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 계십니까?”
지난달 29일 서울 영등포시장 인근 골목의 한 여인숙. 1층 카운터 불투명한 유리창을 두드려 봤지만 반응이 없다. 나무 계단을 반쯤 오르자 문 앞에 고무 슬리퍼 한 짝이 놓인 방이 있다. 문 틈새로 겨울 이불을 덮고 바닥에 누워 있는 남성이 보인다. 머리맡엔 소주병 4개와 밥그릇, 반찬통이 놓여 있다. 여인숙을 돌아 나오는 길, 골목 어귀엔 ‘환영! 달방 有’라고 쓰인 종잇장이 붙어있었다.
청와대 김기표 반부패비서관이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지난달 27일 경질됐다. 그는 “부동산으로 절대 돈 벌지 못하게 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을 책임져야 할 사람이었다. 김 전 비서관과는 딴판으로 집으로 돈을 벌기는커녕 최저주거기준도 못 지킨 채 사는 이들이 전국에 106만 가구다. 최저주거기준은 면적이나 방 개수, 채광을 고려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1인 가구의 경우 부엌이 있는 방 하나, 주거 면적 14㎡(약 4평) 이상을 충족해야 한다.
집 한 채 없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곳이 ‘여인숙(旅人宿)’이다. 올해 5월 31일 기준, 서울에서 운영 중인 여관 및 여인숙은 총 2717개, 그중 상호에 ‘여인숙’을 포함한 곳은 287개다. 서울 지하철 영등포구청역 반경 1.5km에만 30개의 여인숙이 몰려있다. 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생존 보루. <아무튼, 주말>이 그곳을 찾아, 1박 2일간 투숙했다.
◇1.5평도 이곳에선 ‘특실’
“집 나온 거야?” 지난달 27일 영등포구 당산동에 위치한 D 여인숙에 들어서자, 주인이 물었다. 13번째 시도만에 들어선 곳이다. 기자가 “다른 여인숙은 젊은 여자를 잘 안 받아줘서요. 혹시 방 있나요?”라고 묻자, 주인 김명자(79)씨가 “여자는 사람 아니냐”며 흔쾌히 손짓했다. 그가 데려간 곳은 ‘특실’ 1번방. 1박에 2만원이었다.
2019년 6월 이맘때만 해도 D 여인숙에는 전체 방 11개 중 8~9개가 차 있었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손님이 급격히 줄었다. 이날도 방 3개만 손님이 든 상황. 그마저도 하나는 객실 청소를 돕는 관리인 방이다. 가스비와 전기요금, 관리인 월급을 포함하면 이곳의 한 달 유지비는 130만원. 원래 숙박 1만5000원, 대실 1만원이었지만 김씨는 가격을 5000원씩 올릴 수밖에 없었다.
‘ㄴ’자형 복도에는 11개의 방과 공용 욕실, 주방이 따로 있다. 기자가 머문 1번방이 특실인 이유는 화장실이 방 안에 있기 때문이다. 화장실을 제외한 5.1㎡(1.5평) 방은 대부분 싱글 침대가 차지해 오로지 ‘잠만 자는 방’처럼 보였다. 화장실에는 변기 하나, 쪼그려 앉았을 때 딱 맞는 높이의 수도꼭지, 발바닥 부분이 까맣게 변한 파란색 실내화가 있다. 침대 옆 흰 벽에는 오래전 투숙객이 손으로 벌레를 잡고 문댄 듯, 까만 얼룩과 잔해가 남아 있었다.
침대 머리맡에는 L사의 2006년식 창문형 에어컨이 있다. ‘약냉’으로 켰을 뿐인데 ‘왜앵~’ 하고 우렁찬 소리가 났다. 휴대폰 소음 측정 앱을 켜서 대보니 큰 소리로 대화하는 수준인 63㏈이 나왔다. 미니 냉장고 위에는 ‘대림2동 주민자치위원회’라고 쓰인 흰 수건이 개어져 있고, 냉장고 안에는 누가 한 모금 마신 듯한 생수 한 병이 있다. 혹시 몰라 침대 밑을 살펴보니 손바닥 크기의 패치형 바퀴벌레 퇴치제, 두루마리 휴지 3개가 있었다.
◇9번방 김씨는 3일을 굶었다
오후 4시 40분쯤 4번방에 머물고 있는 민모(72)씨가 TV를 끄고 옷을 주섬주섬 입는 소리가 들렸다. 민씨는 개인택시를 몰며 넉 달째 월 35만원으로 이곳에서 살고 있다. 12년 전 이혼한 뒤 거처를 마련하지 못했다. 새벽 6시부터 밤 10시까지 택시를 운전한 뒤 이곳으로 돌아와 고단한 몸을 누인다. 일주일 중 일요일 하루 쉰다. 그는 “방값 내면 수중에 떨어지는 돈이 한 달에 30만원도 안 돼. 칠십 넘어 다른 일을 시작할 엄두도 안 나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가족들이 찾아오진 않느냐 묻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 사는 거 아무도 몰라. 전입신고를 했나 뭘 했나. 달방살이 하는 놈은 이렇게 살다 가는 거요.”
잠시 후 9번방에서 김모(56)씨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5년째 이곳에 머물고 있는 그의 직업은 막일꾼. 공용 욕실에서 김씨는 샴푸 대신 주방 세제를 머리에 부었다. 어깨부터 팔뚝까지 30cm 길이의 검은색 용 문신이 있었다. 공사판에서 ‘기술자’로 불리는 김씨의 하루 일당은 18만원. 왜 더 좋은 숙박 시설로 옮기지 않느냐고 묻자 그가 말했다. “작년 겨울엔 비수기에 코로나까지 겹쳐 한 달 이상 쉬었는데 지금 아껴놔야지. 함바(현장 식당)에서 점심 한 끼 먹은 다음 날부터 일이 없어서 3일 굶은 적도 있는데 뭘.”
D 여인숙을 나와 영등포동 청과시장 뒤편으로 갔다. 등에 ’365 봉사단'이라고 적힌 노란색 조끼를 입은 이모(73)씨가 삼성장 여인숙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공사판에서 일하다 지난 1월부터 일감이 없어 쉬었다. 다시 일하려 했지만 허리가 아파 포기했다. 지금은 영등포구 민간 사회복지시설의 고용 지원을 받으며 생계를 겨우 유지한다. 5년 전부터 이곳에서 살았다는 그는 “집 없는 사람은 뉴스 보기도 겁난다”고 했다. “집값이 똥값이 돼도 우린 못 산다. 높으신 분들, 해도 해도 너무하신다.”
◇최후의 선택, ‘야반도주’
월세를 내지 못하자 새벽에 짐을 싸 도망가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지난달 6일, D 여인숙에서 방값을 후불로 내겠다며 3개월 머물던 일용직 노동자가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방 한가운데 검은 비닐봉지만 덜렁 남겨져 있었다. 김씨가 봉지를 열어보니 세탁 못 한 티셔츠와 생활 쓰레기가 있었다. 주인 김씨는 “나가기 3일 전인가, 이제 방을 비워줘야겠다고 했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미안합니다’라고만 하더라”고 했다. 경찰에 신고할까 고민했지만 ‘어려운 사람 더 어렵게 해서 뭐 하겠나’라는 마음에 생각을 접었다.
돈을 빌리고 사라진 사람도 있었다. 3년 전 1호실에 머물던 30대 남성은 아들처럼 살갑게 굴었다고 한다. 외출했다 돌아올 때 카스텔라, 곰보빵 같은 먹을거리를 사와 김씨에게 건네기도 했다. 하루는 “내 친구가 갚을 것”이라며 김씨에게 500만원을 빌렸는데, 사흘 뒤 사라져 버렸다. 분하지 않느냐고 묻자 김씨가 말했다. “아, 괘씸하지. 근데 맨날 TV 뉴스에 청와대 누가 부동산으로 몇억을 벌었네, 정치인 누가 법을 어겨가며 땅을 샀네 시끄럽잖아. 우리같이 없는 사람들 캐묻지 말고 국회 가서 그런 사람들이나 더 취재해.”
◇새벽 5시 생업을 시작하는 사람들
오후 8시, 여인숙 복도의 노란 조명이 꺼졌다. 각자 방문을 닫았는데도 옆방 TV 소리가 들렸다. 아나운서 말을 그대로 받아칠 수 있을 정도로 소리가 선명했다. 공용 화장실과 기자가 머문 방 사이에 3개의 방이 더 있지만 변기 물 내리는 소리까지 적나라하게 들렸다. 카운터 앞 복도엔 센서가 달려 누군가 지나가면 ‘딩동’ 하고 벨이 울리는데, 밤 10시가 지나자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가래 낀 기침 소리만 났다.
다음 날 새벽 4시 30분, 민씨 방에서 휴대전화 알람이 크게 울렸다. 30분 뒤 민씨가 마른세수를 하며 방에서 나왔다. 그는 어제 사 온 단팥빵을 비닐봉지에 넣어 주머니에 챙겼다. 민씨는 “아침밥은 잘 안 먹어. 먹어봤자 화장실밖에 더 가겠나”라며 1층으로 내려가더니 여인숙 입구에 대놓은 주황색 택시에 시동을 걸었다.
5시 10분쯤 막일꾼 김씨도 방에서 나왔다. 계단 앞 6칸짜리 나무 신발장에 놓인 작업화 3개가 김씨의 것이다. 김씨는 발목까지 오는 작업화를 꺼낸 뒤 쪼그려 앉아서 나갈 채비를 했다. 그는 “다섯 시 반까지는 당산동 사무실로 간다. 회사에서 작업자들 데리러 봉고차가 오는데, 그거 타고 강서구 공사장까지 간다”고 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율은 OECD 평균 3배에 해당하는 43.4%. 김범중 중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여인숙을 떠도는 노인들은 전입신고를 하지 못해 합법적 소재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신변에 문제가 생기거나 범죄에 노출돼도 구제가 쉽지 않고, 소득이나 신원 파악이 안 돼 복지 혜택을 받기 어렵다”고 했다.
막일꾼 김씨는 빗물 웅덩이를 밟으며 일터로 갔다. 민씨와 김씨 모두 날이 어둑해진 뒤라야 돌아올 것이다. ‘뼈 빠지게 일하는데 난 왜 집 한 칸이 없나’ 하는 고민은 사치. 여인숙 쪽방에 누워 담배나 한대 힘껏 빨 뿐이다.
그때, ‘딩동’ 소리와 함께 또 손님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