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샤넬 가방 구매 완료!” 인스타그램 팔로어 3000여 명을 보유한 20대 A씨는 주기적으로 명품 ‘인증샷’을 올린다. 호텔에서 찍은 바캉스 사진, 외제차와 함께하는 드라이브 사진도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다. 그런 A씨의 자기소개란에는 ‘주부도 휴대폰 하나로 월 1000만원 쉽게, 부업 문의’라는 문구와 함께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 주소가 적혀 있다. 스마트폰으로 매월 1000만원을 번다는 부업은 대체 무엇일까.
직접 A씨에게 접촉해 대화를 나눠봤다. 처음엔 ‘인스타그램에서 화장품을 홍보해주는 일’이라고 말하던 A씨는 기자가 ‘내일부터 일하겠다’고 하자 갑자기 가입비 얘기를 꺼냈다. “가입비 200만원을 내고 정식 판매원으로 등록하면 모집 인원에 따라 매일 직급 수당을 받을 수 있어요. 하루 1000원부터 시작해서 최고 등급은 매일 250만원이나 받는답니다.” 그렇다. A씨의 정체는 ‘불법 다단계 판매원’이었다.
◇소셜미디어로 거점 옮긴 다단계
그간 불법 다단계는 주로 판매원들의 인맥을 동원하는 전형적인 ‘지인 확장’식 영업으로 이뤄졌다. 서울 선릉역 등에 몰려 있는 다단계 업체들은 주기적으로 대규모 설명회를 개최하고, 여기에 기존 판매원의 인맥을 동원해 세를 확장했다. 2011년에는 거마(송파구 거여·마천) 지역에서 대학생들을 반강제로 합숙시키며 제품 판매를 강요하던 불법 다단계 업체들이 경찰에 대거 적발되기도 했다.
최근 유행하는 신종 다단계는 기존 행태와 다르다. 이들은 소셜미디어를 적극 활용해 판매원을 모집한다. 인스타그램에 각종 외제차와 명품 등을 올리면서 부를 과시하고, 그 사이에 다단계 회사를 교묘히 홍보한다. ‘부업으로 한 달에 1000만원 벌기’, ‘자면서도 돈 벌기’ 등은 이들이 사용하는 단골 문구다. 이들은 관심을 보이는 이들을 대상으로 줌(zoom) 화상 설명회까지 연다.
건강식품을 판매하는 한 업체의 화상 설명회를 들어봤다. 15명이 참여한 설명회에서 캐나다에 산다는 관계자는 ‘주변 지인들에게 건강식품을 소개만 해도 돈이 들어온다’고 강조했다. 업체 관계자는 1시간의 설명회를 ‘내가 소프트웨어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네트워크 마케팅을 했을 것’이라는 빌 게이츠의 명언(물론 사실이 아니다!)으로 마무리했다.
◇카톡으로 매일 홍보 지침 내려
불법 다단계 업체들이 소셜미디어로 활동 무대를 옮긴 건, 최근 경찰의 단속이 강화된 데다 코로나 감염증 사태로 집합 활동이 금지되면서 전통적인 지인 영업 방식을 고수하기 어려워진 탓이다. 이들은 판매원들에게 소셜미디어 인플루언서가 되라고 유도한다. 명품과 돈다발을 통해 화려한 삶을 보여준 다음 이를 통해 신규 회원을 모집하라는 것이다.
2년 동안 영양제와 화장품을 파는 다단계 업체의 판매원으로 일하다 최근 그만둔 박재효(24)씨의 말을 들어보자. “30여 명이 모여 있는 카톡방에서 스폰서가 매일 ‘홍보 지침’을 전파합니다. 인스타그램에 어떤 문구를 올려야 하는지, 화장품의 효능은 뭐라 쓰면 좋은지 상세히 알려줘요. 일주일에 두 번은 팀별로 줌 화상 회의를 갖고 실적을 보고하고, 한 주에 한 번 대면 회의도 합니다.” 박씨는 2년간 매일 개인 소셜미디어 계정에 홍보글을 올렸고, 팔로어도 3000명이나 확보했다. 그러나 스폰서가 요구하는 ‘주당 매출 200만원’ 실적을 채우는 건 불가능했다. 겉으로는 ‘오늘도 돈을 벌었다’고 글을 올렸지만, 실제로는 매출에 따라 부여되는 회원 등급을 유지하기 위해 수백만 원을 썼다. “다단계로 돈을 번다는 꿈은 허상이었다”는 박씨는 요즘 소셜미디어에 ‘다단계 피해 예방법’에 대한 글을 올리고 있다.
◇'신기술' 강조하며 피해자 양산
신종 불법 다단계의 또 다른 특징은 암호 화폐, VR(가상현실) 등 최신 기술을 사업에 이용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대개 신기술에 대한 지식을 습득할 기회가 적은 중·장년층을 타깃으로 삼는다. B업체는 VR 기기와 VR 전용 콘텐츠 판매를 통한 가상현실 플랫폼 구축을 표방한다. 이 업체는 매달 10만원의 이용료를 내면 VR 콘텐츠를 이용할 수 있는 사이트를 구축해두고, 신규 회원을 모집할 때마다 기존 회원에게 일정 수당을 지급한다. 가상 화폐 거래소라고 자신들을 소개하는 C업체는 가입 시 계좌 개설을 명목으로 600만원을 받았다. 이 업체는 지인을 소개할 때마다 120만원의 소개 수당을 자신들이 만든 가상 화폐로 지급한다고 홍보했다.
이런 불법 다단계가 큰 피해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다. 부산에 거주하는 50대 이모씨는 지난 1월 직장 상사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들었다. 유튜브 영상을 하루에 3시간씩 시청하고 간단한 설문을 하면 매일 4만원씩 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청하는 영상도 트로트, 포크송 등 50대가 평소 자주 접하는 영상이라 부담이 없다고도 했다. 단, 평가단이 되기 위해선 360만원의 교육비를 내고 평가원 자격을 취득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업체 관계자는 이씨에게 “영상 평가 내용을 구글에 제공하고 대신 광고 수익을 나눠 갖는 것”이라며 “석 달이면 원금을 회수할 수 있다”고 홍보했다고 한다.
이씨가 360만원을 내고 유튜브 영상을 듣자 실제로 한 달간 4만원이 매일 입금됐다. 업체는 단체 카톡방을 통해 매일 영상 시청을 독려하면서 ‘지인을 소개해주면 하루 8000원의 추가 수당을 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이씨는 가족과 지인, 본인 명의로 4월까지 총 33개의 계정을 만들었다. 이들이 낸 교육비만 약 1억2000만원. 그런데 ‘석 달이면 원금 회수가 가능할 것’이라는 이씨의 계산은 한 달 만에 깨졌다. 5월 초부터 갑자기 수당이 입금되지 않은 것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계정을 늘린 가입자를 잡기 위해 잠시 서버를 닫겠다’던 업체 측은 곧 전화 상담까지 막아버렸다고 한다. 아직 남편에게도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는 이씨는 “실제로 통장에 돈이 찍히니까 조금 있던 의심도 사라졌었다”면서 “왜 욕심을 부렸는지, 너무 후회된다”고 했다.
이 업체에서 가입비를 돌려받지 못한 피해자는 지금까지 수천 명으로 추정된다. 7개의 계정을 만든 피해자 김모(29)씨는 “피해자 1500명이 단체 대화방에 모여 집단 소송을 논의하고 있다”고 했다. 경찰 관계자는 “해당 업체에 대한 고소장이 접수돼 내사에 착수한 상황”이라고 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유사수신 행위(금융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상태에서 다수를 상대로 금전을 조달하는 것)로 검거된 피의자는 2016년 2052명에서 2019년 2575명으로 3년 사이 약 25%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