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제목으로 열린 2019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 설치된 정은영 작가의 영상 작업.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이 강렬한 문장을 처음 본 것은 2019년 여름, 학회 참석차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갔을 때 들른 제58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전시에서였다. 근대성, 동아시아, 젠더를 키워드로 하여 한국 근대사를 예술적으로 재구성한 전시. 그 전시는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을 제목으로 따 왔다.

소설 ‘파친코’의 구성상 가장 흥미로운 점은 바로 저 첫 문장과 나머지 부분의 관계다. 누가 화자인지, 그리고 발화 시점은 언제인지 특정하지 않은 채로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선언한 뒤, 곧바로 120여 년 전 한국 역사로 직진한다. “세기가 바뀔 무렵, 나이 든 어부와 그 아내는 돈을 더 벌어 보려고 하숙을 치기로 했다. 두 사람은 모두 항구 도시 부산의 영도에서 태어나 자랐다.” 그렇다면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첫 문장은 이후 이어지는 스토리의 요약인 걸까, 소설가 이민진의 다짐인 걸까. 독자에게 건네는 사전 경고인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소설 속 등장인물들에게 건네는 위로인 걸까.

실로 등장인물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파친코’는 4대에 걸친 가족과 그 주변 인물들이 겪은 수난과 생존 투쟁의 역사다. “유미는 여동생과 집을 도망쳐 나와서 버려진 옷 공장에서 살았다. 겨울에 두 사람은 고열로 앓아누웠고, 여동생은 자다가 죽고 말았다. 유미는 죽은 동생의 시체 옆에서 거의 하루 내내 잠을 자면서 자신도 죽기를 바랐다. (듣고 있던) 선자는 앉은 자세를 바꾸어 며느리를 향해 다가갔다. 아가야, 고생 참 많이 했데이.”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민진이 쓴 '파친코'.

‘파친코’에 따르면, 한 세기 내내 많은 재일 조선인은 어딘가 망가진 채로 태어나고, 얻어맞고, 굶고, 감옥에 가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가까스로 과거를 받아들이고, 모멸받고, 후회하고, 늙고, 늙어 죽고, 타살당하고, 자살하고, 상처받고, 배척받고, 그리고 대를 이어 파친코의 지배인이 된다.

이들 중에 자기 존재를 짓누르는 ‘역사’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역사라는 두 글자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담겨 있는가. 여기서 역사란 개인을 둘러싼 그 모든 것이다. 사람은 일단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없다. “제 엄마는 좋은 사람이 아니에요. 저희를 때렸어요. 다른 무엇보다 술 마시고 돈 버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죠.”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부모가 빚어온 시공간에 태어나기 때문에, 그 시공간은 누적된 염원과 원한과 증오와 희로애락의 파도가 세차게 몰아치는 곳이기 때문에, 역사는 그들을 망쳐 놓는다. 인간은 역사를 이길 수 없다. 마치 서퍼가 파도를 이길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이 역사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역사를 타고 넘으며 나아가는 것뿐이다. 파도를 마주한 서퍼가 할 수 있는 일이 파도를 타고 넘으며 나아가는 일뿐인 것처럼. 다시 말해, 역사의 파도에 젖지 않을 도리는 없다. 만약 누군가 자신은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라고 말한다면, 그는 신이거나 거짓말쟁이다. 역사는 기어이 인간을 망쳐 놓는다. ‘파친코’에서 재일 조선인은 말한다. “잘 들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자신을 둘러싼 역사가 기어이 자기 생을 망쳐 놓았지만, 그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망쳐 놓지 않았다고 강변하지 않는다. 자신은 멀쩡하다고 으스대지 않는다. 역사를 결코 미화하거나 윤색하지 않는다. 인정한다, 역사가 자신을 망쳐 놓았다는 것을. 그리고 말한다. 상관없다고. 자기 연민에 빠지거나, 타인을 탓하지 않고 말한다. 상관없다고. 더 이상 소리 내어 남 탓 하기를 그만둘 때, 주인공들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이제 그들은 시간을 아껴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출근할 것이다.

집을 나선 주인공들은 파친코에 간다. 중세 유럽의 각종 길드에서 쫓겨난 유대인들은 길드가 없는 대부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다. 재일 조선인들에게도 선택지는 많지 않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직장이 아닌 파친코에 가야 한다.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로 도박하기 위해서 파친코에 가는 것은 아니다. 맑은 머리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파친코를 운영하러 간다. 자기 자식만큼은 파친코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기를 애타게 바라면서. 그런 점에서 그들은 파친코를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선택이란 말은 항상 그의 어머니가 쓰던 말이었다.”

그러나 자식들도 파친코에서, 그리고 파친코에 비유할 수 있는 이 불리한 세계에서 결국 벗어나지 못한다. 파친코 운영자는 사회적 존중을 받지 못하고, 도박하는 사람은 대개 돈을 잃는다. 그러나 모두 돈을 잃는 것은 아니다. 이 험한 세상과 마찬가지로 파친코에는 우연과 개인의 운신(運身) 폭이 존재한다. 파친코는 간혹 돈을 딸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을 교육할 자산을 만드는 사업체이기도 하다. “인생은 엿 같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야.” 파친코의 세계는 부당한 세계이지만 동시에 살아나가야 할 세계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조국이 없어, 인생이란 저 아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하니까. 그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지.”

소설 ‘파친코’는 개인이 역사라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 승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 역사라는 파도에 잔혹하게 익사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숨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 역사의 파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 이야기다. 거센 역사의 파도가 지나간 곳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어딘가 부서져 있다. 자신이 부서져 있다는 것을 숨기지도 않고, 미화하지도 않고, 거기에 굴하지도 않을 때, 비로소 말할 수 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고.

파친코를 쓴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 이민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