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 소년은 가발 만드는 일이 좋았다. 살아 숨 쉬는 머리카락을 꿰매 옷을 짓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대한민국 10대 수출 품목’을 만든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공장 디자인실에서 먹고 자며 밤낮으로 인모(人毛)를 만지작거렸다. 직접 머리를 길러 컬(curl)을 넣어보며 기술을 익혔고, 여공들을 찾아다니며 머리를 만져주기도 했다.
50여 년이 지났다. 한때 한국을 먹여 살렸던 가발업은 사양 산업이 됐다. 장발 소년의 머리도 어느새 하얗게 셌다. 그래도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면 그가 아직 가발을 놓지 않았다는 것. 그것도 뿌르발링가 등 인도네시아 중부 지역에 가발 공장 여덟 개를 운영하면서 종업원 2만여 명을 고용하고 있는 가발 생산 업체 대표가 됐다. 통가발, 반가발, 붙임머리 등 다양한 가발을 생산해 미국과 유럽, 아프리카 등지에 수출하는 이 회사의 연 매출은 1억달러(약 1108억원) 수준. 압도적인 세계 1위다.
지난달 잠시 귀국한 김영율(69) 성창 대표를 서울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인류가 존속하는 한 가발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시로 가발 아이디어 메모하는 ‘디자이너 CEO’
-1인당 GDP가 4000달러에 불과한 인도네시아에 한국인이 세운 가발 공장이 세계 1위인 줄 몰랐다.
“처음부터 지금 규모였던 건 아니다. 1993년 직원 100여명으로 시작한 일이 여기까지 왔다. 가발업은 특별한 비결이 없다. 대표인 내가 직접 제품 개발에 참여하고, 품질을 최우선으로 삼은 덕이다.”
-칠순을 앞둔 지금도 가발을 직접 디자인 하시나.
“아직 창창한 현역이다(웃음). 품에 메모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수시로 메모한다. 요즘은 방수 가발에 꽂혀 있다. 머리카락 올마다 방수 코팅을 해서, 쉽게 빨아 쓸 수 있도록 하는 거다. 코팅된 머리카락에 컬을 넣을 기술이 마땅치 않아 고민이 많다.”
-’가발' 하면 탈모 남성만 떠오르는데, 인종·성별에 따라 그 종류와 용도가 다양하다고 들었다.
“백인 여성은 고소득층이 많은 만큼 패션용으로 쓰는 경우가 많다. 흑인들은 태생적으로 곱슬이 굉장히 심해 그대로 두면 머리카락이 두피를 뚫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가발을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요로 따지면 흑인 여성, 백인 여성, 남성 순으로 많다고 보면 된다.”
-수많은 경쟁사를 제치고 세계 시장에 자리 잡은 비결이 있다면.
“남들보다 빨리 동남아로 진출한 덕에 규모의 경제를 이뤘다. 백인 가발, 흑인 가발, 남성 가발을 따로 만드는 공장은 많지만 이를 모두 생산하는 회사는 우리밖에 없다. 기술도 다른 업체보다 최소 2~3년 앞서 있다고 보면 된다.”
◇혁신은 언제나 디테일에 있다
김 대표는 우리나라에 가발 공업이 성행하던 1970년부터 구로공단 가발 공장에서 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린 입지전적 인물이다. 견습공 시절 가발 앞부분에 얇은 피부 막을 덧댄 ‘신 스킨(thin skin) 가발’을 개발해 대박을 터뜨렸다. 그는 “남들은 월급으로 쌀 한 가마니 받을 때 나는 열 가마니씩 받았다”고 했다. 뜻밖에도 고등학교는 실업계가 아닌 인문계를 졸업했다고 했다.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 대신 가발업에 뛰어들었다.
“충남 대천이 고향인데, 부모님이 8남매 중 나만 서울 고등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자식 한 놈만 잘 키우자’는 생각이셨을 거다. 부모님은 연·고대 법대 진학을 권했는데, 그럴 자신이 없었다(웃음). 대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다가 가발 디자이너를 떠올렸다. 가발 공장에 다니는 고향 누나들이 많았다. 그들이 부모에게 돈을 부쳐주는 걸 보면서 막연한 동경심이 있었다.”
고3 때 가발 공장이 밀집한 구로공단으로 현장 실습을 떠났다. 서울통상, 상영산업 등에서 디자이너로 활약하다 1986년 독립해 직접 공장을 차렸다. 성북동에 번듯한 집을 마련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위기는 불현듯 찾아왔다. 90년대 이후 산업 구조가 고도화되고 노사 분규가 잦아지면서 노동 집약 산업인 가발업은 급속도로 쇠락했다. 세계 가발 생산 1위였던 한국에서 언젠가부터 가발 공장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김 대표는 공장을 닫는 대신 해외 이전을 택했다.
-저물어가는 가발업을 놓지 않은 이유가 있나.
“한국에선 가발을 만들 상황이 안 됐지만, 가발에 대한 수요는 항상 있다고 봤다. 아프리카 등 흑인 중심 국가의 GNP(국민총생산)가 높아지면, 이들이 가발 시장으로 자연스레 흘러들어 올 거라 생각했다.”
-사양 산업은 있어도, 사양 기업은 없다는 건가.
“그렇다(웃음).”
-당시 한국을 떠난 기업들은 대체로 중국이나 베트남에 자리 잡았는데, 굳이 ‘미지의 세계’인 인도네시아로 향한 이유는.
“그때만 해도 3국 중 인도네시아가 생산성이 가장 떨어진다는 시선이 많았다. 그런데 직접 가보니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머리 만지는 데 거부 반응이 적더라. 기술만 잘 알려주면 숙련공을 많이 양산할 수 있겠다 싶었다.”
-어려움은 없었나.
“처음 3년간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다. 가발을 납품하던 미국 기업이 일본에 넘어가면서 주문량이 20%대로 급감했고, 공장 이전 과정에서 사기까지 당했다. 서울 집까지 팔아가면서 겨우 회사를 유지했다. 그러다 1997년 ‘쪽머리 가발’로 대박을 터트리면서 기사회생했다.”
-쪽머리 가발이 뭔가.
“당시 ‘에비타’라는 영화가 인기였다. 영화에서 여주인공 에비타(마돈나 분)가 쪽진 머리를 하고 다니는데, 미국 여성들이 거기에 관심을 갖더라. 이를 가발에 적용했다. 도안을 만들어 납품업체에 보냈더니 반색을 했다. ‘6개월 안에 1200만개를 만들라’는 주문이 떨어졌다. 300명에 불과하던 직원을 급히 1000명으로 늘려 겨우 납품 기일을 맞췄다.”
-2007년 금융 위기 때는 ‘레이스 프런트 가발’을 개발해 또 한번 히트를 쳤다던데.
“가발 앞에 작은 구멍이 송송 뚫린 레이스 조각을 덧댔다. 이 가발을 쓴 채로 파운데이션을 바르면 이마 라인이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레이스 하나 덕분에 개당 7~8달러에 팔리던 가발 가격이 30달러까지 올랐다. 혁신은 언제나 디테일에 있다.”
◇대기업 마다한 큰아들, 국적 바꾼 작은아들
김 대표 자녀들도 직간접으로 회사 경영에 함께하고 있다. 큰아들은 해외 영업, 작은아들은 공장 관리를 맡고 있다. 내수 시장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딸 부부까지 명실상부 ‘가족 회사’다.
장남 김창근(40) 전무 이야기가 흥미롭다. 고려대 공대 재학 시절 SK하이닉스의 입사 제의를 마다하고 아버지 공장에 들어갔다.
-큰아들은 왜 국내 대기업 대신 아버지 회사를 선택했을까.
“신소재공학부에 다니던 아들이 SK하이닉스 전액 장학생으로 선정됐는데, 졸업 후 그곳에 입사해야 하는 조건이었다. 그래서 각서를 쓰라 했다. ‘네가 그 회사에 입사한다면, 아버지 회사는 절대 탐내지 마라. 현장에서 일해보지 않은 자식에게 회사를 물려줄 수는 없다’고.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전화기도 놓고 집을 나서더라. 딱 한 달 되는 날 ‘인도네시아로 가겠다’는 전화가 왔다. 고맙다고 했다.”
-공장 관리를 맡은 차남 김대근 상무는 국적도 바꿨다던데.
“처음 둘째 아들이 공장장을 맡았을 때 현지 직원들과 크게 다툰 적 있다. 아들이 직원들에게 생산성을 높여 달라고 했는데 그들을 몰아붙이는 걸로 오해한 것이다. 이후 직원들과 더 가깝게 소통하기 위해서 국적을 인도네시아로 바꾸겠다고 하더라. 지금은 직원들과 친구처럼 지낸다.”
-가족이 함께 일하다 보면 서로 부딪칠 때 없나.
“왜 없겠나. 아들들이 ‘아버지는 구식’이라며 들이받기도 한다, 하하!”
-오지로 여겨지는 인도네시아에서 18년을 버텼다.
“처음 공장을 올렸을 때는 워낙 못사는 집이 많았다. 직원들이 다들 슬리퍼 신고 출근했다. 3~4년쯤 지나자 자전거 타는 직원이 생겼고, 그다음엔 오토바이 세상이 왔다. 요즘 일부 직원은 조그마한 자동차로 출근하기도 한다. 내가 인도네시아 경제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다.”
-50년 넘게 가발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다. 대표님께 가발이란 뭔가.
“여인보다 좋은 것!(웃음) 20대에는 인모 공정이 인조모(人造毛)로 바뀌는 과정을 봤다. 이제는 가발이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역할에서 패션 아이템으로 진화하고 있다. 남들이 볼 때는 그제나 지금이나 똑같은 가발이지만, 나는 모든 가발이 다르게 보인다. 죽을 때까지 가발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