렉터 박사가 누에콩에 인간의 간을 곁들여 키안티를 홀짝이지 않을 때는 릴레(lillet)를 마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궁금했다. 릴레를 어떻게 마시는지. 릴레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릴레는 하얀 릴레, 릴레 블랑이다. 릴레는 화이트 포트 와인(발효 중인 포도주에 브랜디를 첨가한 술) 같으면서 또 복숭아 향이 나는 화사한 술이다. 도수도 20도가 안 되어 부담도 없다. 드라이해서 식전주로 좋고, 달콤함도 있어서 식후주로도 좋다. 릴레의 맛을 알기에 렉터 박사의 음습한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한니발에 나오는 렉터 박사다. 영화 ‘한니발’에서는 앤서니 홉킨스가, 미드 ‘한니발’에서는 마스 미켈센이 렉터를 연기한다. 둘 다 보지 못했다. 나는 ‘무서운’ 종류의 것들은 일체 보지 못한다. 단지 영화적 속임수에 불과한 그런 가짜가 뭐가 무섭냐는 질타를 받기도 하는데… 무서운 건 무서운 거다. 오늘은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 나를 다잡지만 실패한다. 뭔가 나오기도 전에 ‘악’하고 소리를 지르게 되고, 같이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없이 미안해진다. 내 목소리가 더 공포스럽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은 나의 심장과 다른 분들의 심장을 위해 피하려고 한다.
원작인 동명의 책을 찾아봤다. 렉터 박사는 스탈링에게 오렌지를 한 조각 썰어 넣은 릴레를 건넨다. 어떤 연출도, 묘사도 없이 그게 다다. 좀 맥이 빠졌다. 이건 릴레를 마시는 전통적인 방법 아닌가. 릴레는 대개 이렇게 먹는다. 나는 렉터 박사가 미식가라고, 심지어 인육을 요리해 먹기까지 하며, 먹는 것에서 극강의 예술을 추구하는 캐릭터라고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니 릴레를 마시는 방법에 대해서도 한 수 배우길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렉터만의 신묘한 음용법 같은 게 있지 않을까 하고. 그런 건 없었고, 대신 이런 말을 했다. 식사는 후각과 미각으로 즐기는 거라고, 이 두 감각은 인간의 마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것이라고. 아니 이렇게 뻔한 하나 마나 한 말을 무게 잡고 하십니까, 박사님?
나는 릴레를 어떻게 마시는가. 오렌지 조각 대신 오렌지 껍질을 약간 넣는다. 그냥 술에 빠트리지는 않는다. 술잔에 따라놓은 릴레 위에서 오렌지 껍질을 살짝 비튼다. 바텐더의 능란한 손놀림을 복기하며 오렌지 껍질로 술잔의 테두리를 슬쩍 문지르기도 한다. 그러고는 술잔에 비틀어진 오렌지 껍질을 넣는다. 그렇게 술에 향과 맛을 입힌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오렌지 껍질의 위력은 상당히 강력해서 릴레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래서 이걸 마시는 순간의 나는 부웅 떠오른다.
오렌지 한 조각을 넣는 것과 뭐가 그렇게 다르냐고 물으실 수도 있는데, 다르다. 확실히 다르다. 오렌지 조각을 넣으면 오렌지의 맛이 다소 과하게 난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릴레는 훌륭한 술이라 어떻게 해도 나빠지기 어렵다. 그런데 오렌지를 이렇게 넣어버리면 달콤함이 부각되는데… 가뜩이나 달콤한 데가 있는 릴레를 더 달콤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할까? 술은 좀 써야 제맛이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는 쓰지만 살짝 스치는 달콤함과 향미에 위스키도 마시고 브랜디도 마시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릴레에 오렌지 껍질을 비틀어 넣으면 달콤하면서 씁쓸한 풍미가 일렁인다.
술을 마시다가 알게 되었다. 시간과 재능과 경험과 물질이 고도로 응축된 액체가 술이라고. 그런 술은 지극히 까다로워서 잘 대해주어야 한다. 뭔가 하나가 틀어져 버리면 완전히 다른 물질이 되기에. 이렇게 쓰고 보니 마티니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칵테일인 마티니는 제임스 본드의 이 말과 붙어 다닌다. “젓지 말고 흔들어서.” 칵테일을 만들어 마시기 전까지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칵테일을 만들어보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칵테일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젓는 것과 흔드는 것. 젓는 방식은 믹싱 글라스에서 긴 스푼으로 저어 술잔에 따르지만 흔드는 방식 일단 셰이커를 사야 한다. 마음에 드는 셰이커가 없어서 아직 셰이커를 사지 못했다. 스테인리스로 만든 젖병 같달까. 그래서 ‘흔드는 방식’으로 만드는 칵테일은 아직 만들어 보지 못했다. 저으면 완만하게 섞이지만, 흔들면 격렬하게 뒤섞인다. 젓는 게 물리적 변화라면 흔드는 건 화학 변화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직접 흔들어보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저어 만든 마티니와 흔들어 만든 마티니는 완전히 다른 마티니라고. 그럴 수밖에 없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칵테일인 마티니답게 마티니를 만드는 법은 백 가지가 넘는다는데, 그중에 릴레가 들어가는 레시피도 있다. 이언 플레밍 원작인 007시리즈의 하나인 ‘카지노 로열’에 나온다. 나는 매일 마티니만 마시는 제임스 본드가 어떻게 릴레가 들어가는 마티니를 주문하는지 궁금해서 영화를 봤다. 본드는 이렇게 주문한다. “고든스 진 3, 보드카 1에 화이트 와인 1/2, 얼음 넣고 흔들어서 레몬 껍질 같이.” 번역자가 릴레를 친절하게 ‘화이트 와인’으로 번안해 옮긴 것이다. 고든스 진과 보드카와 릴레를 3:1:0.5로 하고 얼음을 넣어 흔든 뒤 레몬 껍질을 올려달라는 말이다. 이 마티니의 이름이 베스퍼 마티니다. 본드가 사랑하게 되는 여자 베스퍼의 이름을 따서 베스퍼로 짓고, 베스퍼에게 이 술이 베스퍼라고 소개해주는 장면도 나온다.
아, 릴레를 마시는 법을 말하며 나는 오렌지 조각이 아닌 껍질을 넣는다고 했는데 레몬 껍질을 넣기도 한다. 달콤함을 원할 때는 오렌지 껍질을, 새뜻함을 원할 때는 레몬 껍질을 넣는다. 첫 잔을 레몬으로 마시고, 다음 잔을 오렌지로 마시기도 한다. 식전주로도 식후주로도 마실 수 있는 릴레이기에 식전주로 릴레를 마실 때는 레몬 껍질을, 그리고 다른 술을 좀 마시다가 식후주로 릴레를 다시 마실 때 오렌지 껍질을 넣기도 한다.
릴레를 넣은 마티니가 당대의 유행이었는지 이언 플레밍의 창작 레시피인지 모르겠지만 렉터의 릴레 음용법보다 몇 수 위라고 생각한다. 보드카와 릴레는 집에 있는데, 고든스 진이 없어서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있다. 고든스 진을 사는 날이 베스퍼 마티니를 만드는 날이 될 것이다. 나는 본드가 아니니까 “흔들지 않고, 저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