젓는 장면 등은 ‘짤방’(유머를 위한 재미있는 사진·동영상)이 돼 지금도 희화화된다.

당선권은 아니었지만 토론회 때 한 말이 화제가 되면서 인기가 크게 변동하는 경우도 있었다. 2012년 대선 토론 때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의 “이것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저는 박근혜 후보를 반드시 떨어뜨릴 겁니다”란 독설은 그의 이미지에 치명상을 입혔다. 2002년 대선 토론에서 권영길 민주노동당 후보는 “국민 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란 말로 빅히트를 쳤다. ‘권영길 신드롬’이란 말이 나올 정도였다.

안철수, 이정희, 권영길/자료=KBS, TV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