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사람은 정작 해운대 안 간다.’
주변에 부산 사는 지인이 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부산 사람 특유의 허세가 가미된 귀여운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해운대를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좁게 해석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직은 인생 중 부산에서 산 기간이 조금 더 긴, 그러나 곧 역전될 나는 매 계절 해운대를 찾아야 할 이유를 10개쯤은 너끈히 댈 수 있다. 봄엔 벚꽃 피는 달맞이 고갯길을 걸어야 한다. 여름엔 그래도 명불허전 해운대 해수욕장이다. 가을엔 ‘파도 거품 맥주 한잔 너와 단둘이’를 나지막이 부르는 윤건의 ‘가을에 만나’를 들으며 달리는 밤 바다 드라이브를 놓칠 수 없다. 겨울 바다가 주는 호젓함은 또 어디에 빗대겠는가.
그 중 5월에 부산 해운대를 찾을 이유를 고르라면 ‘아트 부산’을 꼽겠다. 2012년 시작된 아트 부산은 국내 최대 규모의 아트페어다. 올해는 오는 14일부터 16일까지 해운대 벡스코 제1전시장에서 열린다. 갤러리현대·국제갤러리·가나아트·조현화랑 등 국내 최정상급 갤러리는 물론이고 독일 에스더쉬퍼·미국 커먼웰스앤드카운슬 등 해외 유명 갤러리까지 110곳이 참여한다. 이 기간엔 부산의 유명 화랑들도 새 작품을 걸고, 손님맞이로 분주하다.
지난 1일 찾은 부산 해운대는 아직 바닷바람이 시원하되 끈적이지 않았고, 눈 찌푸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햇살이 적당히 따사로웠다. 부산으로 예술 여행 떠나기 최적이라는 신호다.
◇달맞이 길에선 누구나 화가를 꿈꾼다
부산 달맞이 길에선 누구나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된다. 해운대 미포에서 시작해 송정해수욕장으로 가는 약 4.5㎞의 이 고갯길은 15번 이상 굽이친다 해서 ‘십오 굽잇길’이라고도 불린다. 송림(松林) 우거진 굽잇길 사이 삐죽이 고개를 내미는 바다와 그 위를 유영하는 윤슬···. 이를 보고 녹지 않을 마음 있을까. 벚꽃 피는 계절, 보름달이라도 뜨는 날엔 동네방네 외치고 싶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른 이 길로 데려와 함께 걸으라고.
부산을 대표하는 지역 화랑인 조현화랑도 바로 이 고개 중턱에 있다. 화랑 곳곳에 자리한 수목이 인근 경관과 자연스레 조화를 이뤄, 처음 오는 사람은 입구를 찾기 어려울 정도다. 담쟁이넝쿨 진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저 멀리 해운대 바다가 숨바꼭질하듯 펼쳐진다.
조현화랑에서는 아트 부산 기간에 맞춰 국내 아트 퍼니처의 선구자인 최병훈(69) 작가의 개인전(5월 13일~7월 4일)을 연다. ‘아트 퍼니처'는 예술 작품이면서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가구를 말한다. 최 작가는 1980년대부터 돌이나 나무, 철 같은 자연 소재로 예술과 결합한 가구 디자인을 선보여왔다. 독일 비트라 디자인 박물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휴스턴 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한다.
최근 조현화랑은 그림 말고 다른 이슈로도 화제가 됐다. 이름에서 눈치챘겠지만 박형준 부산시장과 재혼한 아내 조현씨가 이 화랑의 설립자다. 현재는 조씨의 아들 최재우 대표가 운영한다. 이번 아트페어에서는 작품 판매는 하지 않고 전시만 진행한다.
◇위대한 건 자연일까, 이를 그려낸 작품일까
달맞이 고개를 내려와 해운대 해수욕장으로 자리를 옮기면, 그랜드 조선 부산 3층에 위치한 가나 아트 부산이 있다. 거친 붓질의 동물 그림으로 유명한 사석원(61) 작가의 ‘새벽 광야’전이 오는 30일까지 진행된다. 사석원은 팔레트를 쓰지 않는다. 캔버스에 원색의 유화 물감을 직접 짜서 때론 때리듯이 때론 뿌리듯이 날것 상태로 휘갈긴다. ‘적나라한 야생의 색채들이 화폭에 쌓일 때마다 더욱 진실한 표현'이라고 믿으며, ‘물감은 두꺼울수록 따뜻’하기 때문이다. 그는 “추운 겨울날 두툼한 솜이불이 몸을 따뜻하게 덮어주는 것처럼 겹겹이 쌓인 물감들이 온 세상을 따뜻이 해 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라고 작가 노트에 썼다.
가나 부산의 묘미는 전시가 끝난 다음에 있다. 마지막 전시 공간을 지나면 해운대 바다를 한 조각 잘라 붙여놓은 듯한 창문을 마주하게 된다. 좋아하는 가수의 숨겨 놓은 보너스 트랙을 발견한 느낌이다. 이 그림 같은 풍경 뒤에 놓인 진짜 그림들을 다시 바라보면서,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 같은 질문도 던져본다. 위대한 건 자연일까, 이 자연을 그려내는 인간의 작품일까.
아트 부산이 열리는 벡스코 인근엔 부산 미술의 터줏대감인 부산시립미술관(0507-1404-2602)이 있다. 이곳에선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화가·조각가 이우환(85) 상설전시관인 이우환 공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본 나오시마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만든 이우환 개인 미술관으로, 이우환 자신이 직접 입지 선정부터 건축 기본 설계와 디자인을 맡았다. 젊은 층들 사이에선 방탄소년단의 RM이 방문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RM은 “전시된 작품 중 ‘바람’을 좋아한다”고 방명록을 남겼다. 최근엔 코로나 19로 인해 홈페이지(art.busan.go.kr)를 통한 사전 예약자만 입장이 가능하며, 입장료는 없다.
◇현대차 없는 현대차 전시장
자리를 좀 더 옮겨 해운대 옆 수영구 망미동으로 오면 옛 고려제강 수영공장의 1만650㎡(약 3220평) 부지에 만든 복합 문화공간 F1963이 있다. 2016년 부산 비엔날레가 열렸던 바로 그 공간이다.
지난 4월 현대자동차는 이곳에 현대모터스튜디오 부산을 열었다. 국내 처음으로 현재 판매 중인 현대차를 진열하지 않는 전시장이다. 모든 전시의 초점을 디자인과 문화에 맞췄다. 현대 자동차의 시초를 상징하는 포니를 재해석한 ‘헤리티지 시리즈-포니’, 미디어 아티스트 목진요 작가의 ‘미디어 스트링스’ 등을 만날 수 있다. 국내 최정상 건축가 최욱 소장이 설계를 총괄한 건물 자체도 눈여겨볼 만하다. 고려제강이 와이어 공장이었다는 점에 착안해, 마치 와이어의 장력으로 바다 위에 기둥 없이 떠 있는 현수교와 같은 모습을 연출했다. 기둥이 사라진 넓은 공간에는 대형 LED 스크린(크리에이티브 월)을 통해 영국계 디지털 아트 그룹인 Universal Everything(UE)의 ‘런 포에버' 등을 상영한다.
2018년 부산에 처음 분점을 낸 국제갤러리도 이곳에 있다. 갤러리에 들어서기 전, 바쁘게 걸어가는 현대 도시인들의 영상으로 유명한 줄리안 오피와 설치작가 우고 론디노네의 작품이 주변에 갤러리가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국제갤러리는 국내 현대 미술 중추 작가인 안규철의 개인전 ‘사물의 뒷모습'(5월 13일~7월 4일)을 개최한다. “진실은 사물의 표면보다 보이지 않는 이면에 숨어 있다”는 작가의 핵심 사유가 함축적으로 담긴 전시다. 부산에서의 첫 개인전이자, 작가가 오랜 교직 생활(한예종 미술원)에 마침표를 찍고 작가로서 또 다른 시작을 알리는 자리이기도 하다.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yes24 중고서점, 고려제강이 운영하는 와이어 박물관 ‘키스와이어 뮤지엄’ 등도 F1963에 있다.
◇해운대 바다 보며 즐기는 한국식 애프터눈 티
시원한 바다를 바라보며 맛있는 음식을 즐길 수 있는 건 바다 도시 부산의 특권 중 하나. 달맞이 고개에 위치한 비비비당(051-746-0705)은 이 특권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곳이다. ‘비비비당’은 불교 경전에서 유래한 말로, 하늘 아래 가장 높은 하늘을 의미한다. 그 이름대로 정갈한 한옥식 인테리어에서 해운대 바닷가를 바라보며 ‘한국식 애프터눈 티'를 즐기고 있노라면, 일상의 고단한 무게가 모두 날아가는 듯하다. 연인찻상(2인 3만원)을 주문하면 비비비당의 시그니처 메뉴인 단호박 빙수와 단호박 식혜를 포함해 계절 꽃차와 다식이 코스별로 차려진다.
해운대 미포 인근 할매집원조복국(051-747-7625)은 부산국제영화제 김동호 전 위원장 등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 유명한 맛집이다. 벽면 한쪽을 가득 메운 유명인들의 사진과 사인이 이를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고 관광객 맛집이라는 오해는 마시라. 로컬 부산 주민들도 주말이면 대기표 받아 줄 설 정도로 인기가 높다. 요즘엔 까치복국(2만2000원)이 제철인데, 새콤달콤한 맛의 복 껍질 무침을 곁들여 먹고 싶다면 활참복세트(3만원)도 좋다.
‘부산에 왔으면 그래도 회 한 사라’라고 생각한다면 해운대 미포에 위치한 선창횟집(051-747-7470)을 추천한다. 해운대에 있는 횟집들이야 어딜 가든 전망 좋지 않은 곳 없겠지만, 단독 룸 등이 준비돼 있어 조용하게 식사하기 안성맞춤이다. 1인 3만5000원부터 시작하는 회 정식이 가성비가 좋다.