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헬스장에서 운동하는데 한 사모님이 다가와서 눈물을 글썽거려요. 남편이 딱 그렇게 바람피웠는데, 드라마에서 내가 불륜 저지른 남자 뺨 때리고 내연녀 머리채 잡고 흔드는 모습 보니 가슴이 뻥 뚫렸다면서. 제가 그랬죠. 다음 주엔 막 두들겨 팰 테니 더 시원하실 거라고. 하하!”
긴 웨이브 머리를 늘어뜨린 김보연(64)이 목젖이 보이도록 화통하게 웃었다. 뒷모습만 봐선 30대라 해도 믿을 만큼 젊어 보였다. 허리 23인치. 머리숱이 풍성했다. “붙인 머리냐고 하던데 제 머리예요. 흰머리 염색은 하지만.” 웃으며 손가락으로 두피를 밀어 보였다.
연기 경력 47년의 김보연은 요즘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시청률 11.9%를 기록하며 질주 중인 TV조선 드라마 ‘결혼작사 이혼작곡(이하 결사곡) 2’에서 매회 신들린 듯한 열연을 보여준다.
극 중 그가 맡은 김동미는 열아홉 살 많은 남편(노주현)과 사별한 뒤 의붓아들(이태곤)과 로맨스를 꿈꾸는 황당한 캐릭터. 극본을 쓴 임성한(피비) 작가 특유의 웃음 코드를 보여주는 핵심 인물로 대활약 중이다. 지난 11일(10회) 아들 내연녀의 머리채를 잡던 순간, 분당 최고 시청률 12.9%를 찍었다. ‘임성한의 뮤즈’ ‘시청률 마녀’란 애칭을 얻으며 ‘막장 연기의 교본’을 보여주고 있는 김보연을 지난 14일 만났다.
◇내연녀 응징 넘 세다고? 실제라면 더 세게 복수했을 것
-지난주 분노 폭발 연기에 시청자들이 열광했어요. 방송은 봤나요?
“아우, 웬만하면 안 봐요. 내가 연기를 그지(거지)같이 해서 맘에 안 드는 게 너무 많이 보여. ‘에브리띵’ 100% 만족은 없다니깐요.”
-반응은 느껴지던가요?
“밖에 나갔더니 생판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묻더라고. 다음 회에서 아미(송지인)가 양주병에 맞는 건지 피하는 건지. (이)태곤이는 ‘누나가 우리 드라마 주인공이야!’ 하고 흥분하면서 문자 보냈어요. 전수경, 박주미도 ‘대박’ ‘언니 최고’라고 해주고. 저는 드라마 포스터에도 안 나와요. 후배들한테 ‘얘, 나는 얼굴 없는 배우야’ 했는데(웃음).”
-오기가 생겼나요?
“이를 갈면서 요 장면은 내 걸로 만들어야지 하는 게 꽤 있었어요. 임성한 작가 작품엔 한마디 대사인데도 열 번 정도 반복해 읽다 보면 ‘아, 잘하면 돋보일 수 있겠구나’ 하는 부분이 있어요. 연구하면 배우가 존재감을 딱 드러낼 수 있게 해놨어요. 후루룩 건성으로 연기하고 넘어가면 묻혀버리지만.”
-존재감을 제대로 발휘했으니 성공한 거군요.
“사전 제작인데 임시 편집본을 보고 주변에서 제가 아미랑 붙는 장면이 너무 센 거 아니냐고 걱정하더라고요. 내가 47년 연기한 사람이다, 이런 데서 확실하게 팍팍 ‘오버’ 쳐줘야 시청률 오른다고 했어요. 그리고 이게 심하다고요? 드라마니까 그 정도지, 실제 상황이라면 (내연녀를) 반 죽여놓지 않았을까? 하하!”
-머리채 잡는 장면이 진짜 리얼했어요.
“아미에겐 내가 머리카락을 잡진 않을 거다, 두피에 손가락 넣고 비빌 거니까 거기에 몸을 맞춰서 흔들라고 했어요. 신유신(이태곤) 따귀 때리는 장면도 때리는 척한 거고요. 젊은 감독 중엔 진짜 때리라고 주문하는 경우도 있지만, 전 절대 안 때려요. 연기라고 해도 맞으면 기분이 안 좋아요. 진짜 때리는 것처럼 연기하는 게 배우죠.”
-시즌1에서 수영복 신이 화제였어요.
“지금 안 하면 언제 하겠느냐 싶더군요. 방송 나가고 유해진이 ‘누님, 이게 웬일인가요’라고 문자를 보냈더군요. 그래도 미국에 있는 첫째 딸 아들이 네 살, 엄연한 할머니죠.”
◇막장과 명작은 한 끗 차이
-배우 전수경이 “보연 언니는 인생 캐릭터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젊은 남자 살 맞대고 살고 싶다'고 기도를 하지 않나, 속옷 차림으로 달빛 아래서 혼자 춤을 추지 않나. 너무 오글거려서 이걸 어떻게 하지 싶은 거예요. 잘못하면 의붓아들 짝사랑하는 미친 X밖에 안 되겠더라고요. 무지 고민했죠. 막장이야말로 진정성 있게 연기하면 막장처럼 안 보이거든요.”
-어떻게요?
“몸짓 하나하나 진정성 있게 표현하려고 수십 번씩 대본을 봤어요. 예컨대 9화에서 사피영(박주미)이 병실에 있을 때 ‘에미는 나보다 나아. 우리 어머니 눈도 못 감고 돌아가셨다’면서 이 악물고 눈물을 뚝뚝 흘려요. 대본엔 눈물 흘리는 설정이 없었는데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고 싶었어요. 젊은 남자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장면에선 제가 침대 위로 올라가 기도를 하겠다고 했어요. 그런 디테일이 시청자들을 빨아들여요. 사이코패스 같기도 하고 안돼 보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막장인지 아닌지 시청자를 헷갈리게 하죠.”
-죽어가는 남편(노주현) 옆에서 광기 어린 표정을 짓는 연기가 압권이었어요.
“감이 잘 안 왔어요. 감정을 끌어올리려고 온갖 음악을 들어 보다가 영화 ‘라스트 모히칸’의 주제곡을 듣는데 이거다 싶더군요. 웅장하고 강력하면서도 어느 순간 가슴에서 뭔가 후두둑 떨어지는 느낌. 그 음악을 수십 번 들으면서 연습했어요.”
-노력파인가요?
“무진장 연습을 많이 했어요. 눈물은 몇 초 만에 흘릴 수 있어요. 배창호 감독이 ‘대한민국에서 눈물 연기는 김보연이 제일 잘한다’고 하셨지요.”
-비결이 뭔가요.
“초집중. 강한 장면을 찍을 땐 극도로 예민한 상태를 만들려고 촬영 전까지 굶어요. 숨을 안 쉴 때도 있어요. 영화관 신에서 눈이 벌게지는 장면이 그랬죠.”
◇스승 최은희, 하늘에서 기뻐하실 것
김보연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신인 시절 이후 최고 인기를 실감한다”면서 유난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배우 최은희였다.
-어떤 인연이 있기에.
“1974년 안양예고 2학년 때 데뷔했어요. 당시 최은희 선생님이 교장이셨는데 저를 참 예뻐하셨어요. 1976년 당신이 출연한 영화 ‘어머니와 아들’에 저를 딸로 출연시키기도 하셨고요. 1982년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탔을 때, 당시 납치돼 북에 있던 선생님께 모든 공을 돌린다고 했어요. 나중에 선생님이 평양에서 제 소감을 보고 무척 우셨다고 해요. 살아 계셨으면 요즘 참 좋아하셨을 텐데.”
김보연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린 작품은 1977년 김수현 작가가 쓴 ‘당신’이었다. 김보연을 재발견한 이는 임성한. ‘아현동 마님’ ‘신기생뎐’ ‘오로라 공주’에 이어 이번이 네 번째다.
-캐스팅은 언제 알았나요.
“제작사에서 연락하기 전까지 몰랐어요. 그런데 1~4회 대본을 보는데 날 염두에 두고 동미를 그렸구나 싶더군요. 임 작가를 1년에 몇 번씩 보는데, 한번은 저더러 머리를 길러 보지 않겠느냐고 해요. 뽀글이 파마 할 나이인데, 긴 머리 징그럽지 않겠느냐 했더니 그래도 해보라고 하더군요. 동미 머리를 생각해 놓은 거죠.”
-전 남편(전노민)과 한 작품에 출연 중입니다. ‘진정한 할리우드 스타일’ ‘이게 진짜 막장’ 등등 별별 반응이 많던데.
“임 작가가 사전에 괜찮겠냐고 의향을 물었어요. 촬영장에서 겹치는 신은 없을 거라면서. 상관없다고 했죠. 이후에 사람들 관심이 하도 많으니 한 번쯤 한 장면에 나와도 되느냐고 묻더라고요. ‘오케이’ 했죠. 스케이트장에서 가족이 만나 인사하는 장면이었는데, 어색해서 허공을 보고 대사를 했어요.”
-상대 배우로 나와도 오케이 했을까요?
“와이 낫(왜 아니겠어요)? 서로 안 지려고 더 열심히 하지 않을까?”
-이태곤은 드라마 ‘황금물고기’ 때 사위로 나왔죠?
“그러니 그나마 덜 쑥스러운 거지. 딴 배우였음 못 했을 듯해요. 데이트 신 때 ‘태곤아,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니까요.” 둘은 스무 살 차이다.
-성훈은 ‘신기생뎐’에 같이 출연했어요. 임 작가가 자기 작품에 출연한 배우를 종종 다시 캐스팅하던데요.
“임 작가가 정말 배우들한테 잘해요. 배우들이 커피 한잔이라도 사려고 하면, ‘앞으로 나 안 보고 싶으시면 내세요’라고 해요. 얻어먹는 법이 없어요. 그러면서 자기는 최고급으로 배우들한테 밥을 사줘요. 의리 짱! 이 나이에 나를 믿고 써주는 작가가 있어서 행복해요.”
◇이혼? 후회한다
-극 중 불륜을 저지르는 세 남자 중 제일 나쁜 캐릭터는?
“판사현(성훈). 아무리 그래도 임신은 시키지 말았어야지. 그건 용서가 안 돼요.”
-결사곡이 막장이라던데.
“막장? 현실이 더 막장이에요. 주변에 허다하게 있어요. 그러니 사람들도 더 몰입하는 것 아닌지.”
-드라마 제목을 빌리자면, 김보연은 결혼 작사 두 번, 이혼 작곡을 두 번 했던데요.
“가정을 지키지 못한 건 제 잘못이라고 생각해요. 나이 드니 지지고 볶고 살아도 혼자 이렇게 있는 것보단 둘이 있는 게 좋은 것 같아요. 혼자 살아도 겪을 거 다 겪더라고요. 웬만하면 이혼은 하지 말라고 하고 싶네요.”
-김보연에게 연기란?
“늘 목마른 것. 내가 생각하는 비중의 배역이 왜 나한텐 안 올까 고민도 많아요. 이 나이에 노래 돼(판도 여러 장 낸 가수다), 운동 돼(태권도 유단자다). 이런 배우 어딨어요? 저 좀 잘 써먹어 주세요, 하하!”
-결사곡 결말이 어떻게 될지 힌트를 준다면?
“임성한답게 어디로 튈지 모른다? 연적 아미가 점점 더 강력해진다? 더 이상의 힌트는 곤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