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뜬구름을 좇았던 것 같다. 이제 집 짓고 나무 심고 소요하며 자득하고자 한다. 연못은 낚시할 만하고, 납세용 양식은 농사를 대신할 만하다. 밭에 물을 대고 채소를 길러 팔면 아침저녁 찬거리를 댈 수 있고, 양을 길러 젖을 팔면 여름과 겨울의 제사 비용을 감당할 수 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면, 그것이 곧 못난이의 정치다(庶浮雲之志, 筑室種樹, 逍遙自得, 池沼足以漁釣,舂稅足以代耕, 灌園粥蔬, 以供朝夕之膳, 牧羊酤酪,以俟伏臘之費, 孝乎惟孝, 友干兄弟, 此亦拙者之爲政也).”
중국 쑤저우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명나라 때 정계에서 쫓겨난 왕헌신(王獻臣)이 절터를 구입해서 만든 졸정원(拙政園)이 가장 유명하다. 왕헌신은 왜 자신의 개인 정원에다가 하필 ‘못난이의 정치(拙政)’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못난이의 정치’는 서진(西晉)의 문장가 반악(潘岳·247~300)이 쓴 <한거부(閑居賦)>에 나오는 표현이다. ‘세설신어(世說新語)’에 따르면, 반악은 너무도 잘생긴 나머지, 길을 나서면 여자들이 늘 그의 수레를 에워쌌으며, 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수레에 과일을 던졌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척과영거(擲果盈車·수레가 가득하도록 과일을 던지다)’라는 사자성어가 생겨났다.
나 같으면 그 과일을 밑천 삼아 여생을 편하게 살았을 것 같은데, 반악은 그러기에는 정치적 야심이 너무 컸던 것 같다. 중앙 정계 진출과 은거를 반복하는 동안 각종 영욕이 끊이지 않다가 결국 정쟁에 휩쓸려 멸족을 당하고 만다. 앞서 인용한 <한거부>는 그가 어머니의 병환을 명분으로 은거할 때 지은 글이다.
반악이 느꼈을 현실 정치에 대한 염증은 ‘뜬구름’이라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다. ‘뜬구름’이란 표현은 원래 ‘논어, 술이’에서 등장한다. 공자는 말한다. “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고, 팔을 굽혀 베개로 삼아도, 즐거움이 그 안에 있다. 의롭지 않으면서 주어지는 부귀는 나에게는 뜬구름과 같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즉, 반악은 정치판을 떠나 은거하는 자신의 처지를 ‘논어’ 표현을 빌려 정당화하는 것이다. 정계를 떠나도 나는 즐거울 수 있다고.
흥미롭게도 반악은 가족과 함께하는 그 자족적인 삶을 ‘못난이의 정치’라고 규정한다. 효도와 우애를 정치의 일종으로 보는 관점은 ‘논어, 위정’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다. 누가 “당신은 왜 정치를 하지 않나요?”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서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효로다, 오직 효! 그리고 형제간의 우애, 그것을 정치에 베풀도다.’ 이 역시 정치를 하는 거다. 어째서 구태여 일부러 정치를 하겠는가(書云, 孝乎惟孝, 友于兄弟, 施於有政. 是亦爲政, 奚其爲爲政).”
반악은 왜 하필 ‘못난이’의 정치라고 하는가? 공자는 효도와 우애가 정치의 일환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못난이의 정치라고 한 적은 없는데? ‘못난이의 정치’라는 표현에는 겸양의 태도와 더불어 어떤 상흔이 느껴진다. 내가 진짜 잘났다면 중앙 정계에서 활개치며 뜻을 펼쳐 보련만, 자신은 그만큼 잘나지 못했기에 조용히 정원이나 가꾸겠다는 것. 퇴영적인 자조의 느낌이 충만하다. 실로 중앙 정계 이외에 달리 정치적 포부나 사회적 책임감을 실현할 대안 공간이 없다면, 정계 은퇴는 곧 세상의 뒷방에서 늙어가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 피해 의식을 극복하면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성리학이다. 성리학의 가치관에 따르면, 중앙 정계에서 높은 관직을 꿰차는 것이 결코 능사가 아니다. 진정 훌륭한 인간은 명예와 이익을 얻기 위해 정계에 뛰어드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속된 가치를 넘어서는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은 구태여 중앙 정계에 진출하지 않고 지방에 머물러 있어도 전 우주를 꿰뚫는 단일한 이치를 파악하고 실현할 수 있다. 지방에 있다고 해서 못난이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13세기 이래 중국 지식인 사회를 풍미했던 이 성리학의 세계관도 졸정원(拙政園) 이후의 시대, 즉 명나라 후기가 되면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과연 세계를 관통하는 단일한 이치라는 것이 있을까? 그런 것이 있다고 한들 정말 개인이 구현해낼 수 있을까? 이런 의심이 팽배해 간 시기는 바로 중국에서 정원이 성행한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그 시기는 유럽에서 분더카머(wunderkammer·진귀한 사물 수집 공간)가 유행한 시기와도 겹친다.
중국 사람들이 그토록 대단하다고 자랑하는 정원이건만, 정작 졸정원에 들어가 보면 관람객을 압도하는 것은 잡다함과 산만함이다. 지나칠 정도로 많은 기암괴석, 어지러워 보이는 다리와 회랑, 일견 불규칙한 조경은 정교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일본의 정원과 대조된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분더카머를 연상시킨다. 문학평론가 윤경희는 최근작 ‘분더카머’에서 “관람자는 번잡과 과잉이 야기하는 불안과 포만감을 동시에 향락한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졸정원’의 관람자가 받는 느낌과 일맥상통한다. 정원을 향유했던 명나라 말기의 지식인이든, 분더카머에 열광했던 근대 초기의 식자층이든, “시대 혼종적 난입의 무질서로 파괴되고 확장하는 세계 속에서 지식의 결핍과 갈망을 동시에 겪는 사람은 사물들뿐 아니라 자기의 위치를 질문하고 거듭 재정의해야” 했다.
유럽의 분더카머에 비해, 명나라 말기의 정원은 규모가 자못 크다. 그런 정원을 건설할 재력이 없던 이들은 어떻게 했을까? 분더카머처럼 “외부 세계에 편재한 각종 감각적 대상들을 향한 인간의 애호심과 백과사전적 앎의 의지를 입체적으로 표상하고 가시화”하는 대신, 자신이 애호하는 사물과 기억을 빼곡히 기록하는 책을 썼다. 문진형(文震亨)의 ‘장물지(長物志)’나 이어(李漁)의 ‘한정우기(閑情偶奇)’는 다름 아닌 책으로 된 분더카머다. 이어는 말한다. “개요를 간단한 책으로 간행하여 나처럼 별난 취향을 가진 사람이 선택하도록 제공하고자 한다. 그중의 하나를 얻으면 나를 마주하는 것과 같을 것이므로, 이 글은 실제로 정신적 교류에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