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반 나 하나 먹을 때 남친은 2~3개씩 먹는데···. (중략) 처음 연애 시작할 때는 반반 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는데, 괜히 만들었나 싶어요.”
지난 1월 2030세대가 많이 이용하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이런 고민 글이 올라왔다. 데이트할 때 반반 돈을 내서 만드는 ‘데이트 통장’이 과연 서로에게 공평하냐는 것. 데이트 통장은 공동 명의로 일정 금액을 모아 데이트 비용으로 쓰는 방식이다. 과거엔 평등하고 경제적인 연애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MZ세대(1980~2000년대 초반생)에 들어서며 달라졌다.
MZ세대는 이념보다는 실리, 조직보다는 개인, ‘여야 정쟁’ ‘남북 관계’ 등 거대 담론보다는 피부로 와 닿는 일상 속 차별(불공정)에 더 크게 분노한다. ‘공정 세대’란 별칭이 붙은 것도 이 때문. 이는 연애할 때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 온라인에선 공정세대의 ‘데이트 통장’ 논쟁이 불붙고 있다. ‘데이트 통장’은 어쩌다 논란의 중심에 선 걸까.
◇더 적게 먹는데, 돈은 5:5?
‘데이트할 때 지출을 줄이고자 데통(데이트 통장) 만들었습니다. 좋은 점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같이 쓰는 비용이다 보니 왠지 더 비싼 거 시켜 먹기 눈치 보이기도 하고···. 언젠가부터 여자 친구가 데이트할 때마다 자꾸 뭔가 사려는 것 같아서요.’
연애 관련 이슈를 주로 다루는 한 유튜버가 2019년 7월에 올린 영상. ‘구독자 사연’이라며 데이트 통장이 과연 좋은지를 묻는다. 이미 2년 가까이 된 영상이지만, 조회 수만 20만 회가 넘고 최근까지도 논쟁이 계속 이어지면서 1600개 넘는 댓글이 달렸다.
데이트 통장을 반대하는 입장에선, 돈을 똑같이 내는 게 겉으론 공평해 보이지만 실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좋아요’ 270개를 받은 댓글을 보면 이 입장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술집 가서 소주 2병 시키면 여자는 1~2잔 먹고, 나머지는 남친이 다 마신다. 식당 가도 자기가 더 많이 먹으면서 돈은 절반 내라고 한다.’ 좋아요 1900개를 받은 댓글도 비슷한 논리다. ‘더치페이란 자신이 먹은 걸 스스로 계산하는 것이지, 완벽한 나누기 2가 아니다.’
과거 데이트 통장을 사용했다는 대학생 하모(22)씨는 “피자를 먹어도 남자 친구가 3조각은 더 먹고, 빙수를 먹어도 남자 친구가 열 숟가락은 더 많이 먹는다”며 “그런데 아르바이트해 번 돈 20만원씩 똑같이 낸다”고 했다. 하씨는 “데이트 통장이 결정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자주 다투는 원인은 됐다. 결국 8개월 만에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고 했다.
데이트 통장이 싫다는 이유 중엔 이런 주장도 있다. “데이트 통장인데, 꼭 결제는 생색내면서 남자가 한다.” 중견기업 직장인 A(27)씨의 말. “특히 친구들 앞에서 계산할 때 마치 자신이 사는 것처럼 데이트 통장에 있는 돈을 활용해요.”
◇언제까지 남자는 밥, 여자는 커피?
데이트 통장을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대기업에 다니는 30대 남자가 회사 동기와 사귀기 시작했는데, ‘남자는 밥, 여자는 커피’란 공식이 굳어져 있더란다. 이 남성은 ‘데이트 통장 만들자고 했다가 여자 친구에게 욕먹었다’는 제목의 고민 글을 올리며 “입사 동기로 월급도 똑같고, 경제 여건도 비슷한데 돈을 반반 내자고 했더니 싫은 티를 내더라. 불공평은 스스로 만드는 것 아닌가”라며 하소연했다.
취업 준비생 임모(29)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취업도 힘들고 집값도 비싸니, 절약하고 싶은 마음에 여자 친구에게 데이트 통장 얘기를 꺼냈다가 ‘치졸하다’는 면박을 받았다. 임씨는 “밥 먹는 양까지 정확하게 따질 거면 커플링 할 때 금 함량도 계산하고, 술 마실 때 주량도 고려해야 한다. 이게 더 치졸한 것 아니냐. 남녀평등을 얘기하면서 데이트 비용 반반 내자는 말 하면, 우리 사회에서 남자는 여전히 찌질한 사람이 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남자가 데이트 통장을 말하면 ‘이별 통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실제 지난 5월에는 ‘남자 친구가 데이트 통장 하자기에 헤어졌다’는 글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와 17만회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변신원 교수는 “공정은 매우 중요한 가치다. 그러나 데이트는 서로 좋은 마음으로 만나는 것으로 애정과 배려가 바탕이 돼야 한다. 이것을 평등의 담론에 끌어들여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변 교수는 “결국 누적된 불평등이라는 사회 구조적 문제가 왜곡돼 나타나는 것이라고 본다”며 “모든 평등이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50:50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여성 연봉이 높다면 여성이 비용을 더 많이 낼 수 있다. 상황을 길고 깊게 본다면 성별 임금 격차가 엄연히 있고, 여전히 남성의 유산 상속이 많은 등 경제적 규모와 관련된 다른 현안들이 본질적인 문제인 것이다. 여기엔 계층과 청년의 문제가 함축돼 있는 셈”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