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에는 머리 감고 몸 씻는 날이 따로 있었다니, 요즘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 못 할 일 아닌가. 하지만 엄연한 사실인걸. 오월 단오와 유월 유두가 바로 그날인데, 머리 감는 반라(半裸) 여인을 훔쳐보며 낄낄대는 철모르는 동자승이 어우러진 혜원(蕙園)의 풍속화 ‘단오풍정’이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일반 한옥은 물론이고 임금님 계시던 궁궐에서도 목욕 시설을 본 기억이 없으니 우리나라는 자고로 목욕 문화가 발달하지 않았던 게 틀림없다.
월말이나 명절을 앞두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집 근처 공중목욕탕에 간 기억이 어렴풋하다. 당시에는 목욕 가자 하시면 덜컥 겁부터 났다. 어린 마음에 남들 앞에서 발가벗는 것이 좀 뭣하고, 무엇보다 콩나물시루 같은 탕 속 뜨거운 물에 앉아있는 게 고역이었다. 땀이 비 오듯 하고 더워서 어질어질한데 몸이 흠씬 불어야 한다는 아버지의 지엄하신 명을 거역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한참을 지나 아버지의 눈짓에 겨우 탕 밖으로 나오면 눈앞이 노랗고 천장이 빙빙 돌았다.
“얘야, 목에 때 좀 봐라. 공단 목도리를 두른 것 같다. 평소 세수할 때 목도 잘 닦아야지, 요 꼴이 뭐냐. 손발도 마찬가지고. 다음에 또 이러면 경을 친다.” 한바탕 야단에 눈물이 찔끔했는데, 때 밀기가 끝나면 피부가 빨갛고 얼얼했다. 많이 지쳤어도 목욕탕 문을 나설 때는 몸이 솜털처럼 가뿐했다. 돌아오는 길에 구멍가게에 들러 아버지께서 쥐여 주시는 달콤한 과자 맛 또한 잊을 수 없었다.
아담한 한옥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 인왕산 기슭의 적산 가옥을 개조한 집으로 이사했다. 정원이 생겨 좋았는데 신기하게도 집에 목욕탕이 있었다. 사람 하나 들어가고 남을 커다란 무쇠솥이 걸린 목욕탕이 넓진 않지만 아늑했다. 부엌에서 목욕탕 쪽으로 난 아궁이에 연탄불을 넣으면 솥의 물에서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혼자 집에서 목욕할 때는 마음이 가벼웠다. 뜨거운 물속에 억지로 오래 있지 않아도 되고 스스로 씻으니 살갗이 아프지도 않았다. 몸과 마음이 상쾌한데 어머니께서 저녁 메뉴로 뜨근한 어묵이라도 준비하신 날은 날아갈 듯했다.
일곱 식구가 차례로 목욕하려면 깨끗한 물 관리가 필수다. 탕 속에서는 절대로 때를 밀면 안 되지만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물 위에 부유물이 둥둥 뜨게 마련이다. 끝내고 나올 때는 반드시 바가지로 물 위에 떠 있는 때를 조심스럽게 떠내야 했다.
결혼 후 아파트 생활이 시작되면서 매일 아침 샤워를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집에서 하는 목욕에는 한계가 있었다. 욕조에 물을 받기도 번거롭고 또 물이 금방 식었다. 김이 자욱하고 널따란 온탕에 더운 물이 찰랑대는 대중탕이 그리워졌다.
주말마다 어린 딸과 아들을 데리고 공중목욕탕에 가서 온탕, 냉탕에 번갈아 몸을 맡겼다. 이렇게 땀을 쫙 빼고 나면 본전을 충분히 뽑은 느낌이었다. 애들 몸을 닦아 주느라 숨이 차고 팔이 아팠다. 어릴 적 선친께서 몸을 충분히 불리라 한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자식이 성장하고는 주말에 아내와 단둘이 목욕탕에 출입했다. 입구에서 만날 시간을 단단히 약속하고 각기 남탕과 여탕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시간을 충분히 잡았는데도 번번이 아내는 애꿎은 남편을 입구에서 벌 세우는 거다. 한번은 기다리다 못해 분을 참지 못하고 어디 골탕을 좀 먹어 보라는 식의 놀부 심보에 카운터의 직원에게 방송을 부탁했다.
“ΟΟ아파트에서 오신 아무개 엄마,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서둘러 나오시랍니다.” 보진 못했으나 여탕에서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으리라. 깜짝 놀라 황망할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얼마 후 뺨에 홍조를 띠고 허겁지겁 나오는 사람이 보였다. 충격 요법을 써본 것인데 막상 허둥대는 모습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선친께서 암과 힘겹게 싸우고 계실 때다. 잠시 증세가 안정돼 집으로 돌아오셨는데 오랜 병원 생활에서 해방되니 기분이 퍽 좋으셨다. 스위트 홈이라고 연신 말씀하시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다 하시는데 기력이 쇠해서 당신 혼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욕조에 더운물을 받은 후 수영 팬티로 복장을 갖추고 의사인 막내아들이 세신사(洗身師)로 변신했다. 방사선 치료와 독한 약에 새카맣게 탄 피부 아래 툭툭 불거진 뼈를 문지르며 만감이 교차했다. 사시사철 푸르른 소나무처럼 당당하고 굳건한 모습은 어디 가고 깡마른 몸 하나 지탱할 힘조차 없으니 세월이 이토록 야속하더란 말이냐. 전신이 땀범벅이 됐다. 뺨에는 진한 눈물이 섞였다.
수년 전 아들을 대동하고 일본에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쌓인 눈이 사람 키보다 높아 도로가 안 보일 지경이었다.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이 많이 내리는 고장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묘사한 설국이 이런 곳이 아닐까.
노천 온천의 탕 속에서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있노라니 아들과 친구가 된 기분이다. 장성한 아들과 한가하게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눠본 게 얼마 만인가. 흩날리는 눈발이 벗어진 머리 위로 떨어져 간질간질하다. 수건을 접어 정수리에 얹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불효자의 때늦은 후회인 줄 알지만 선친을 이런 멋진 곳에 한번 모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