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개인 택시를 모는 문모(61)씨는 최근 강남 역삼동에서 잠실까지 가 달라는 카카오T 콜을 받았다. 그런데 역삼동에서 문씨를 기다리고 있던 건 사람이 아닌 ‘음식’. 콜을 부른 남성은 음식이 담긴 봉투를 내밀며 “목적지까지 음식만 배달해주면 요금은 그대로 드리겠다”고 했다. 택시로 음식을 배송하다가 법적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손님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문씨는 “음식 배달 업체에 내는 대행비보다 택시 요금이 저렴해서 택시를 부르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만약 문씨가 직접 음식 배달 업체에 라이더(배달부)로 등록한 뒤 음식을 받았다면 괜찮을까. 오히려 규정 위반으로 라이더 계정이 정지됐을 가능성이 크다. 각 업체가 ‘영업용 차량으로 배달하는 건 규약 위반’이라고 명시해 놓았기 때문이다. 오토바이는 물론 자전거, 킥보드, 도보로도 가능한 음식 배달을 택시로 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안 된다'는 법 없는데··· 규제 앞에 막혔다
배송 업계가 택시 배송을 막는 건 택시가 음식을 배달해도 되는지 명확한 법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은 고속버스 등 노선 사업자가 일부 소화물을 배달할 수 있다고만 적어 놓고 있다. 택시는 노선 사업자가 아닌 구역 사업자. 국토교통부 관계자는 “화물 사업자는 화물, 여객 사업자는 여객만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라면서 “별도의 허가 조항이 생길 때까지는 택시로 음식이나 소화물을 배달하는 건 어렵다”고 했다.
실제로 택시 택배를 시도한 스타트업이 규제에 가로막히기도 했다. 2019년 설립한 딜리버리T는 앱으로 택시를 불러 택배를 배송하는 시스템을 만들었고, 기술보증기금 등에서 2억여원 투자도 받았다. 그러나 화물 업계의 반대로 2년째 운영에 난항을 겪고 있다. 남승미 딜리버리T 대표는 “코로나로 택배 물량이 급격히 늘면서 과로사하는 노동자까지 나오는데 왜 택시 배송 시스템을 허용해주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7명까지 늘었던 직원이 3명까지 줄고, 투자 자금도 거의 소진해 사실상 ‘개점 휴업’ 상태”라고 했다.
◇택시 수입 줄고 배송 수요는 늘었다
택시 업계는 ‘택시도 음식 배달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순선 서울개인택시조합 이사장은 “퀵 서비스나 음식 배송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법령 개정 요구를 고려하고 있다”면서 “택시는 이미 전국 구석구석 물류를 담당할 수 있는 배송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음식 배송을 허락해달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택시 업계가 코로나로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서울시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 개인 택시와 법인 택시 수입은 티머니 결제를 기준으로 25% 가까이 줄었다. 지난 한 해 동안 법인 택시 종사자가 4446명이나 일자리를 잃었다는 통계(국토교통부)도 있다. 반면 지난해 음식 배달 거래액은 2019년 대비 43.5%나 늘어 처음으로 20조원을 돌파했다.
◇해외선 ‘택시 배송’ 합법화
택시로 화물이나 음식을 배송할 수 있게 되면 경쟁력이 있을까. 한 배달 업계 관계자는 “택시가 라이더 공급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다. 배송 수요가 많은 지역은 라이더를 구하지 못해 건당 1만원의 보너스를 주거나 퀵 서비스를 부르는데, 미터기로 정찰 요금을 받는 택시가 참여하면 더 저렴한 운송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골목골목을 돌며 문 앞 배송을 위해 정차까지 하는 배달 일의 특성상 택시는 오토바이에 비해 경쟁력이 없다”는 의견도 있다.
아예 택시의 화물 진출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전국용달 화물자동차 운송사업연합회(용달연합회) 관계자는 “택시가 화물을 운송할 수 있게 하려면, 화물차로도 여객 운송을 할 수 있게 풀어줘야 한다”면서 “밴형 화물자동차로 화주와 화물을 같이 운송하는 ‘콜밴 화물’은 택시 업계 반대로 규제가 늘어서 사실상 사장된 상태”라고 했다.
해외에선 코로나 사태 이후 택시의 음식·화물 배송을 허용하는 추세다. 미국 뉴욕시는 지난해부터 수입이 시간당 15달러(약 1만6700원)에 못 미치는 택시가 음식을 배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후 1년간 택시가 6400만 끼의 음식을 배달했다. 이곳 기사들은 음식을 트렁크에 담아 냄새 피해를 줄인다고 한다. 일본 역시 지난해 10월부터 택시 사업자의 음식 배달을 전면 허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