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주말뉴스부장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가 대전 현충원 방명록에 남긴 손 글씨가 논란이 됐을 때, 첫 직장 ‘샘터’에 입사했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인사하는 신입 사원에게 당시 출판부장이던 김형영 시인(작고)이 “자네 이름을 저 칠판에 한자로 써보시게” 합니다. 이름 석 자를 한자로 쓸 수 있는지 시험하나 싶어, 슥슥 써 내려가니 “글씨 한번 호방하게 쓰네, 시원시원하네” 하시더군요. 작고 동글동글한 ‘소녀체’가 아니고, 크고 뾰죽뾰죽한 ‘아저씨체’라 부끄럽더니, 시인의 칭찬 한마디에 어깨가 으쓱해졌지요.

요즘은 거의 모든 글씨를 컴퓨터 자판을 눌러 쓰니 손 글씨가 희귀한 것이 되었습니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이란 뜻의 서여기인(書如其人), ‘인물을 평할 때 체구·말씨·판단력과 함께 글씨를 기준으로 삼는다’는 뜻의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말도 젊은 세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볼펜 잡고 손아귀에 힘을 주어 글씨 쓸 일이 없다 보니, 이준석 대표처럼 갑자기 방명록에 손 글씨를 써야 할 경우 적잖이 당황할 것도 같습니다. 저도 대부분 휴대전화의 문자나 카톡으로 소통하다 보니 악력은 사라지고 손끝도 무뎌지는 것이, 나날이 엄지손가락 통증만 커지는 중입니다.

모처럼 손 글씨의 멋을 느끼려 찾은 곳이 ‘일중 김충현’전(展)입니다. 20세기 한국 서단의 거목이라는 김충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붓글씨엔 문외한이지만, 명필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바로 느낄 수 있더군요. 전서·예서·해서·행서·초서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화선지를 가지고 놀았다는 국필(國筆)이라더니, 늠름한 글씨가 있는가 하면, 익살맞은 글씨가 있고, 구름처럼 훨훨 날아가는 글씨도 있습니다. 그림인지 글자인지 분간이 안 될 만큼 자유분방하고도 유머러스한 작품 앞에선 슬며시 웃음도 났지요.

서(書)의 아름다움은 지난해 조선일보 100주년을 기념해 마련된 ‘ㄱ의 순간’전에서 이미 맛본 적 있습니다. 서희환, 박대성, 김호득, 박원규의 대작에도 감탄했지만, 방탄소년단의 RM 등 관람객들이 남긴 붓글씨를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했지요. 무용가 안은미가 남긴 붓글씨는 압권이었습니다. ㄱ을 붓으로 다섯 번 내리그은 뒤 저마다 두 개의 발을 그려 넣어 ‘춤추는 ㄱ’을 만들어놨더군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 글씨는 최근에 보았습니다. 군에 입대해 최전방에 배치받아 떠난 아들이 “걱정하지 말라”며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손 편지. 이준석 못지 않게 엉성한(?) 글씨체이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절절이 묻어나 눈물이 톡 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