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D-9개월, 우르르 쏟아지는 대권 주자의 신간이 서점 매대를 속속 채우고 있다. 여권 주자로는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박용진의 정치 혁명’, 정세균 전 국무총리 에세이 ‘수상록’, 이낙연 전 대표 대담집 ‘이낙연의 약속’ 등이 최근 잇따라 출간됐다. 김두관 의원은 9일 자서전 ‘꽃길은 없었다’ 출간 기념회를 열 예정이다. 야권은 상대적으로 잠잠한 편이지만, 잠룡으로 꼽히는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가 출판사 쌤앤파커스를 통해 정책 비전집을 준비 중이다. 유력 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자서전 출간도 임박했다는 얘기가 출판가에서 나온다.

대선 철이 되면 대권 도전을 공식화하는 신호탄으로 어김없이 등장하는 ‘정치인 자서전’. 출판정치의 숨은 이야기를 들어봤다

◇‘복병’ 조국에 당황

“조국의 시간, 그 시간이 언제까지 갈지….” 최근 대선 후보 책을 기획한 한 베테랑 편집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산사태 같은 거죠. 다른 책들이 다 묻혔으니.” 또 다른 출판사 대표의 얘기다.

최근 대선 주자의 책을 출간했거나 계획 중인 출판사에선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회고록 ‘조국의 시간’이 돌풍을 일으키자 울상이다. 한 출판사 관계자는 “10개월 가까이 준비해 유력 후보 책을 낸 편집자가 복병이 나타나 찬물을 끼얹었다고 당황하더라. 이달 중 출간을 계획했다가 늦추는 곳도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대선용 책은 어떤 책보다 ‘타이밍’이 생명이다. 한 편집자는 “계약 당시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여서 ‘다 죽었어’ 하는 심정으로 야심 차게 만들었는데, 책 준비하는 사이 지지율이 곤두박질친 적도 있다”고 했다.

일각에선 조 전 장관의 책을 대선용으로 보는 시선도 있다. 이에 대해 ‘조국의 시간’을 펴낸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이 책은 ‘정치인' 조국의 책이 아니다. 한국 사회가 당면한 문제점을 성찰하고 우리 사회에 담론을 이끌어 내기 위한 인문학 서적”이라고 강조했다.

◇‘위인전’에서 ‘대화형 에세이’로

대선 출마용 책은 크게 정책집, 자전적 에세이형, 대담집 등으로 나뉜다. 신승철 북이십일 이사는 “과거 ‘위인전 분위기의 자서전이나 회고록’ 스타일에서 요즘은 ‘인간미 풍기는 에세이형’으로 바뀌면서 구어체 대화형으로 쓴 책이 많아졌다”고 했다. 그가 기획해 지난달 출간한 ‘이낙연의 약속’은 이 전 대표와 언론인 출신 문형렬 작가의 대담집이다. 문 작가는 2017년 문재인 대통령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도 참여했다. 신 이사는 “당시 조국 전 장관을 대담자로 제안한 출판사도 있었다는데, 문 대통령 측에서 작가가 동네 아저씨처럼 편안하게 질문을 던지는 우리 안을 선택했다”고 했다.

구어체 대담 형식은 2012년 발간돼 총 75만 부가 팔린 초대형 히트작 ‘안철수의 생각’ 이후 유행이 됐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 제정임 교수의 대담으로 구성된 ‘안철수의 생각’은 출판계에선 ‘정치인 자서전의 바이블’로 통한다. 대필 작가(고스트 라이터)를 숨기는 기존 방식에서 탈피, 전문가를 전면에 등장시켜 정책과 인생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풀어냄으로써 신선한 이미지를 줬다는 평이다. 책 출간에 관여한 김윤경 김영사 이사는 “당시 안 대표가 딱 지금의 윤 전 총장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대선 출마 여부를 둘러싸고 안 대표에 대한 여론의 관심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책을 통해 대권 행보를 사실상 공식화했기에 파급력이 컸다”고 했다. 새로운 형식과 타이밍, 저자에 대한 대중적 관심 등 삼박자가 맞아 떨어져 흥행을 일군 케이스다. 2011년 18대 대선을 앞두고 발간돼 지금까지 30만 부 정도 팔린 ‘문재인의 운명’도 성공작으로 꼽힌다.

얼마 전 나온 정세균 전 총리의 ‘수상록’도 톡특한 시도를 보여줬다. 이 책은 30대 출판인 구명진씨가 하는 일인출판사 ‘이소노미아’에서 펴냈다. 구씨는 “정 전 총리가 20~30대 젊은 세대와의 소통에 중점을 둬 에세이형으로 풀었다”며 “표지도 아예 저자 사진을 안 넣고 그 연령대가 좋아하는 일러스트로 했다. 동명이인이 낸 책인 줄 아는 사람도 많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정치인 책은 커버 사진에 특히 신경을 쓴다. 정치인 이미지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한 편집자는 “외모에 자신이 없는 정치인일수록 사진 선택을 매우 까다롭게 하는 편이다. 수십 개 안을 두고 고심할 때도 있다”고 했다.

◇대필 작가가 정치 철학 창작하기도

대선 주자용 책을 만들 땐 편집자 역할이 특히 더 중요하다. 신승철 이사는 “정치인의 약점은 제거하고 장점을 살리는 의사 역할을 편집자가 하는 셈”이라고 했다. 한 출판사 대표는 “후보가 단순히 책을 만드는 사람을 넘어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는 파트너를 원해 대표가 직접 나서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대선 주자 책을 만들고 있는 한 출판사 대표는 “정치인 중 직접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생각은 있는데 시간과 글 솜씨가 안 돼 편집자나 대필 작가가 구술받아 정리하는 경우면 A급”이라며 “대필 작가가 정치 철학까지 창작해야 하는 정치인도 있다. 한 나라를 경영하겠다는 사람이 그 정도 비전도 없는 걸 보면 한심할 때도 있다”고 했다. 그는 “대필 작가라도 단순히 글만 잘 써선 안 된다. 정책 토론이 가능한 실력파가 필요한데, 손에 꼽을 정도”라고 했다.

대선 출마용 책은 출판사 입장에선 모험이다. 김윤경 이사는 “정치인 책은 팬덤을 기반으로 하는 책이다. 일반 독자는 홍보·선전물로 인식하기 때문에 정치인 인지도와 판매 부수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고 했다. ‘베팅’한 후보가 낙선할 경우의 리스크도 무시 못 한다.

여론조사 1, 2위를 다투는 유력 대권 후보인 윤 전 총장과 이재명 경기지사는 아직 구체적인 책 출판 계획을 밝히지 않았다. 특히 직접 쓴 책이 없는 윤 전 총장에게 쏠린 관심이 뜨겁다. 한 출판사 대표는 “윤 전 총장 측에서 몇몇 출판계 인사에게 책 관련 조언을 구한 것으로 안다”며 “출간을 할지 말지, 한다면 어떤 식이 좋을지 얘기가 오갔지만 아직 결정하진 않았다고 들었다”고 했다. 한 편집자는 “지금 윤석열은 출판인이라면 누구나 눈독 들이는 초대박 저자이지만 까딱 잘못했다간 현 정부로부터 정치적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어 출판사에서 쉽게 덤비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고 했다.

편집자에게 대선용 책은 어떤 의미일까. 30년 가까이 정치인 책을 기획한 한 편집자가 말했다. “출간 후 반응이 좋은데 ‘고맙다’고 말한 정치인은 여태껏 없었다. 잘 나가면 자기가 잘난 것으로 알고, 안 나가면 편집자 탓을 한다. 그러니 정치인 아니겠는가(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